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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18화 (318/412)

대초원의 풀 내음이 나는 듯한 착각 속에서 오크들의 지도자이자 족장인 카쿨라는 천천히 눈을 떴다.

성대하게 피워 놓은 화톳불 앞에 앉아 밤을 지샜으나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또렷했다. 남아 있는 오크들이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조금도 거슬리지 않았다. 카쿨라의 긴 삶 속에서 이런 경우는 항상 똑같았다.

위험이 찾아오고 있다는 징조.

짙어지는 죽음의 냄새를 맡은 본능과 수많은 동족의 죽음을 눈치챈 영혼이 카쿨라에게 경고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이럴 때는 언제나 빠른 결단을 내려야 했고, 카쿨라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은 그 결단이 항상 틀리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카바. 주술사들을 불러라."

결단을 내릴 땐 항상 확신에 찬 카쿨라였으나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이미 예정된 명령을 전달하면서도 내면에서는 불안과 주저가 꿈틀거렸다.

그 자신도 주술사이기에 부족의 주술사들의 예언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지만 이제는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와 달리 강인한 카바는 족장의 명령에 일말의 주저도 보이지 않았다. 한데 모여 잠을 자던 주술사들은 제 운명을 알면서도 기뻐했다. 그들은 대족장의 앞날에 가장 큰 길을 여는 영광을 누리고 하늘의 대초원에 갈 수 있음을 자랑스러워했으며, 평소 주술사들을 곱게 보지 않던 오크들조차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들을 존경했다.

불명예스럽게 늙어 죽을 줄 알았던 삶에 드디어 기회가 왔다며 좋아하는 그 모습은 참으로 오크스러웠다.

카쿨라가 거대한 몸을 일으켜 세우며 동굴 속 고대의 신비로 향하자 주술사들과 일부 오크들이 뒤따랐다. 동굴은 깊지 않았기에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죽은 마족의 시체들을 넘어 고대의 신비 앞에 선 카쿨라의 뒤에서 주술사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대족장 카쿨라. 하늘의 대초원에서 선조들을 모시며 당신의 용맹함을 노래하겠소."

카쿨라는 등을 보인 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마쳤다. 그가 두 팔을 들어 올리자 고대의 신비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카쿨라의 입에서 말도 웅얼거림도 아닌 무언가가 흘러나오자 주술이 발동되고 그 뒤에 서 있던 주술사들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픽픽 쓰러졌다.

그렇게 죽은 주술사들의 혼을 기폭제 삼아 부족에 속한 이들의 영혼이 요동쳤다. 동시에 카쿨라의 머리가 짧지만 격하게 흔들렸다.

"습격은 실패했다."

알 수 있었다. 저 멀리서 날아오는 전사들의 영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영혼들은 카쿨라에게 날아오는 그 순간까지 공포에 떨고 있었다. 자신들의 죽음을 뒤로하고 도망치는 일족에게 아무런 불만도 가지지 않고 그저 두려워했다.

"전사들이 말하고 있다. 하얀 흙의 땅에 발을 디딘 것에 분노한 전쟁신과 전쟁여신이 인간의 모습을 빌어 자신들을 벌했다고."

"말도 안 되는!"

카바를 비롯한 오크들의 분노는 지당했으나 카쿨라는 영혼들의 두려움과 감정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기에 그들처럼 반응하지 못했다. 이미 죽어 버린 터라 증폭된 감정으로 인해 왜곡된 기억이라 한들, 수십의 동족들이 보여주는 환영의 존재들은 실로 전쟁신이라 불릴만 했다.

"바람처럼 흐르며 목을 베는 엘두미아 에가와 강철을 휘두르는 에카드리나를 경계하라. 고대의 신비 앞에 죽음이 퍼진다."

죽은 이들의 경고이자 예지.

카쿨라의 의지를 떠나 수많은 영혼들과 교감하고 힘을 빌리는 동안 피할 수 없는 현상 속에서 내뱉어진 문장은 정작 카쿨라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그의 정신은 온전히 영혼들의 힘을 통해 고대의 신비를 온전히 사용하는데 쏠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마치 성대가 두 개라도 되는 것처럼 카쿨라의 입에서는 계속 주문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단어들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위대한 대초원의 땅을 밟게 되리라..."

