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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10화 (310/412)

마을로 복귀해서 추가 소식을 전하고, 남은 목재들로 서둘러 목책부터 보강하는 것을 돕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다 지나갔으나 쉴 틈은 없었다.

시엘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 전부와 용병단 그리고 모험가들이 회관에 모여 언성을 높여가며 방침을 정하는 사이, 나는 아실리에와 함께 한 번 더 오크들의 부락으로 향했다. 그사이 별빛마저 구름으로 가려지며 자리 잡은 어둠 탓에 한 치 앞을 구분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기에 괜히 발에 치일 걸 우려해 라이카는 집에 두고 와야만 했다.

숲속의 어둠은 자기 발을 보는 것도 힘들 정도로 깊었기에 나는 최대한 마력을 운용해 안력을 강화한 채 아실리에의 뒤를 따랐다.

오두막에 지내면서 밤에 이동하는 훈련도 많이 받았지만, 이렇게까지 깜깜한 밤에 움직인 적은 없어서 쉽지 않은 이동이었다.

그래도 이끌어주는 아실리에를 따라 목적했던 위치에 늦지 않게 도달할 수는 있었다. 다행히 오크 놈들이 캠프파이어라도 하는 것처럼 불을 피워대는 덕에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진 다음부터는 한결 수월했다.

그 뒤로는 튼튼해 보이는 나무를 골라 타기만 하면 됐다. 아침에는 앙상한 나뭇가지에 사람이 매달려 있는 꼴을 사방팔방에서 볼 수 있었기에 못 했지만 지금은 우리가 안 보이는 만큼 놈들도 안보였으니까.

적당히 굵은 나무에 올라 놈들의 목책 너머를 제대로 살펴본 우리의 짧은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아실리에였다.

"말도 안 되는 규모네."

"그러게."

비정상적이다. 눈대중으로 보아도 밖에 나와 있는 오크만 200여 마리가 되는데, 누군가 고의적으로 오크들을 돕거나 정말 땅에서 솟아난 게 아닌 이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필 완벽하게 도시들의 정찰 범위 외에 위치한 대규모 오크 부락이라. 대놓고 인위적이군."

"으음, 저렇게 많은 오크들이 모여 있는 걸 서부 왕국 지대가 아니라 이티스엘에서 보게 될 줄은..."

진짜 마족들이 이티스엘에 혼란을 흩뿌리기 위해 게이트를 이용한 게 아닐까. 마법 폭탄 같은 걸 시도했다가 작살이 난 전적이 있으니 몬스터를 이용한 어부지리를 노려도 이상할 건 없어 보였다.

"엘디, 저 뒤쪽에 동굴 같은 거 보여? 화톳불 맞은 편."

"어, 찾았어."

"방금 저기로 주술사같은 복장을 한 오크들이 무리 지어 들어갔어. 뭔가 잔뜩 들고 간 걸 보면 무슨 의식을 치르거나... 저 많은 오크들이 이곳에 있을 수 있는 이유가 안에 있지 않을까?"

"음... 그럴싸 해."

주술사가 최소 셋이나 있다는 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최소한 어디에 뭐가 있는지 미리 짐작할 기회를 얻었다는 점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저놈들이 우리를 습격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저곳을 습격하게 될 테니까.

시간을 들여 살펴볼수록 누군가 손을 쓴 게 분명하다는 확신이 생겼다.

저놈들 역시 이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진 않았다. 축제처럼 활활 타오르는 화톳불과 달리 그 주변에는 식량을 두고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오크들이 상당했고, 그러한 다툼 역시 굉장히 익숙해 보였다. 하지만 그 외에 알아낼 만한 정보는 없었다. 애당초 오크라는 몬스터 자체가 비밀 및 체계성과는 거리가 먼 단순한 존재였기에 더더욱 그랬다.

혹시나 싶어 삼십 여분을 더 관찰하는 사이 미개한 몬스터들의 막고라만 실컷 구경하게 된 우리는 조심스럽게 나무를 내려와 조금 서둘러 귀환했다. 다른 건 몰라도 놈들도 어두운 숲속으로 정찰병을 움직이지 않아 귀환길만큼은 순조로웠다.

