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룡 기사. 이세계의 공군으로서 제공권을 책임질 수 있는 몇 안 되는 병종.
하지만 마나와 오러를 동시에 연마한다는 극악의 조건으로 인해 그다지 각광받지 못 하는 자들. 덕분에 나 역시 지금까지 살면서 비룡 기사를 직접 볼 기회가 없었다. 델트는 비룡 기사라기보다 그냥 비룡을 탈 줄 아는 것에 가까웠으니 논외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기대하게 만드는 것은 왕실에서 비룡 기사라 부르는 이들은 엄연히 일류로 실력을 인정받은 이들이라는 점이었다. 비록 그 기준이 전쟁에 국한된 것이다 보니 개인의 무력 외에 다른 전술적인 요인이 섞여 있겠으나,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결코 아닐 것이다.
"혹시 비스퀜테 경은 비룡 기사를 직접 본 적 있으십니까?"
"왕국 행사 때 멀리서 뵌 적은 있으나 실제로 싸우는 모습을 보는 건 저도 이번이 처음입니다."
비스퀜테 역시 비룡 기사가 온다는 사실에 적잖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귀족답지 않게 뛰어난 이야기꾼의 기질이 있는 그는 모닥불을 쬐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비룡 기사에 관한 일화들을 이야기해주며 아이처럼 들뜬 상태였다. 하긴, 어찌 보면 왕실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섬기는 이들이니 비스퀜테처럼 제대로 정신이 박힌 귀족이라면 그들을 동경하게 되는 것도 충분히 납득이 간다.
"그러고 보니 메시나 왕녀님의 측근 중에도 비룡 기사가 한 분 배정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매우 실력이 뛰어나 차기 단장의 재목으로 촉망받는 분이라고 하더군요."
허어, 찰거머리에 눈치가 없는 것 치고는 상당한 권력을 쥐고 있나 보군.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에 내심 감탄하고 있었더니 비스퀜테가 기억을 더듬으며 조금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성함이... 아, 헤이리 경이었습니다. 원래 동부 히비쉬 남작 가문의 사람이었으나 비룡 기사가 되었죠. 그 전부터 타고난 무골이라 명성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왕실이 아니면 둘 수 없는 비룡 기사는 말 그대로 친위대와 같다. 그래서 그들은 가문의 정에 휩쓸려 왕실에 해가 되는 판단을 하지 않기 위함이라는 명목 아래 성을 버리고 은퇴하기 전까지는 가정을 꾸리지 않는다.
가만히 보면 신전 기사들보다 더한 이들이다. 이세계의 종교는 성직자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는 것에 대해 아무런 제약이 없으니까. 그렇다고 정년 퇴직이 정해진 세상도 아닌지라 비룡 기사들은 대부분 후계를 두지 못하고 죽는다고 알고 있다.
"메시나 왕녀님께서 직접 손을 쓰셨으니 어쩌면 이번에 파견된 이들 중에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하하, 아마 그건 어려울 겁니다. 헤이리 경은 메시나 왕녀님의 최측근으로 집사의 역할도 하고 있으니까요. 허나 에가 경의 말씀대로 이곳에 헤이리 경이 오게 된다면 그만큼 왕녀님이 이 사건을 주의 깊게 살피고자 한다는 뜻이겠죠."
집사? 순간 찰거머리 왕녀의 갑작스러운 등장을 함께 했던 여집사가 스쳐 지나갔다.
"혹시 헤이리 경이 여성입니까?"
"네. 맞습니다. 왕녀님과 뵌 적이 있으시다면 아마 높은 확률로 마주쳤을 겁니다. 항상 옆에 있으니까요."
허... 아무래도 맞나보다. 그 사람이 그렇게나 대단한 사람이었다 이거지? 그렇게나 지근거리에서 마주했는데도 개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는 게 좀 허탈하다.
바로 코앞에 지뢰가 있는데도 알지 못 하는 경우가 너무 자주 일어나니 오러를 느낄 방법을 강구해 봐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조금 더 깊게 생각해 보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어차피 내 삶의 판단 기준에 상대방의 강약은 아무 의미 없는데 굳이 알아서 뭐에 쓰겠어?