그 웅얼거림의 끝을 제대로 완성된 문장으로 마무리 짓자, 닫혀 있던 신비에서 푸른 빛이 퍼져나옴과 동시에 주술이 완성되었고 오크들의 눈에 그리움이 번졌다.

아직도 푸르른 초원, 하얀 흙의 땅과는 비교할 수 없는 포근한 바람. 그리고 신비를 바라보는 수백의 동족들. 주술을 사용하는 동안 흰자위를 부릅 뜨고 있던 카쿨라가 영혼과의 연결을 끊고 정상으로 돌아와 신비 너머를 바라보자 수백의 오크들이 그를 앞에 두고 무릎 꿇었고, 카쿨라는 신비 사이에 걸터 선 채 그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이들아, 전쟁이다. 도끼를 들고 늑대에 올라 타라."

그러자 가장 앞에서 홀로 무릎 꿇고 있던 오크가 되물었다.

"족장이시여. 몇 명의 전사를 원하십니까."

그 질문에 카쿨라는 고개를 들어 신비의 경계를 바라보았다. 많은 영혼들이 이 문을 열기 위해 소모되었다. 못해도 반나절은 계속 열려 있을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정도면 전사들이 마음껏 이 땅으로 넘어오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신비가 닫히는 그 순간까지 최대한 많은 전사를."

카쿨라의 말에 무릎 꿇고 있던 오크들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일제히 일어나며 함성을 질렀다.

만찬은 충분히 성대했으나, 전투가 아예 끝난 게 아닌 탓에 술통을 죄다 뜯지 못한 것에 한맺힌 모험가들을 뒤로 하며 다음 날이 밝아왔다.

사실 별로 한 것도 없는 주제에 세상 혼자 다 싸운 것처럼 구는 놈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하니 먹던 음식까지 빼앗아 버리고 싶어졌지만 어떻게든 참을 수 있었다. 도망치지 않고 열심히 한 것만으로도 칭찬하는 게 맞는 상황이었으니까. 그 정도 허세는 눈 감아줘야 했다.

거주민들의 배려로 인해 근무도 없는 터라 간만에 푹 자고 일어났더니 시간은 어느 새 아침을 넘어 점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의 피로라기 보다, 열심히 먹고 예카트리나랑 떠들다가 늦게 잠든 탓이 컸다.

"누나, 나 잠깐 만신전 좀 다녀올게."

"으우응어어..."

그 수다에는 아실리에 역시 포함되어 있었기에 아침이 약한 그녀는 제대로 눈도 뜨지 못했다. 그래도 힘겹게 손을 흔들며 배웅 비슷한 것을 해주는 아실리에를 두고 라이카와 함께 밖에 나오니 여전히 맑은 하늘이 우리를 반겨 줬다.

"수도에서 연락이 왔으려나."

아침 일찍 일어났다면 택배 기다리는 것처럼 하염없이 기다렸을 텐데 늦잠을 자서 시간이 스킵되고나니 뭔가 묘하게 이득을 본 기분이다. 아무런 확신도 없는데 이미 연락이 왔을 것만 같은 기대감 속에서 만신전으로 향하니 어김없이 근무 중인 이콥이 인사를 건넸다.

"이콥 씨? 하루 종일 경계를 서고 계시는 건 아니죠?"

"하하하, 우연입니다 우연. 관리자 님을 만나러 오셨나요? 지금은 기사님과 대화 중이신데."

"잘 됐네요. 이번엔 비스퀜테 경을 보려고 온 거였거든요."

이거 봐. 조짐이 좋다니까? 이콥을 뒤로 하고 만신전 안에 들어서자 웃는 얼굴로 대화를 하던 비스퀜테와 시엘이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아! 잘 오셨습니다. 안 그래도 이 좋은 소식을 빨리 전해드리고 싶었는데 말이죠. 방금 막 왕실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왕실이요?"

