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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15화 (315/412)

좋지않은 소식에 황급히 칼 굴스와 시엘 씨를 불러 만신전에서 회의를 열었다. 그 갑작스러운 소집에 주변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것을 알 수 있었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아실리에가 들고 온 정보는 단순 무식한 오크들 만큼이나 간결했다. 오크들의 추가 병력. 하지만 정보의 단순함에 비해 상황은 심각했다.

"지난 정찰 때 오크 주술사들이 들어간 통로를 중점으로 확인했는데 갑자기 거기서 수십 마리의 오크들이 더 쏟아져 나왔어."

내부에 위치한 큰 동공에 숨어 있었을 가능성도 있으니 최대한 면밀히 살펴봤으나, 밖으로 나온 오크들이 마치 별세계에 온 것처럼 당황하고 주변을 살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믿기 힘드나... 게이트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겠군요."

현실 도피나 하는 무능한 이가 아니라서 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비스퀜테는 아실리에의 이야기에 적잖이 당황하면서도 제대로 상황을 인지했다. 비록 오크들이 게이트를 이용할 가능성을 염두하는 게 가장 합리적인 상황이라는 것부터 굉장히 모순적이지만 말이다.

"주술사들이 게이트를 만들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으니 고대에 제작된 게이트를 가동시킬 열쇠를 그들이 우연찮게 찾았다고 보는 게 그나마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믿고 싶지 않지만... 여기서 눈을 돌려봤자 죽을 가능성만 높아지지."

내 의견에 칼 굴스도 침음을 흘리며 동의했고, 결단을 내린 비스퀜테의 행동은 빨랐다.

현장에 있는 이들은 눈으로 보고 알아서 움직여도 보고를 받는 높으신 분들은 합당한 추론을 기반으로 작성된 보고서를 읽어야만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일지 말지 고민하는 법. 대뜸 '오크가 늘었슴다.'라고 보내봤자 제대로 된 반응조차 없을 거라 여긴 비스퀜테는 적어도 이 자리의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가설이 세워지자마자 바로 문서를 작성해 파발마를 보낸 것이다.

"오크들이 그 뒤로 계속 쏟아져 나오지는 않았어. 잔뜩 지친 주술사들이 뒤늦게 나온 걸 보면 게이트를 발동시키는 데에도, 그렇게 해서 인원을 이동시키는 데에도 제한이 있는 건 확실해."

"그럼에도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닐 수 있다는 게 참 위협적으로 다가오는군."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알 수 없다. 눈을 보고 당황하는 모습만 놓고 보면 비스퀜테가 했던 추측대로 대초원에서 날아온 놈들일 수 있다.

미친 씨발 대초원이라니? 여기서 말을 타고 밤낮을 달려가도 몇 개월은 족히 걸릴 거리인데 그 거리를 뚫는 게이트가 있다는 게 소름 끼쳤다. 마족들의 게이트도 그 정도 이동은 불가능해서 중간 지점을 만들어 운용하는데 대체 고대엔 얼마나 마법이 발달했었던 거고 왜 퇴보한 걸까.

무럭무럭 솟아나는 의문을 오늘도 밀어넣으며 회의에 집중했다. 언젠가는 알아볼 날이 올 지 몰라도 오늘은 아니었다.

"오크는 전쟁 전에 반드시 주술 의식을 치른다고 알고 있습니다. 낯선 환경에 제대로 적응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영양 상태도 좋지 않을 놈들이 다짜고짜 추가 병력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건... 최소한 그 의식은 이미 끝냈다고 보는 게 맞겠죠."

"당장 출정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는 말이군요."

"아뇨, 이미 출정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크는 전형적인 약강강약의 본능을 따르는 몬스터다. 그리고 이 마을에 습격을 시도한 그 순간부터 이곳은 놈들에게 있어 자신들보다 약한 곳이다. 추가 병력은 어디까지나 더 큰 전쟁을 위한 사전 준비인 게 분명했다.

단순한 행동 원리를 가진 놈들인 덕에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아실리에가 서둘러 왔으니 여유가 있다고는 하나, 그래 봤자 반나절입니다. 당장 내일 오후에 오크들이 들이닥쳐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죠."

"목책 건설도 제대로 끝마치지 못했는데..."

시엘이 참담한 심정으로 중얼거렸지만 마냥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것도 아니라서 뭐라 위로할 방법이 없었다.

진짜 최악은 놈들이 제 성질머리를 못 이기고 미친 듯이 달려올 경우거든. 힘이야 좀 빠지겠지만 체력과 근력 빼면 남는 게 얼마 없는 놈들이라서 적급 미만의 모험가들에게는 충분히 위협적이다.

"시엘 씨의 말대로 입니다. 이대로는 마을만 피해를 입을 게 뻔하니, 저희는 놈들이 마을에 도착하기 전에 선수를 쳐야 합니다. 안 그러면 제대로 된 성과를 얻지 못할 겁니다."

"...가능합니까?"