그렇게 모닥불 옆에 앉아 전설적인 비룡 기사들의 영웅담을 주워듣고 있었더니 저 먼 하늘에서부터 편대 피행을 하며 날아오는 비룡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오는군요."
"...생각보다 장관이네요."
내 짧은 감상에 비스퀜테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상당한 거리가 있었음에도 저 비행의 선두에 있는 게 기에스고, 뒤 따르는 이들이 비룡 기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은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평범한 말과 군마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저 정도면 그냥 저공 비행만 하더라도 적들의 목이 부러질 거 같군요."
비스퀜테의 비유는 정확했다. 꼬리와 날개의 길이부터 시작해서 몸에 두르고 있는 비룡 전용 갑주들이 합쳐지자 운송을 위한 비룡들보다 1.5배는 더 커 보였다. 마치 현대의 전투기를 보는 듯해서 네 마리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다.
"......!"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선두에 있던 이가 팔을 휘저으며 뒤에 신호를 보낸다. 온갖 방한 장비에 고글 같은 것도 쓰고 있어서 얼굴을 알아볼 방법은 없었지만 어째 비룡이 낯이 익었다. 기에스의 말마따나 쟤들도 개나 고양이처럼 생김새가 다 다른 게 맞나보다. 저 한 마리만 굉장히 익숙하네.
"엘드미아 님! 오랜만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천천히 비룡을 하강시키면서 손을 흔드는 옷뭉치가 기에스의 목소리를 냈고, 난 웃으며 손을 흔들어줬다. 그사이 착지를 마친 비룡은 빠르게 옆으로 빠지더니 뒤따라 하강하는 비룡들을 향해 마치 주차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금 빠르게 하강하는 듯싶었던 비룡의 속도가 확연히 줄어들었고, 그렇게 네 비룡이 모두 안전하게 착지를 완료하고 나서야 비룡에서 내린 기에스가 기사들과 함께 다가왔다.
하지만 하강할 때 잠깐 아는 척을 한 것과 별개로 지금은 길잡이의 신분이었기에 먼저 말을 걸지는 못했다. 나도 굳이 그에게 말을 걸어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기에 마치 관절 곳곳에 털 뭉치를 쑤셔 박은 것 같은 복장의 기사들에게로 관심을 옮겼다.
하늘을 날아다니며 추위를 견뎌야 하는 탓에 그들의 갑옷은 거의 털갑옷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수준으로 방한 대책이 되어 있었다. 투구 역시 일반적인 투구와 달리 안면 부분을 오토바이 헬멧의 바이저 같은 것으로 가려놓았는데, 무슨 재질인지 몰라도 착용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저대로 말하면 대체 어떻게 목소리가 날까 궁금해질 때쯤, 다른 기사들보다 조금 더 앞에 서 있던 이가 천천히 자신의 투구를 벗었다.
아래에서 나온 것은 메시나 왕녀의 여집사였다. 아무래도 왕녀는 이 사건을 가볍게 보지 않은 모양이다. 그녀는 무뚝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눈인사를 마친 뒤 비스퀜테에게 물었다.
"기사 비스퀜테, 맞나?"
"네. 라비엘의 평기사 비스퀜테입니다. 왕실을 수호하는 비룡 기사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말만 그런 게 아니라 당장 무릎까지 꿇으려는 비스퀜테였으나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건지 헤이리가 먼저 손을 움직여 저지했다.
"시급한 상황이니 약식으로 넘어가지. 왕녀님의 명에 따라 오크들을 토벌하고 그들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원인으로 예상되는 게이트를 확인하고자 왔다. 오크들의 습격은 아직인가?"
"실은 이미 어제 한 차례 습격이 있었습니다."
"규모는?"
"습격에 동원된 수만 200여 마리가 조금 넘었던 것으로 짐작합니다."
"훌륭하게 방어했군."
