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워리어로 여기고 있었던 예카트리나에게 약점이 있을 거라 예상못해 놀란 것이었지, 딱히 그걸로 장난을 칠 생각은 없었기에 난 그냥 넘어가려고 했다.
"나 높은데 잘 올라가. 러빌에서는..."
정작 예카트리나는 마치 최악의 과거사를 들킨 사람처럼 허둥지둥 귀여운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뭐 러빌 용골 산맥에서 제일 높은 나무에도 올라갔었다, 어쨌다 같은 이야기들은 분명 범상찮은 내용같았지만... 이미 고소공포증이 아니라는 것을 자기 나름대로 변명하기 위해 늘어놓는 이야기다 보니 어딘지 모르게 어린 시절의 작은 모험을 통해 쌓은 업적처럼 느껴져서 감흥이 적었다.
비스퀜테에게 적당히 양해를 구한 뒤 자리를 옮길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고소공포증을 부정하는 예카트리나에게 적당히 맞춰주고 나서야 그녀는 만족스럽게 말을 멈췄다.
아니, 잠깐. 그 변명이 통했다고 믿고 저렇게 자신만만한 건가? 역시 종종 보여줬던 문명전사의 모습은 허당이었던 건가? 그 모습을 보고 있자 하니 언젠가 예카트리나가 오러를 쓰게 되면 엘드미아의 비룡 다이빙에 합류시켜 매운맛을 보여주고 싶어졌다.
"다른 분들은 그럼 비룡을 타고 오기로 한 건가요?"
"아니. 이번엔 나만 왔어."
"엥? 파티로 다니고 있던 거 아니었습니까?"
굉장히 의외의 대답에 반문하니, 예카트리나가 입맛을 다시며 설명해주었다.
"렐리에는 원래 겨울만 되면 방에 박혀서 연구만 하고, 긴 씨는 사정이 있어서 지인의 공방을 좀 돕는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가엔달 씨는 이번 겨울동안 고향에 다녀오기로 했어. 발길이 드문 산골 마을이라서 종종 겨울에 내려가 마을 주변을 정리한다고 하더라고."
도시들이 겨울에 모험가들을 쥐고 있고 싶어 하는 것처럼 작은 마을이라 할지라도 가능하다면 겨울동안 마을을 공격하는 몬스터들을 처치해 줄 모험가를 원하는 법이다. 당연히 많은 돈이 드는 일이라서 보통은 청급도 고용하기 힘든데, 그렇게까지 고향을 챙길 줄이야.
"햐, 적급 모험가를 겨울 모험가로 쓰는 마을이라니. 어디 가서 자랑해도 되겠네."
"하하하! 누가 아니래. 어쨌든 그래서 나만 왔어."
아쉬운 이야기었지만 그래도 예카트리나는 어디 가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솔직히 지금 상황에서는 그 누구보다 든든한 동료였다.
"예카트리나에겐 별일이 없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안 그래도 마을을 지키며 오크들을 상대하자니 쉽지 않아 보였거든요. 덕분에 한시름 놓았습니다."
애당초 오크같은 놈들을 상대할 땐 예카트리나와 긴 씨가 최적의 인재다. 마법사인 렐리에도 빠질 수는 없지만, 일단 몸으로 밀고 보는 놈들이라서 마법사를 지키는 것도 쉽지 않다. 십여 마리를 동시에 구워 버려도 그 뒤에서 십여 마리가 구워진 시체를 밟고 달려드는 놈들이니까.
일단은 비스퀜테와 함께 일하고 있는 입장인 만큼 자세한 이야기는 차후 식사 때 나누기로 한 뒤 회관의 위치를 알려주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자 매우 흥미롭다는 듯 예카트리나를 살펴보던 비스퀜테가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혹시 저분이 그 유명한 공성추의 예카트리나입니까?"
