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드미아가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오크들이 추풍낙엽처럼 휩쓸려 나갔다!
같은 상황 좋은 일은 없었다. 엔벨데의 저택을 휘저을 때와 달리 검에 실을 마력도 부족했고, 오크들은 지랄 같은 근육량과 질량으로 승부를 보는 것들이었기에 밀치거나 날리려면 쓸데없이 많은 힘을 쓰게 된다. 그런다고 죽을 놈들도 아니고 말이지.
게다가 머릿수도 많지. 이럴 때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기술과 지식 뿐이다.
"꾸이잌!! 왜!! 안 맞!!"
오크는 원래 오러없는 모험가도 잡을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니 마력을 통한 강화를 굳이 육체에 무한정으로 쏟을 이유는 없다. 필요한 것은 날카로운 감각과 다수와의 전투를 이어 나가며 버틸 수 있을 정도의 지구력 뿐. 나머지는 수년간 단련하며 몸뚱이에 아로새긴 기술에 의지한다.
그리고 그간의 노력은 결코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화려하지도, 멋있지도 않을지언정 나를 노리고 달려든 오크들은 확실하게 일격만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내 정수리를 쪼개기 위해 정직하게 휘둘러지는 도끼는 굳이 막거나 받아 낼 필요조차 없다. 많게는 한 발자국, 적게는 상체를 움직이는 동작만으로 피하며 공격한 오크의 목을 치는 간단한 반격만으로도 순식간에 다섯 마리가 착해지자 오크들의 혼란이 가중되었다.
"꾸익! 이 잉간 이상하다! 안 맞는다!"
"꾸이익! 주술사다! 잉간이 주술을 부린다!"
무식하게 휘두르는 게 전부인 도끼는 아카데미 생도들조차 비교 대상으로 놓기 민망한 수준이다. 애초에 양민학살을 하느냐, 당하느냐의 기로에서 살아왔을 오크들에게 그 이상의 기술을 바라는 건 무리가 있을 것이다. 부족 내에서 어느 정도 명성과 지위를 지닌 것들이 아닌 이상에야 힘 좀 쎈 머저리들에 불과하다.
어찌 보면 짐승보다도 상대하기 편했다. 앞뒤 안 가리고 반드시 도끼를 휘두르는다는 공통점이 있으니까. 간을 보지도 않고, 주춤거리지도 않으며 우직하게 달려들어 도끼부터 휘두르는 오크보다는 늑대 두 마리를 동시에 상대하는 게 더 힘들지도 모르겠다.
그저 피하고 급소를 노리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착한 오크가 탄생하기를 십여 차례, 슬슬 당황하기 시작한 곧 착해질 오크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꾸이이익! 강하다! 강한 전사가 나타나따!!"
그 외침에 아직까지도 전열에만 관심을 가지던 일부 오크들이 눈알을 부라리며 내게 집중한다.
몸은 이제야 예열을 마치고 한창 날아다닐 것만 같은 상황. 잔뜩 긴장한 오크들과 달리 움직이는데에 아무런 지장도 없었기에,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검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야이 돌대가리 새끼들아.”
“꾸익?”
“엘드미아 에가가 나타났다고 외쳐.”
일단은 다 몰살시킬 예정이긴 한데, 운 좋게 살아남은 오크들의 공포로 남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
“나능 바쿤스 바락이다!”
장렬하게 외치며 도끼를 휘두르는 오크를 보며 예카트리나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지 못했다. 오크들이 약해서도, 정말 엘드미아가 예상했던 대로 대부분의 오크들이 자신과 싸우기 위해 뒤통수에 칼이 박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심취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냥 저 오크들이 자기 이름을 외치는 모습에서 자꾸 엘드미아가 떠올라 영 매치가 안 된 탓이었다.
