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크 크룽겐 카바는 스스로를 강인한 전사라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그 주장에 반박했던 많은 오크들이 죄다 카바의 도끼에 두개골이 쪼개졌으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부족에서도 그의 용맹과 강인함은 인정받는 추세였고 그 결과 카바는 하루가 다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위대한 족장 카쿨라의 막내 아들 카쿨라 바솨를 찾는 다섯 명의 탐색조에 합류하게 되었다. 족장의 망나니 아들을 찾으러 나서는 건 딱히 어려운 일도, 두려운 일도 아니었으나 카바는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 미지의 땅은 너무 추웠고, 불가에서 떠나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하얀 흙 같으니. 도통 적응이 안 되는군."
대초원에도 겨울은 있기에 아예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 정도는 아니었다. 온 세상이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쏟아지는 하늘의 흙이라니? 주술사들은 족장 카쿨라가 대족장의 길을 걸을 징조라며 난리를 피웠지만 카바는 이 끔찍한 추위와 하얀 흙이 영 내키지 않았다.
닿으면 녹아 사라지는 주제에 육신을 차갑게 만든다. 마치 싸늘한 시체로 만들기 위한 것처럼.
"강인한 카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같은 탐색조의 오크가 외치는 말에 카바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가 이 땅의 저주받은 하얀 흙을 싫어하는 두 번째 이유였다. 세상을 집어삼킬 것처럼 쏟아지던 하얀 흙은 발자국도, 흔적도 전부 집어삼켜 버렸다.
"별수 없다! 어떻게든 도끼질한 나무들을 찾아 나아 갈 수밖에."
"어차피 죽은 거 아닌가? 바솨가 약해서 생긴 일이다. 왜 이 고생을 해야하나?"
발을 움직이면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툴툴거리는 오크의 불만에 카바는 그 오크의 송곳니 하나를 박살 내야 하나, 아니면 그냥 내버려 둬야하나 잠깐 고민했다.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바솨는 족장 카쿨라가 열 명의 딸을 보고도 포기하지 않은 끝에 겨우 얻은 유일한 사내였다. 아무리 멍청하고 나약하다고 하더라도 아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설령 자신이었더라도 차마 내치지는 못했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판단한 카바는 냉큼 주먹을 휘둘러 구시렁 거리던 오크의 송곳니 하나를 뚝 하고 분질러 버렸다.
"나약한 겁쟁이나 뒤에서 욕하는 것이다 쿠안! 불만이 있으면 당장 카쿨라에게 달려가 네 영혼을 걸고 도끼를 휘둘러라!"
"크흑! 카바의 말이 맞다.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다."
"이게 다 하얀 흙 때문이다. 몸을 시체처럼 차갑게 만드니 전사의 혼이 자꾸만 몸에서 빠져나가고, 오크답지 않은 짓을 하게 만드는 거지.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쿠안이라 불린 오크는 갑자기 죽빵을 얻어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카바의 말에 마치 큰 깨달음을 얻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주억거리며 수색에 집중했다. 다행히 카바가 내뱉은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오크들은 불만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으면 허겁지겁 놀라며 어떻게든 몸에서 열을 내기 위해 있는 힘껏 도끼를 휘둘렀다.
이윽고 그 행위는 수색을 하면서 강해지기도 한다, 는 기묘한 형태로 의도가 바뀌어 너나 할 것 없이 도끼를 휘두르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그 모습을 보며 카바는 매우 흡족해했다.
그렇게 아침부터 이어진 수색은 쉬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다가 해가 떨어져 짧은 노을이 지기 시작할 무렵에서야 겨우 끝날 수 있었다.
도끼질을 덜 했으면 더 빨리 끝날 수 있었겠지만 오크들에게 그런 가정은 의미 없는 것이었다. 어차피 바솨가 죽은 건 뻔했으니, 시체를 찾는데 무의미하게 날아가는 시간을 가치 있게 썼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하지만 막상 동족의 시체를 찾고나니 분위기가 가라앉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카바. 바솨다."