"어... 그런 별명이 있었던 거 같긴 합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런저런 소문과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는 건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대화하며 충분히 알 수 있었지만 예카트리나도 안다고? 모험가에게도 지대한 관심이 있는 건가 싶었는데 돌아온 건 의외의 대답이었다.
"한 3년 정도 전에 영지전이 잦은 서부의 전장에서 잠깐이나마 그 용력勇力을 펼쳐 명성이 자자했던 분입니다. 한 영지는 그녀의 워 해머에 철로 된 성문이 크게 우그러져 사람이 고개조차 숙이지 않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더군요."
미친 대체 뭘 하고 다녔던 거야? 어처구니가 없는 이야기였지만 너무나도 가능할 것만 같아서 제대로 된 반응을 못 하고 있었더니 비스퀜테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이런, 모르고 계셨나보군요. 공성추라는 별명도 그때 생겼다고 알고 있습니다."
"전 지금까지 그냥 저 워 해머가 공성추처럼 거대해서 그렇게 불리는 줄 알았습니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겠지요. 아무튼 당시엔 러빌에서 용이 내려왔다고 굉장히 유명했습니다."
"용... 러빌의 용혈일족이라는 이들을 일컫는 건가요?"
"맞습니다. 선조가 용의 피를 이었다고 믿는 일족이죠. 주변 국가들은 쉬쉬하는 이야기지만... 실제로 러빌의 영웅들 중에서는 강철 같은 피부를 지닌 사람, 불 속을 거닐 수 있는 사람 등이 종종 나타나기에 진실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그리고 예카트리나는 그 특성으로 괴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였다. 이거 참 놀라움의 연속이로군. 그러고 보면 정령 감응 능력도 어느 정도 있다고 첫 만남 때 말했었지. 어쩌면 그것도 혈족의 능력 중 일부일지도 모르겠...
...응? 뭔가 이상한데?
"혹시 그때 소문이 퍼진 건 예카트리나 뿐이었습니까? 같이 다니는 마법사와 관련된 소문 같은 것 없이?"
"아, 별을 품은 마법사 렐리에를 말씀하시나보군요. 설마 그녀도 같이 다닙니까?"
"예... 뭐,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이번 의뢰는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만..."
"아! 정말 아쉽군요. 영웅이라 불리기 손색이 없는 이들을 볼 기회라는 게 흔한 게 아닌데..."
비스퀜테는 격하게 아쉬워했지만, 정작 나는 과거의 기억을 되새김질 하느라 제대로 맞장구조차 쳐줄 수 없었다.
분명 엔벨데의 저택을 털고 출소한 뒤 시장에서 렐리에를 만났던 날, 그녀는 시약 제조와 관련된 지식을 러빌에서 습득하고 예카트리나와 동행하게 되었다고 했었다. 그리고 허풍쟁이 기쉬에게 처음으로 들은 용혈일족에 대해 물었을 때... 그녀는 분명 풍문으로나 들어 본 수준의 이야기라는 식으로 대답했었다.
마치, 예카트리나와 전혀 연관이 없다는 것처럼.
"그래도 한 분이라도 오셨으니 천군만마가 따로 없습니다. 돌아가면 아버님께 해드릴 이야기가 많이 생길 것 같군요."
예의 바른 비스퀜테는 코앞에서 고소공포증이라는 내 말에 반박하기 위해 허둥거리던 예카트리나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건 전혀 본 적 없다는 듯 행동함으로써 다시 한번 내 감탄을 자아냈지만, 갑작스러운 정보에 머리가 복잡해져서 그런 내 반응은 오래 가지 못했다.
자세히는 몰라도 렐리에는 분명 예카트리나와 남다른 친분이 있다. 취했을 땐 카샤라는 애칭으로 부를 정도였으니까. 방금 비스퀜테에게 들었던 전장의 이야기를 모를 리도 없고.
숨긴 건가? 왜? 아직 친분이 없어서? 아니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만약 후자라면 용혈일족이라는 걸 숨겨야하는 이유는 또 뭐고?