"네. 역시 게이트가 의심된다는 내용을 적는 게 정답이었던 모양입니다."

아카데미에서의 사건도 있고 해서 이래저래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병력을 움직이고 있는 왕실에서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기로 한 건 비스퀜테의 말대로 게이트 때문일 거다. 그래도 용케 그걸 믿기로 했다고 감탄하려 했으나, 아직 놀랄 일이 끝난 게 아니었다.

"무려 비룡 기사를 넷이나 보내준다고 합니다. 과잉 전력이지 않나 싶지만 아무래도 게이트를 조사하기 위한 조사대의 목적도 가지고 있는 거겠죠. 이제 이곳은 안전합니다."

"...세상에."

그야말로 세상에다. 사실 상 왕실 친위대로 쓰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비룡 기사들을 넷이나 보낸다고?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쓰는 정도가 아니라 개미를 밟기 위해 코끼리 발을 끌고 오는 격에 가까웠다.

인간들끼리의 전쟁이면 몰라도 원거리 견제 수단이 단 하나도 없는 오크들은 수백 마리가 몰려 온다 한들 비룡 기사를 이길 수 없을 테니까.

"적혀 있기로는 길 안내를 위해 비룡 조종사도 따로 한 명 보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아래 내용은 아무래도 에가 경이 직접 보셔야 할 거 같더군요."

"제가요?"

"네. 메시나 왕녀님께서 직접 전하고자 하시는 내용입니다."

갑자기 거기서 찰거머리 왕녀가 왜 나와?

걘 진짜 어디 안 끼는 곳이 없는 건가? 국왕한테 자식만 넷인가 있는 거로 아는데 왜째서 걔만 자꾸 마주치지?

영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까지 잡소리를 할 사람은 아닐 거라 믿으며 비스퀜테로부터 받아든 서신의 하단에는 확실히 나를 향한 추신이 적혀 있었다.

[귀공과 친분이 있는 이를 섭외했으니 움직임에 불편은 없을 것입니다. 차후 일이 정리된다면 이번 일 뿐만 아니라 앞서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보상도 같이 정리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뭔 소리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비룡 기사는 없는데? 게다가 결국 마지막은 '대화 좀 합시다.' 로 끝났으니 과연 찰거머리 왕녀였다.

물론 아카데미에서 악마년의 목을 딴 건 좀 사건이 크다보니 이번에는 나도 빌미를 줬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지만...

"본의 아니게 조금 내용을 읽어버렸습니다만, 비룡 기사와도 친분이 있으셨던 겁니까?"

"아뇨. 지인 중에 그런 사람은 없었... 아. 어쩌면 길 안내를 위한 비룡 조종사를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딱 한 명 지인이 있거든요."

명색에 왕녀니까 기에스와 관련된 정보 정도는 알고 있을테니 이 추측이 맞는 거 같다. 한동안 얼굴 볼 일이 없었는데 정말 겨울은 만남의 계절이라도 되는 것일까.

"어쨌든 좋은 이야기라서 정말 다행입니다. 준비를 위해 기수가 한참 먼저 출발했었다고 하니, 어쩌면 곧 비룡 기사님들이 도착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렇다면 혹여라도 지체되는 일이 없도록 또 나가서 기다리고 있어야겠군요."

찬 바람 맞으면서 사람 기다리는 것도 참 못할 짓인데 비스퀜테는 되려 유쾌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는 조금도 유쾌하지 않고 내키지도 않았지만 따라서 자리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 편지의 내용대로라면 제가 비룡 조종사와 함께 길 안내를 해야할 거 같으니, 같이 가서 기다리는 게 낫겠습니다."

"그것도 그렇군요. 덕분에 도착이 지연되더라도 지루할 일은 없을 거 같습니다."

철저하게 덜 귀찮기 위해서였을 뿐인데 그걸 나름 배려라고 여긴 것인지, 비스퀜테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화답했다.

그래, 비룡 기사 넷이면 이제 정말 앉아서 피크닉 즐기는 일만 남았지.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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