비스퀜테의 질문이 의미하는바는 명확했다. 이 인원으로 200마리가 넘는 오크들의 상대가 가능한가. 3배가 넘는 적들이니 지극히 타당한 의문이었으나, 상대는 조금 힘이 강할 뿐인 몬스터다.

"망치와 모루 전술. 그걸로 조금 억지를 부리면 불가능하진 않다고 봅니다."

"지금 있는 병력을 나누자는 겁니까? 방어 거점을 완공한 상태도 아닌데 겨우 70여명의 전투 병력을 나눈다는 건..."

지극히 현실적이고 타당한 반문을 입에 담는 비스퀜테의 말을 손을 들어 끊으며 나는 확신을 담아 대답했다.

내가 말하고도 미친 짓이자 헛소리 같은 계획이었지만 당장 이거 말고 안전하게 버틸 방법이 없었다. 마을을 포기하지 않고 피해를 줄이려면 어이없게도 이게 최선이었다.

그 결과 아실리에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으며 다른 이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그들은 내 의견을 반려하려고 했지만 나는 계획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의 의견도 들어봐야 한다고 주장했고, 마지못해 수긍한 비스퀜테가 사람을 시켜 불러 온 인물에게 내 정신 나간 계획을 설명했다.

더할 나위 없이 진중하고 침착한 태도로 설명을 다 들은 핵심 인물은 두 눈을 빛내며 내게 의견을 물었다.

"내가 망치하면 안 돼? 무기도 망치잖아."

마치 아무런 위협도 없다는 듯 너스레를 떠는 예카트리나의 기대 가득한 반응에 용병인 칼 굴스마저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모루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끄응, 매번 느끼는 거지만 재밌는 건 맨날 엘드미아가 다 하는 거 같단 말이지."

내 계획을 재밌는 일로 치부하며 팔짱을 끼고 웃어 보이는 예카트리나를 보며 적잖이 놀란 비스퀜테와 칼 굴스가 미처 말도 못 꺼내는 사이 어이를 상실한 시엘이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재, 재미라고 하셨습니까? 이 무모한 계획이?"

"응? 안 무모한데? 오크잖아. 충분히 가능성있어. 안 죽는다면 말이지."

이를 드러내며 자신감을 내비치는 예카트리나의 모습은 참으로 듬직하기 그지없었다.

그럼에도 세 번은 더 거절 의사를 표하는 비스퀜테를 가까스로 설득시킨 우리는 불침번을 전부 거주민과 건축 인부로 돌리고 전투 인원들에게 최대한 휴식을 취하라고 전달했다. 다행히 그 말을 듣고 기뻐하는 머저리들은 없었고, 마을 전체가 잔뜩 긴장한 상태로 불안한 밤을 맞이했다.

그리고 구름 한점없이 맑은 아침을 맞이한 다음날.

"오, 오크다! 오크가 나타났다!"

마을의 경종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외침들이 작전의 시작을 알렸다.

"목가적인 살육의 날이 시작되는군."

몸을 풀고 안장을 올리며 중얼거린 내 말을 들은 아실리에가 준비를 마치고 말에 올라타며 깊은 한숨과 함께 신신당부했다.

"하아... 진짜 조심해야 한다?"

"너무 걱정하지 마 누나. 나 엔벨데 저택에서 기사들도 도륙 낸 사람이야."

비록 몸 상태가 만전이 아닌 탓에 바늘을 쓰는 건 무리가 있어도, 단순히 마력을 운용하는 것만 놓고 본다면 오히려 그때보다 훨씬 효율이 올라간 상태다. 상대가 인간이었으면 몰라도 오크인 이상 이번 계획에 차질은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차질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내가 중간에 전투 불능이 되거나 죽는 걸 이야기하는 거지, 이 전투의 완벽한 승리를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누나가 걱정이지. 혼자 척후 역할을 다 해야 하잖아."

"라이카랑 같이 가잖니."

[라이카! 아실리에 지켜!]

자신만만하게 아실리에가 타고 있는 말 옆에서 꼬리를 흔드는 저 녀석은 어디까지나 보조 전투 요원으로 붙인 거라서 척후를 혼자 해야 한다는 건 변함없었지만, 내가 그녀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은 것처럼 아실리에도 같은 마음에서 하는 말이었기에 그냥 순순히 납득하고 넘어가야 했다.

그녀도 참고 있는데 내가 굳이 더 말해봤자 좋을 게 없다. 난 웃으며 라이카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래, 아실리에 잘 지켜야 한다."

[응!]

단순 무식한 오크를 상대하기 위해 세운 계획은 단순했다. 예카트리나를 필두로한 마을의 전투 병력이 모루가 되고, 라이카와 아실리에가 중간 지점에서 적들의 병력 현황을 파악하기 위한 척후가 된다.

그리고 내가 파이어 펀치가... 아니, 망치가 된다.

"그럼 가 볼까."

전적으로 오크들의 단순 무식함을 신뢰하여 세운 계획이었다. 놈들이 대초원의 오크이건 어디 던전 속의 오크이건 간에 그 본성은 똑같다.