"쓰읍...진짜 왕족이라도 되는 건가...?"
뭔가 좀 떨떠름했지만 고개를 한 번 휘젓는 것으로 머릿속 어딘가에 밀어 넣기로 했다. 나한테 뭐 피해를 준 것도 아니고, 뭔가 사정이 있는 거겠지. 그렇다고 해서 뭐에 쫓기듯이 지내는 것 같지도 않으니 안 좋게 엮일 일도 없을 것이다.
설령 뭔 일이 있다한들 몆 없는 유능한 동료를 등질 일도 없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뒤로는 별다른 일 없이 시간이 흘러 갔다. 꾸준하게 이어지는 모험가들을 맞이하며 틈틈이 비스퀜테와 현황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어느덧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그럼 이번에는 방치된, 혹은 마족들이 임의로 설치한 게이트가 원인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로군요."
"자칫 허황된 이야기로 들릴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제국에서 당해 본 바, 놈들은 자체적으로 게이트를 건설할 수 있는 인력을 운용하기도 했으니까요."
폐던전에서 처음으로 마족들의 게이트를 발견했던 이야기는 엄연히 비밀이었던 만큼 이 자리에서 말할 수 없었기에 제국의 예시를 들자 비스퀜테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의견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저 게이트가 마족들이 설치한 것이길 바라고 싶군요. 고대에 사용된 게이트라면 오히려 골치가 아플 것 같습니다."
"왜 그런지 알 수 있을까요?"
"아시다시피 지금은 퇴보한 마도학의 한계로 게이트 거리에 제한이 있는 편이지만, 찬란하게 빛나던 고대엔 그렇지 않았으니까요. 저 게이트가 오크들의 대초원에서 이어진 거라 생각해 보십시오. 위치에 따라 다르겠으나 만약 저 오크들이 대초원의 가장 큰 세력을 지닌 오크들이라면? 에가 경께서 발견한 오크들은 선봉대에 불과할 겁니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점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비스퀜테의 말에 나도 모르게 덩달아 심각해졌다. 솔직히 서부 왕국 너머 대초원이라는 곳에 대체 저 녹색 괴물들이 얼마나 많이 살고 있는지 전혀 모르지만 비스퀜테가 별거 아닌 일로 지레 걱정하는 타입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금방 심각한 표정을 지우며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것처럼 쾌활하게 말했다.
"아직 알 수 없는 일을 두고 경계하는 것은 옳을지언정 걱정하는 것은 문제라고 배웠습니다. 지금은 일단 아실리에 님께서 정찰을 마치고 돌아오시길 기다리는 게 맞는 선택이겠죠."
실로 현명한 놈이다. 그렇게 짧은 고민을 마친 우리는 저녁노을이 지기 시작한 하늘을 뒤로하며 날아온 마지막 비룡에서 내린 조종사가 오늘은 더 이상 모험가가 없을 거라는 통보를 한 뒤에야 자리를 벗어나 회관으로 향했다.
당장 오늘 도착한 모험가는 쉰 명 남짓. 적급만 서른에 청급이 스물이었으니 순식간에 전력이 보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모험가들은 늘고, 오크들은 잠잠한 하루라..."
그야말로 폭풍전야라 부르기 알맞은 날이었지만 다행인 건 다행인 거였다.
긍정적으로 생각함과 동시에 슬슬 아실리에가 돌아올 때도 됐다고 여기며 발걸음을 옮긴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저 멀찍이에서부터 아실리에가 귀신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확히는 내가 조금 뒤늦게 발견한 거였고 그녀는 이미 저 멀리서부터 나를 발견하고 먼저 손을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던 거 같았다. 처음엔 그 모습에 절로 미소가 나왔으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얼굴이 꽤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고 뭔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엘디! 오크가 늘어났어!"
세상 어딜 가나 좆같은 클리셰는 반드시 이뤄지는 법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