그렇게 짧은 정찰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온 나는 처음 출발했을 때 그대로 회관에 모여 조금 더 높아진 언성으로 토론하는 이들 앞에 서서 보고 온 것을 이야기해줬다.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미래의 거주민들은 침음을 흘리면서도 한없이 심각한 얼굴로 열심히 저들끼리 대화를 나눴고, 용병들은 시큰둥한 얼굴로 술잔을 기울였으며 모험가들은 동공에 지진을 일으키며 저들끼리 뭉쳐 뭔가 떠들기 시작했다. 흠, 이렇게 앞에 서서 보니 참 다채롭기 그지없군.

잠깐의 소란 끝에, 거주민들의 웅성거림이 사그라들며 그들을 대표해 시엘이 입장을 밝혔다.

"저희는 이곳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나야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반응이었으나 모험가들은 대번 똥 씹은 표정을 지으며 언성이 높아졌다. 대충 개죽음이다, 위험하다, 미친 짓이다 등등 부정적인 의견들이었다.

쉽게 이해되는 반응은 아니었다. 그들은 결국 고용된 모험가였고, 200여 마리의 오크 부대라는 건 충분히 계약 상의 예기치 못한 변수로 적용되어 페널티 없는 의뢰 조정의 사유가 될 수 있는 수준이다. 라비엘에서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는다면 이대로 의뢰를 포기하고 돌아간다 하더라도 계약 파기로 인한 불이익을 받지는 않을 터였다. 지금처럼 어떻게든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하며 남고자 하는 거주민들의 의견을 부정할 이유가 전혀 없다.

넘치는 인류애로 인해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게 하려는 거면 모르겠는데, 그렇다고 보기엔 반응이 부정적이다.

"이보쇼. 지금 싸우는 게 댁들이 아니라고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거 아뇨?"

"조금도 가볍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희도 싸울 것입니다."

"하... 댁들이 싸워 봤자 뭐 얼마나 싸운다고?"

그냥 내키지 않으면 떠날 뿐인 상황에 저렇게 인상까지 써가며 의견을 뒤집으려는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아니, 생각해 보니 아예 없진 않았다. 이대로 돌아가면 그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돈을 덜 벌게 될 테니까.

불현듯 떠오른 그 생각에 불쾌해진 나는 몸을 녹이기 위해 마시고 있던 데운 와인을 바닥에 뿌린 뒤 그대로 방금 떠든 모험가를 향해 나무잔을 집어던졌다.

빡! 하는 소리와 함께 정통으로 잔에 머리를 맞은 모험가가 거친 욕을 뱉자 회관에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속에서 누가 자신에게 술잔을 던진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눈깔을 굴리던 모험가가 나와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움찔거리며 움직임을 멈췄다.

술잔을 던진 자세 그대로 녀석을 노려봤기에 내가 던졌다는 걸 모를 수는 없었다. 그저 약강강약의 자세를 보일 줄 아는 놈답게 그 어떠한 욕도, 불쾌감 가득한 표정도 짓지 못할 뿐이다. 그 모습이 머리 나쁜 오크들 만큼이나 꼴 같잖았다.

"꼬우면 짐 챙겨서 라비엘로 꺼져. 니가 여기서 그딴 말을 지껄일 실력이나 된다고 생각해? 적급도 싹 다 입 다물고 있는데 어디서 지랄이야?"

적급들 중 누군가였으면 모를까, 청급인지 황급인지 알 수 없는 놈이 애먼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니 보는 내가 다 어이가 없어진다. 심지어 얻어 걸린 기회에 딸려온 거랑 다를 바 없는 주제에?

호로새끼도 그 정도면 아주 특급 호로새끼다. 나는 놈이 떠들 때 어느 정도 동조하는 뉘앙스를 풍기던 놈들까지 싹 다 훑어보며 입장을 확실히 하기로 마음먹었다.

"부족한 실력 때문에 벌벌 떨며 설레발 치는 거까지는 뭐라 안 하는데, 드러누울 자리는 잘 보고 판단하는 게 좋을 거다. 그 오크놈들이 계약 조정에 준할 정도의 위협이기는 해도 아직 확정된 거 아니니까. 우리가 정찰을 빨리 마치고 돌아왔으니 뭐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리에 놈들이 있는 것처럼 여기고 있나본데, 니 수준이면 죽어라 달려도 한나절은 쉬지 않고 가야 도착할걸?"