"...죽었군."
굳이 말할 필요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죽어 있었다. 심지어 그냥 죽은 것도 아니고 마치 개구리처럼 꼴사납게 혓바닥까지 내민 채 푸르게 식어 있는 바솨의 시체 앞에서 카바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초원의 아버지여..."
신께 기도를 올리는 건 아니었다. 그저 바솨의 죽음에 족장 카쿨라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너무나도 뻔했기에 한탄한 것에 불과했다.
심지어 저렇게 한심한 꼴로 죽어 있다니? 대체 저 모습을 보고 어떻게 위대한 족장 카쿨라의 막내 아들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둘이서 함께 덤볐는데도 죽었다. 강한 적이다."
시체를 살펴보던 쿠안이 내뱉은 말을 듣고 보니 실로 그러했다. 비록 바솨가 제 구실을 잘하지 못 하는 오크였다고 한들 같이 붙어 있던 오크들의 실력은 쓸 만했다. 썩어도 오크인 바솨가 그중 한 명과 함께 싸웠음에도 졌다는 점에서 카바는 작게나마 안도했다.
"그래도 하늘의 대초원에 있는 선조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전투를 했겠군."
하지만 저 개구리 같은 혓바닥은 문제였다. 일단 바솨의 시체만이라도 가져가기 위해 다가가 입 안으로 다시 혓바닥을 밀어 넣어 보았지만 도통 들어갈 줄 모르고 다시 비죽 튀어나왔다.
"끄응, 죽은 개구리만도 못한 꼴이다. 이런 꼴을 카쿨라가 보면 그대로 피가 거꾸로 솟아 쓰러질지도 모른다."
"잘 들어가지도 않는다. 어쩌냐 카바?"
실로 난제였다. 어떻게든 입안에 다시 넣는다고 한들 들고 가다가 다시 튀어나오면 의미가 없었다. 다섯 마리의 오크가 모두 머리를 맞대고 끙끙거리던 찰나, 불현듯 무언가 떠오른 것처럼 펄쩍 뛴 쿠안이 제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강인하고 멋스러운 오크들의 도끼와 다르게 한없이 작고 빈약해 보이는 인간들의 무기였다.
"카바! 나 인간들이 쓰는 작은 칼이 있다! 이거로 혓바닥을 자르는 건 어떠냐?"
"너 주술사냐?! 똑똑하다!"
네 오크들이 감탄을 터트리며 보내는 우렁찬 박수와 감탄 속에서 쿠안은 기분 좋게 단검을 카바에게 넘겼다. 단검을 받아 든 카바는 어디까지 잘라야 하나 잠깐 고민하다가 최대한 입을 벌려 깊숙한 곳까지 혓바닥을 자르기로 했다.
괜히 어중간하게 잘린 게 튀어나오면 다른 의미로 카쿨라가 분노할 게 뻔했다.
"음! 아주 좋다. 인간들의 나약한 무기가 이렇게 쓰일 줄이야!"
혀를 자르고 까뒤집어진 눈을 감겨 주는 것만으로 죽은 개구리가 죽은 오크로 변하는 주술같은 광경에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했다. 만족스럽게 쿠안에게 단검을 돌려준 카바는 직접 바솨의 시체를 들쳐메고 귀환길에 올랐다.
무거운 시체 덕에 몸에서 절로 열이 오르며 땀이 났다. 마치 이미 죽은 이로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죽음을 속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카바는 스스로의 재치에 내심 감탄하며 기쁘게 걸음을 옮겼고, 올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부락에 돌아왔다. 하지만 거리가 거리인 만큼 그들의 도착은 새벽이 다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다행히 족장 카쿨라를 깨울 필요는 없었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짐작한 것처럼 근엄하게 불 앞에 앉아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크아아아! 바솨아아아!!"
옆에 있던 바솨의 어미가 시체를 보자마자 울음과 비명을 터트렸다. 카바는 바솨의 시체를 내려놓으며 카쿨라를 바라보았고, 늙고 위대한 오크는 족장다운 위엄을 담아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카바에게 다가왔다.
