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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13화 (313/412)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가식과 기만일 가능성을 염두하고 있었던 내 걱정이 무색해질 정도로 비스퀜테는 정상적인 귀족이었다.

아닌가? 오히려 이쪽 상식에 빗대면 저게 비정상에 가까울지도. 차라리 착한 귀족이었다는 말이 맞겠다.

행실은 물론이고 정말 점심이 되기 전에 이십여 마리의 비룡들이 마을을 향해 날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대신 근무서느라 시간을 빼앗긴 아브남에게 와인 한 병을 쥐어 준 뒤 마저 근무를 서다가 교대하며 보게 된, 왕실이 저런 맛에 비룡기사들을 육성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장관인 광경에 정신이 팔려 있었더니 조용히 다가온 비스퀜테가 만족스러운 어조로 운을 뗐다.

“사실 어제의 폭설 때문에 추가 물자를 실은 마차가 오는 길이 험난할 것을 걱정했는데, 이렇게 거짓말처럼 맑아져서 참 다행입니다. 신께서 저희를 보우하시는군요.”

자랑질을 하려고 온 줄 알았더니 그런 건 없었다. 게다가 신실하기까지 하다! 너무나도 그림으로 그린 듯한 귀족적인 반응에 적당히 호응하며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는 그걸로 대화를 마칠 생각이 없었는지 이것저것 다른 주제를 꺼내며 말을 이어 나갔다.

“배우기로, 오크들은 전략과 전술의 개념이 매우 희박하다고 하더군요. 덕분에 의도치 않게 흥미로운 그림이 그려지는 경우가 자주 있다고 합니다. 서부 지대에는 삼십여 마리의 오크들을 한 명의 전사가 개활지에서 물리친 기록이 있는데, 그 개인의 무력이 뛰어난 것도 있겠으나 오크들이 그를 에워싸고 동시에 공격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문제는 이놈이 전투를 앞두고 예술 이야기나 꺼내는 투구걸이들과 달리 진짜 실속 있고 겁나게 흥미로운 주제를 꺼내 들어 추임새를 넣지 않고는 못 버티게 만드는 재주까지 겸비했다는 점이다.

“예? 그럼 대체 뭘 어떻게 싸웠답니까?”

“무려 기사들의 결투처럼 1대1로 싸웠다고 합니다. 마지막 한 명의 오크가 남을 때까지 물러서지 않고 말이죠. 그들이 기사도와는 아무런 접점도 없었을 것이 분명하나 강한 전사와의 전투를 통해 자신들이 믿는 사후 세계로 간다는 믿음이 낳은 결과였던 것이지요. 개인적으로는 매우 괄목할 만한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미친 세상에 설마설마했는데 진짜 막고라를 떴다니? 너무나도 충격적인 이야기에 벙찌는 것조차 잊은 나는 비스퀜테에게 되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거기 오크는 종이 다른가요? 여기서 만난 놈들은 둘이서 잘만 덤비는 거 같던데.”

“하하, 예리한 의문입니다. 사실 그 사례는 전사도, 오크들도 상당히 비범한 편에 속했죠. 서부 8 왕국이 5 왕국으로 바뀌고 녹색 대전의 막바지에 인류의 영토에 고립된 오크들과 최전선에서 싸우던 전사의 일화거든요. 이미 전쟁의 막바지에 고립된 터라 오크들은 살아서 대초원으로 돌아갈 방법없이 죽음만을 기다리는 상황이었던 거죠.”

굉장히 오래된 이야기였으나 워낙 충격적인 대사건이었던 탓에 기록이 잘되어 있었다고, 비스퀜테는 말했다.

“구차하게 굴지 말고 용맹하게 싸워 하늘의 대초원으로 꺼져라, 오크들을 상대한 전사가 외친 말이라고 합니다. 기록자는 엄연히 문화와 지성이 있는 몬스터이기에 일종의 순교를 꿈꿨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참 신기하죠. 비록 좀 많이 외골수이라 한들, 그들이 인간을 식재료로 여기지만 않았다면 그 정도 지성과 문화를 쌓은 이상 다른 종족들처럼 나름 멀쩡한 관계를 맺고 있었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젊은 놈이 심지어 사고마저도 유연하네. 진짜로 보기 드문 인재다. 라비엘의 영주가 자신있게 보낸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건가. 내심 감탄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더니 내 시선을 의식한 비스퀜테가 멋쩍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이거, 좀 우습게 들릴 수도 있는 의견이었겠군요.”

“그럴 리가요. 굉장히 다양한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계신다는 점에 감탄했을 뿐입니다. 모험가들은 상상력이 부족한 순서대로 죽는다는 말이 있죠. 지천에 널린 모험가들이 비스퀜테 경의 반만큼만 생각할 수 있었더라도 실력자가 부족할 일은 없었을 겁니다.”

그러자 이번엔 오히려 내 반응을 예상 못 했다는 듯 비스퀜테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저런 발상 때문에 다른 기사나 귀족들이 괴짜 취급을 했을지도.

뛰어난 사람은 참 뛰어나지만 보편적으로는 관성에 찌들어 버린 머저리들이 더 많은 게 현실이니까.

“그렇군요. 아직 배움이 부족해 모험가들의 일화는 많이 알지 못했습니다. 이번 일이 정리되면 한 번 알아봐야겠군요.”

저 신분을 가리지 않는 출중한 탐구욕을 봐라.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나쁜 엘드미아와 더 나쁜 엘드미아마저 기립박수를 칠 정도로 제대로 된 놈이었다. 비스퀜테는 잠시 턱을 괸 채 고민하다가 모험가들을 내려 두고 수도로 돌아가는 비룡들을 발견하고는 가볍게 손뼉을 부딪치며 화제를 전환했다.