비스퀜테는 굳이 모험가와 용병들의 노력을 입에 담는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비스퀜테가 유별난 편인 거지, 얼치기 기사들 중에서는 두 직종에 종사하는 이들을 수전노에 명예를 모르는 것들로 치부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고, 나름 왕실의 정예인 이들이지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 칭찬 한 마디 덧붙이려다가 비웃음 열 마디 듣는 걸 방지하고자 내린 선택인 게 분명했다.
"그대들의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 수는 없지. 잠깐 몸을 녹인 뒤에 바로 오크들의 부락으로 가겠다."
다행히 비룡 기사 헤이리는 정상적인 사고의 소유자인 듯했다. 그녀는 가벼운 고개짓만으로 다른 기사들에게 명령해 비스퀜테의 뒤를 따르게 했고, 그는 미리 기사들을 위해 준비한 빈 집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그리고 헤이리는 당연하다는 듯 내게 말을 걸어왔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에가 경."
"말씀을..."
"메시나 왕녀님께서 경을 향한 존칭을 거두지 않으셨기에 저 역시 그럴 수 없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찰거머리 왕녀 같으니. 왕녀 집사다운 눈치로 순식간에 내 말을 끊어낸 헤이리 앞에서 인상을 구길 수는 없었기에 일단 덤덤한 척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가벼운 손짓으로 같이 걷자는 의사를 표하며 말을 이었다.
"비스퀜테 경의 보고를 가벼이 여기지 않은데에는 경의 도움이 컸습니다. 왕녀님께서 이에 감사를 표하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딱히 뭘 한 적은 없습니다만."
"경험자이시지 않습니까. 그것도 두 번이나."
뭐... 폐던전은 원래 왕실의 비밀 의뢰였으니 그녀 정도의 관계자라면 알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지. 이번에도 그냥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레비엥 변경백, 폐던전 게이트, 반역자 엔벨데, 성광 십자회의 성녀에 연이은 악마 토벌, 반역의 잔당들 처단은 물론이고 이번... 오크 게이트라고 불러야 할까요? 아무튼, 왕녀님은 이만큼이나 왕국에 큰 도움을 준 경께 제대로 된 보답조차 하지 못했다는 점에 크게 상심하고 계십니다."
찰거머리가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소리였지만 이번에는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공식적으로 엔벨데까지의 일은 다 마무리되고 보상까지 받은 상태고, 뒤의 일들 역시 어떻게든 성대하게 챙겨 먹이려는 왕녀의 바람과 달리 적정선에서 정리될 방법들이 있으니까.
"악마와 사룡으로 정정할 필요가 있어 보이는군요."
그랬기에 난 그녀의 말에 과민반응하는 일 없이 실수를 정정할 정도의 여유를 보일 수 있었고, 헤이리는 잠깐 움찔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요. 제가 잠시 착각했나봅니다."
"바쁘시면 그럴 수도 있죠. 제 한 몸 먹고 살고자 식재료를 사는 과정에서도 깜빡하거나 착각하는 세상 아니겠습니까."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
"개인적으로는 누구보다도 바쁘실 왕녀님 역시 저에 대한 것을 좀 많이 착각하고 잊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거랑 자꾸 이렇게 장래에 귀찮아질 수 있는 일을 엮어대는 건 별개의 문제다. 대체 성대하게 먹여서 뭘 얼마나 부려 먹으려고? 정말 단순하게 내 공을 치하하려고 한다는 건 말도 안된다. 그럼 당장 전선에 있는 병사들은 뭐가 되겠어?
이번엔 헤이리도 걸음을 멈추거나 움찔거리지 않았다. 하지만 약간 지체한 끝에 확신을 담아 말을 이었다.
"...왕녀님은 총명하셔서 쉽게 잊는 법이 없으시더군요."
"저 역시 왕녀님의 총기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하루에도 수천 가지를 잊어 버린다고 하더군요. 왕녀님께서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죠."
이게 헤이리의 충심에서 나온 자의적인 판단인지 왕녀의 명령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았기에, 나는 부디 내 대답이 왕녀까지 닿길 바라며 선을 그었다.
다행히 비스퀜테의 뒤를 따라 이동하는 동안 헤이리는 더 이상 왕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