이만한 병력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큰 부족이라면 자연스럽게 강자와의 싸움과 지들 나름대로의 명예에 집착해온 시간도 길었다는 이야기다. 놈들의 전투 본능은 그렇게 돼먹은 구조니까.

그렇기에 충분한 실력을 지닌 사람 혼자 오크 부대의 후방에서 어그로를 끈다는 건 충분히 가능성 있는 계획이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오크들이라면 환장할 만한 크고 아름다운 무기를 들고 있는 비슷한 실력자가 모루의 위치에 배치되어 한 번 더 어그로를 끈다면 효과는 더욱 좋아진다.

절대다수의 오크들이 두 사람에게 집중되며 다른 이들이 오크들의 뒤통수를 후려치기 좋은 구도가 연출될 것이다.

"엘드미아! 오늘 오크 몇 마리 잡나 내기할까!"

황급히 움직이는 인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예카트리나가 말을 타고 달려가는 나를 보며 외쳤다. 불안한 기색을 내비치며 달려가던 모험가들은 그녀의 반응에 질린 표정을 지어 보였고, 나는 믿을 수 있는 동료의 중요성을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다.

"수도로 귀환해서 식사 비용 내기!"

"하하하! 좋은 승부가 되겠는데!"

세상 미친연놈들을 다보겠다는 듯 바쁘게 움직이는 시선들은 가볍게 무시했다. 어차피 이번 전투가 끝나고나면 벌벌 떨며 제대로 눈도 못 마주치거나 승리에 취해 미쳐 날뛸테니까.

"안전! 또 안전이야 엘디!"

"누나도!"

오크가 오고 있는 것으로 예상되는 방향을 크게 우회해서 빠지며 아실리에하고도 떨어진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뭇가지들 사이로 보이는 오크 부대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놈들은 숲속의 나무들 때문인지 알고 있던 숫자보다 훨씬 더 많아 보였다.

신기한 감각이었다. 200여 마리의 근육 돼지들은 결코 만만하게 볼 게 아님에도 별다른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실상 전투에 들어가면 말을 버려야 하기에 저 돼지들 사이에 파고들어 다 죽이기 전까지는 못 나온다는 걸 아는데도 그랬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건지, 여유인 것인지 알 수 없는 감각 속에서 오크들의 최후미를 노리기 위해 말을 몰았더니 저 멀리서 예카트리나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게 누구야! 겁이 너무 많아서 이미 죽은 선조들에게까지 욕만 먹는 돼지들이잖아!"

정말 별거 아닌 도발이었으나 효과는 굉장했다. 숲이 떠나갈 기세로 분노한 오크들이 사방팔방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다행인 것은 예카트리나의 목소리가 그런 소음을 뚫고 들릴 정도로 충분히 크다는 점이었다.

"이름도 없는 돼지 새끼들아! 내가 바로 성문 파괴자, 공성추 예카트리나다! 겁쟁이는 도망가고 전사만 덤벼라!"

예정된 도발, 계획된 신호. 나름 침착함을 유지하며 움직이던 오크들의 걸음이 거의 달음박질 수준으로 빨라지며 내 눈에도 부대의 끝이 들어왔다.

"꾸이이이이!!! 이익? 인간?"

체력이 가장 후달렸던 건지 부대의 최후미에서 분노의 멱따는 소리를 내며 헥헥 거리던 오크 한 놈이 나를 발견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새끼 이거, 소리가 난 방향이랑 내가 있는 방향이 달라서 인지부조화 왔네.

"빡대가리 새끼."

그대로 말을 몰아 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오크 1스택이 적립 되었다. 다행히 녀석은 죽어 가는 와중에 기겁하며 돼지 멱따는 소리를 외치는 것을 잊지 않았고, 내가 말의 엉덩이를 두드려 전장에서 도망치게 만드는 동안 다른 오크들의 이목이 내게 집중되도록 만드는 훌륭한 경보 역할을 해주었다.

"꾸익? 이, 인간?"

"꾸이익? 어째서 우리 뒤에?"

난 뭐라고 외쳐야 어그로를 끌 수 있을까.

아쉽게도 괴물 초장이같은, 오크들에게 알려진 악명같은 걸 보유하지 않아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죽였던 오크가 이름을 외쳤지. 그래도 나름 전우애가 있는 놈들이니 그거면 어그로가 끌리지 않을까?

"내가 카쿨라 바솨를 죽였다."

혹시나 싶어 던져 본 미끼에 조금은 반응이 있었지만 기대했던 것만큼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래서 뭐 어쩌라는 식의 반응에 조금 뻘쭘해지고 말았다.

"...겁쟁이 오크들 중에 바솨의 복수를 할 전사는 없나보군."

"꾸이이익!! 죽인다!!"

"꾸익! 오크 중에 겁쟁이는 없다!! 바솨를 위하여!!"

"바솨아아아악!!"

옘병, 이 빡대가리들은 지들 기분이 나빠져야만 전우애가 발동되는구나.

참으로 한결같은 놈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곧 착해질 오크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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