정면으로 달려드는 놈들은 어김없이 이름을 외치는데, 그게 오크들의 관습과도 같은 거라는 걸 눈치챘음에도 자꾸만 엘드미아를 흉내 내는 거 같아 웃겼다. 우습게 생긴 오크일수록 힘이 빠지게 만드는 치명적인 정신 공격이었지만 그 상태에서 휘둘러도 그녀의 거병은 위협적이었다.
아무런 기교 없이 그저 장작을 패듯 내려찍은 망치질 한 번에 오크의 머리가 몸통까지 파고드는 광경은 오크에겐 공포감을 안겨 주고 모험가와 용병들에게는 감탄을 자아냈다. 하지만 아무리 아군이라 하더라도 그녀의 초월적인 힘에는 위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꾸이익! 나능꿰에에엑!”
예카트리나의 워 해머는 정확히 오크의 머리를 몸통에 때려 박자마자 튕기듯 돌아와 다른 오크의 관자놀이를 날려 버렸다. 예외는 없다. 그녀가 워 해머를 휘두를 때마다 오크의 머리가 날아가거나 몸에 박히거나 어딘가가 박살 난다.
거대한 쇳덩이를 마치 검처럼 휘두르는 모습은 오러를 깨우친 이들조차 중력에 대한 불신과 위화감을 느낄 정도였다.
“러, 러빌의 용이라는 말이 진짜였어.”
귓가에 영 거슬리는 칭송이 들려왔지만 예카트리나는 최대한 개의치 않으려고 노력했다. 서부 왕국 지대에서야 저런 말이 퍼지는 걸 걱정했지만 이 먼 이티스엘에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설령 고향에서 자신의 소식을 접하더라도 여기까지 사람을 보내지는 않을 것이니까.
“그 망치! 내가 가저가게따!”
다른 오크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이는 오크가 제 동료들을 밀치며 탐욕스럽게 달려들었다. 워 해머를 한 바퀴 돌려 어깨에 걸쳐맸던 예카트리나는 작디작은 오크의 동그란 눈에 일렁이는 강렬한 탐욕을 보며 웃었다.
재밌는 놈이네.
“그래라.”
안 그래도 유쾌함의 연속인데 더 웃긴 놈이 나와서 기분 삼아 워 해머를 던져 줬다. 집어던지는 것도 아니고, 정말 가볍게 물건을 건네주듯이 자신의 유일한 무기를 던져 주는 그 모습에 모험가들 뿐만 아니라 오크들까지 인지부조화를 일으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직 워 해머에 눈이 먼 오크만이 기분 좋게 웃으며 이를 받기 위해 제 도끼도 내던진 채 달려들 뿐이었다.
“꾸이익! 멍청한 잉가아아아안?!”
그리고 워 해머를 받자마자 그대로 멈춰버렸다.
정확하게는 워 해머의 무게를 버티기 위해 돌진을 멈추고 허리까지 뒤로 젖혀가며 이를 악물었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활처럼 허리가 휜 채 버티는 오크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꾸익! 꾸이이익?!”
그 모습에 인간과 몬스터 구분 없이 모두가 경악하는 사이 홀로 이 상황을 예견한 것처럼 예카트리나가 멈춰있는 오크를 향해 걸어갔다.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 가벼운 걸음걸이였으나 다른 오크들은 그 모습에서 공포를 느꼈고, 망치를 받아 든 오크 역시 상황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곤 어떻게든 쥐고 있는 망치를 휘둘러 보려고 발악했다.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오히려 버티는 것조차 힘들어서 점점 워 해머가 몸을 짓누르는 게 느껴졌다.
“좀 무겁지?”
“꾸이이익!”
비명 같은 대답에 예카트리나가 크게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으나 오크에겐 워 해머를 놓는다는 선택지조차 없었다. 그러기엔 허리가 너무 뒤로 젖혀져 있었다. 손을 놓아봤자 그대로 깔릴 게 분명했다.
워 해머는 마치 머리와 무게를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자루마저 무거웠기에.