오크들은 뭐 거기서부터 여기까지 달려 오겠는가? 달리기는커녕 느릿느릿 산책하는 기분으로 걸어오겠지. 설령 당장 내일 새로운 습격대가 파견된다 하더라도 그 게으른 돼지들의 생활 패턴을 고려하면 해가 중천에 떠 있을 정도로 느지막하게 움직일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이곳에 도착하는 건 빨라야 다음 날이다.

놈들이 통째로 움직일 경우? 지능의 한계가 명확한 놈들답게 미신과 주술에는 진심인 놈들이다. 주술사가 없으면 모르겠는데 무려 셋이나 있으니, 다른 건 몰라도 족장이 급발진하여 당장 출발할 가능성은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무리 빨라도 주술사들이 위대한 자기네들 신의 뜻을 확인해 본다고 하루, 승리를 위한 제사를 지낸다 뭐다 하면서 또 하루를 까먹은 다음에야 출발할 테니까. 전투에서는 좆같을지언정 그런 부분에서는 만만세다.

그런 사실과 정보에 기인한 추측을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알만한 놈들은 다 짐작하고 있어야 정상이고, 모르는 놈들은 그냥 그 정도 수준이기에 굳이 설명해 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 눈치 깐 놈들도 있겠지만 오크들은 아직 '잠재적인 위협'에 불과하다. 서둘러 라비엘에 사람을 보낸 건 그 잠재적인 위협이 진짜 위협으로 변하는 걸 병신처럼 멀뚱히 바라볼 생각이 없기 때문이고, 이렇게 회의를 소집한 건 너같은 새끼가 마음대로 지껄일 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게 아니라 의뢰 대상인 거주민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결정할 판단을 내릴 때 사용하기 위한 근거와 자료를 제시하라고 모은 거야."

그걸 알기 때문에 용병들은 시종일관 시큰둥하다. 저게 정상적인 반응이다.

자신 있으면 남아서 싸우고, 없으면 의뢰 파기 사유가 확실해짐과 동시에 지금까지 일한 만큼 돈 받고 떠나면 된다.

감정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거주민들이 그들을 겁쟁이라고 비난한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그럴 일은 없어보였다.

"불안해하는 것까지는 봐줄 수 있어도 이미 세상 다 끝난 것처럼 굴며 언제든지 계약 파기해도 문제없는 놈마냥 행동하는 건 엄연히 계약 위반이라는 소리다. 알아 먹었으면 같은 모험가 쪽팔리게 만들지 말고 찌그러져."

대화에도 수준이 있는 법이다. 업무적 관계를 지닌 이들과 대화하는 것처럼 열 살난 꼬마애들한테 백날 말해봤자 아이들은 뭔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한다. 상대방과 제대로 대화하고 싶다면 상대방의 수준에 맞춰 대화를 이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폭력과 쌍욕을 통해서만 현실을 자각하고 위압감을 느끼는 놈들에겐 그리 대해주는 게 맞다. 정중히 말해도 알아먹지도 못할 뿐더러, 되려 지가 옳아서 내가 저 자세로 나온다는 헛된 믿음으로 내 감정과 기력만 소모시킬 뿐이니까.

봐라, 방금 전까진 시엘 앞에서 세상 센 척은 다 하더니 바로 대가리 박고 찌그러지는 저 비루한 꼬라지를. 한심하기 그지없어 혀를 차고 있었더니 옆에서 아실리에가 조용히 팔을 꼬집으며 속삭였다.

"엘디! 또 그런다! 품위 없게 말이 그게 뭐니!"

"제 품위는 저딴 놈에게 욕 좀 박는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기사님 흉내 내며 숭고한 척 사기를 고양시킬 필요도 없는 자리였다. 의사 결정권을 지닌 거주민들이 저런 되도 않는 모험가 녀석들보다 더 굳건하게 의지를 빛내고 있었으니까.

부디 그 의지가 보답받을 수 있기를 에파가 님께 기도하는 사이, 당장 내일 서둘러 처리해야 하는 일들을 정하고 분담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한밤중의 회의는 막을 내렸다.

격하게 가엔달 파티가 그리워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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