“비룡들도 이제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거 같군요. 괜찮으시다면 같이 가서 저들과 대화하는 것을 도와주시겠습니까? 수도에서 온 모험가들이니 아무래도 저 혼자 대화하는 것보다 에가 경과 함께 상황을 설명하는 게 협조를 구하기 쉬울 것 같아서요.”

“물론 그래야죠.”

간만에 가엔달 파티만큼이나 기똥찬 개념인을 만났는데 척을 질 필요가 어디 있겠어. 어차피 해야 할 일 같이 가서 한 번에 처리하는 게 편했기에 난 그와 함께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모험가들에게로 향했다.

수도에서 온 모험가들 중에 황급은 없었다. 스무 명 중 적급만 열 다섯에 청급이 다섯. 그마저도 청급 다섯은 나 역시 안면이 있는 이들로 실력이 빠지는 녀석들은 아니었다. 인성이 좀 빠진 놈들이 대여섯 명 있긴 했는데, 이미 퍼질 대로 퍼진 내 악명 덕에 알아서 착해졌다.

“과, 광견?”

“옘병 어쩐지 묘하게 운수가 좋더라니... 어? 아닌가? 단두대가 있으면 날로 먹는 일감인 건가?”

허튼소리나 지껄이는 놈들의 뒤통수를 때려줄까 싶기도 했지만 알아서 조신하게 굴겠다는데 굳이 때려서 화를 돋굴 필요도 없었다. 그 안에 가엔달 파티가 없는 것은 아쉬웠으나 솔직히 여기서 또 마주치게 되면 그건 그거대로 놀라운 일이었기에 그러려니 했다.

“반갑습니다 모험가 여러분. 여러분의 고용주이자 관문 도시 라비엘에서 파견된 평기사 비스퀜테라고 합니다. 모험가 여러분들과 관련된 사항들은 여기 계시는 적급 모험가 엘드미아 에가 경이 맡게 되었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내 악명에 기사이면서도 정중한 비스퀜테가 합쳐지자 모험가들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순응하며 회관으로 이동했다. 난 그 광경에 한번, 그리고 이런 번거로운 짓을 모험가들이 비룡을 타고 날아올 때마다 반복할 기세인 비스퀜테의 성실함에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응당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어차피 내가 근무를 서는 동안 한번 더 정찰을 나간 아실리에가 돌아올 때까지는 딱히 할 일도 없었기에, 난 적당히 모닥불을 지피고 그와 함께 자리를 지키기로 했다.

그렇게 또다시 풀리기 시작한 비스퀜테의 이야기보따리에 심취해 있기를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숲속 저 멀리서 들려오는 말달리는 소리가 우리의 이목을 끌었다.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눈보라가 없었기에 우리의 시력으로 말에 올라타 있는 사람을 확인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모험가 분이신 거 같은데, 지나가는 길인 걸까요? 비룡 이용은 무료라서 굳이 말을 타고 올 필요가 없을 텐데...”

정말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비스퀜테와 달리 난 헛웃음을 터트려야 했다. 저 멀리서 멋들어진 금빛 반곱슬 머리를 흩날리며 달려오는 여전사와 구면이었기 때문이다. 왜 혼자 말을 타고 오는지 궁금하긴 했으나 그건 어차피 남는 시간 동안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오러도 쓰지 않으면서 놀라운 신체 능력을 지닌 그녀 역시 이미 나를 알아 보았는지 저 멀리서부터 유쾌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더 이상 모험가가 오지 않아도 어떻게든 오크 문제가 해결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여! 엘드미아! 어쩐지 네가 엮여 있을 거 같더라고!”

지난 의뢰 때 얻은 큼직한 군마 위에서 이 추운 겨울과 홀로 동떨어진, 조금은 얇은 복장을 한 예카트리나의 인사에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웃으며 화답했다.

“아니, 의뢰를 받았으면 비룡을 타고 오지 왜 피곤하게 말을 타고 오십니까?”

뭐 다른 이유가 싶어서 인사 삼아 던진 말이었는데,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예카트리나가 순간 경직이라도 일으킨 것처럼 움찔거렸다.

“어어어, 그, 내 무기가 워낙 무겁잖아? 괜히 날아다니다가 떨어뜨리면 위험하니까...”

심지어 대답마저 묘하게 변명같을 뿐만 아니라 방금 전까지는 화사하기 그지없던 미소도 어쩐지 경련을 일으키는 것처럼 어색하게 바뀌었다.

“예? 그거보다 더 무거운 짐도 잘 옮기는 비룡인데 왜 그런 걱정을?”

“으, 그, 게다가! 비룡은 높이 날아서 쌀쌀해!”

“아니, 예카트리나는 러빌사람이라서 별로 춥지도 않...”

이어지는 요상한 변명과 알아서 다가오는 말 덕에 점점 또렷해지는 예카트리나의 표정을 보고 있자 하니 불현듯 한 가지 가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설마?

“예카트리나?”

“어어?”

“혹시 높은 곳이 무섭습니까?”

“무무무무무, 무슨 소리야! 러빌의 산이 얼마나 높은데! 높은 곳에서 뛰어다니는 건 일상이라고!”

용조차 저 큼직한 워 해머로 뚝배기를 깨버릴 것 같은 용맹함의 소유자 예카트리나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먹히지도 않을 변명을 했다.

와, 세상에. 예카트리나가 고소공포증이라니. 비행기도 없는 세상이라 납득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정말 납득이 안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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