예카트리나는 그런 오크의 얼굴을 한 손으로 쥐고는 그대로 나뭇가지 꺾듯이 밀쳐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그것만으로도 온 힘을 다해 버티고 있던 오크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 것처럼 머리부터 나자빠지며 바닥에 뒤통수를 박았다. 너무 힘이 거세서 상체가 틀어박히며 다리가 예카트리나의 허리까지 뜰 정도였다.
그녀가 온전히 팔과 상체의 힘만으로 그런 광경을 연출했다는 것을 믿지 못해 제 눈을 비비는 이마저 나왔으나, 정작 당사자는 태연하게 쓰러진 오크의 머리 쪽으로 걸어가 다리를 들어 올렸다.
“그래서 무기는 수준에 맞는 걸 써야 하는 법이지. 너희들에겐 그 빈약한 도끼가 딱이잖아?”
“꾸이이이익!!”
-콰직!
어중간하게 휘두른 검조차 막아 내는 오크의 두개골이 철판 덧댄 전투화에 짓밟혀 박살 나는 모습에 일부 오크들이 벌벌 떨며 도끼마저 놓쳤다. 하지만 예카트리나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틀어박힌 다리를 뽑더니 그대로 워 해머의 자루를 걷어차 떨어진 거병을 바로 세웠다. 그녀의 손이 자루를 쥐고 움직이자, 워 해머는 마치 빨랫대라도 되는 것처럼 가볍게 움직여 다시 그녀의 어깨 위에 자리 잡았다.
“뭐 해? 겁쟁이들. 안 싸워?”
그 순간 오크들은 정말 겁쟁이가 되어 버렸다.
그 누구도 함부로 예카트리나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오히려 일부는 마치 그녀에게서만 멀어지면 된다는 것처럼 다른 모험가들에게 달려들어 싸움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 예상치 못한 반응에 지금까지 태연했던 예카트리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어라? 이거 너무 겁을 줘버린 건가? 좋지 않은데?
“꾸, 꾸익. 도, 도망...”
기어이 참지 못한 일부 오크가 도주를 선택하려는 순간, 그들의 뒤편에서 이해할 수 없는 외침이 들려왔다.
“에, 엘두미아 에가가 나타나따! 엘두미꾸이이익!”
“꾸익? 엘두?”
오크들은 생판 처음 듣는 무언가가 나타났다는 동족의 절박한 외침에, 인간들은 대체 왜 저 돼지들이 엘드미아의 이름을 외치는지에 대한 의문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저 뒤편에서 말 그대로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앞으로 도망쳐 나온’ 오크 하나가 외쳤다.
“뭔가 잘못됐다! 전쟁신이다! 우린 전쟁신의 분노를 산 게 분명하다! 엘두미아 에가는 전쟁신이다!”
그 외침은 오크어였기에 인간들은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예카트리나와 대치하고 있던 오크들은 당연히 알아들었고, 저도 모르게 벙찐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꾸, 꾸익? 저, 전쟁신 같은 인간은 여기 있는데?”
“꾸익?”
앞으로 도망쳤던 얼빠진 오크는 동족과 대치하고 있던 예카트리나를 보고, 그 앞에 널려 있는 동족의 시체를 보았다.
그리고 생존 본능에 입각한 일생일대의 눈치를 굴린 끝에 절망적인 결론을 도출하고는 비명을 질렀다.
“전쟁여신과 전쟁신이 분노했다!! 이 저주받은 하얀 흙의 땅에 우리가 와서 인간의 모습으로 분노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인간들이 알아들었다면 박장대소를 할 수준의 비약이었으나, 그들의 입장에서는 겁먹은 오크가 사실 주술사가 아닌가 의심이 될만큼 너무나도 천재적이고 타당한 결론이었다.
결국 그 결론에 공감대를 형성한 일대의 오크들은 전염되는 절망 속에서 한마음 한뜻으로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발광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