"어땠나."
"우리 다섯 오크가 전장을 확인했다. 바솨와 동행한 불락이 함께 싸워야 할 정도로 강한 적에게 죽었다. 바솨는 하늘의 대초원에서 조상들과 만났을 것이다."
자지 않고 깨어 있던 오크들이 카바의 말에 가슴을 두드렸고, 카쿨라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카바는 거기서 슬픔이 아닌 늙은 오크의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카쿨라는 고개를 끄덕인 뒤 바솨의 시체를 안고 오열하는 자신의 아내에게 다가 갔다.
"비켜라 루슬라."
바솨의 어미이자 카쿨라의 여덟 번째 아내인 루슬라는 울음을 멈추지 못하면서도 순순히 자리를 비켰다. 그러자 카쿨라가 바닥에 널브러진 바솨의 곁에 다가가 그 모습을 면밀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긴 침묵 속에서 그가 다시 몸을 일으켰을 때, 카바는 카쿨라가 두 배는 더 커진 듯한 착각을 느꼈다.
"들어라 대초원의 아이들아!"
모든 오크가 귀를 기울였다. 루슬라마저 족장에게 방해되지 않기 위해 숨죽여 울었다.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본 카쿨라는 다시 오크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주술사들의 예언을 따라 고대의 신비를 접하고 이 땅에 들어섰을 때, 이곳에 있던 뿔 달린 인간들에게 많은 대초원의 아이들이 죽은 것을 기억한다. 정찰을 나간 아이들도 많이 죽었다! 제아무리 바솨가 내 아들이라 한들 이 죽음 역시 그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카쿨라가 천천히 몸을 숙여 두 팔로 바솨의 시체를 조심히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족장은 아버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근엄함이 아니라 슬픔이 흐르고 있었다.
"용맹하게 싸운 바솨는 하늘의 대초원에 가더라도 선조들에게 자신의 싸움을 자랑할 수 없게 되었다! 비열한 인간들이 자신들의 나약함을 우리 선조들이 알게 될까 두려워 바솨의 혀를 잘랐기 때문이다!"
웅성거림이 일어났고, 카바는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같이 정찰을 나갔던 오크들을 둘러보았다.
그들 역시 카바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불안이나 당황같은 건 없었다. 그들이 공유하는 생각은 딱 하나였다.
그게 그렇게 되는 거였나? 이거 죽을 땐 혀를 잘 지키고 죽어야겠군.
"지금까지 죽은 아이들이 그저 나약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싸우다 죽었으니 그만이라 생각했다! 허나 이 춥고 하얀 흙이 가득한 땅에서 죽어 나간 아이들이 내 아들과 같이 혀가 잘려 말도 못한 채 선조들과 만났다면! 이건 잘못됐다!"
"명예도 모르고 비겁한 인간들! 다 죽여야 한다!"
"죽여야 한다 족장! 전쟁이다!"
카쿨라의 외침에 오크들이 괴성을 지르며 가슴을 두드렸다. 다섯 오크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이들과 같이 괴성을 지르며 가슴을 두드렸다.
어차피 바솨가 죽을 때 혀는 멀쩡했으니 그는 선조들에게 자신의 전투를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카쿨라가 착각한 것이긴 하지만, 그 덕에 전쟁이 시작된다고 하니 좋은 게 좋은 거였다.
"전쟁! 전쟁!"
오크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카바는 생각했다.
'족장의 피가 아깝던 반푼이가 죽어서 선물을 줬군.'
바솨는 반푼이일지언정 전쟁을 선물하는 착한 오크가 되었다.
"발견했던 인간의 마을을 본보기로 삼는다! 주술사들은 신께 이 사실을 전해 축복을 받아라! 의식이 끝나자마자 공격한다!"
"크아아아!"
엘드미아가 봤다면 천하의 미개하고 무식한 빡대가리들이라며 두 눈을 질끈 감았을 만한 광경 속에서 오크들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