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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20화 (320/412)

일방적으로 헤이리의 말을 끊다시피 했지만 어차피 저쪽도 자꾸 싫다는 나에게 일방적으로 접근하는 입장이었기에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찰거머리 공주와 관련된 이야기가 아닌 것에 한해서는 최대한 성실하게 대했고, 헤이리가 그런 내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까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다른 주제로 이야기할 때 삼백안을 뜨거나 말투에서 불만이 흘러나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한 시간가량 휴식을 취하며 나와 비스퀜테에게 오크들과의 거리나 병력 현황을 전해 들은 그녀는 기사들에게 정비를 지시하고는 만신전에서 이루어지는 회의에 참석해 가장 먼저 의견을 제시했다.

"총력전에 나선다."

정정. 명령을 내렸다.

이젠 가장 계급이 높은 그녀가 지휘관이니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으나, 비룡 기사들과 발 맞출 수 있는 조건이 하나도 성립되지 않은 입장에서 한 방에 이해할 수 있는 명령은 아니었다. 다행스럽게도 나만 그리 느낀 게 아닌지 칼 굴스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단순한 이야기다. 우리 비룡 기사들이 오크들을 타격하고, 후발대인 그대들이 도주하는 잔당을 처리한다. 비룡 기사들만 먼저 날아가서 전투를 치르는 것보다 반나절 정도 늦어지겠지만 어쭙잖게 화근을 남기는 것보다는 그게 낫다."

완벽한 자신감을 기반으로 내린 계획. 부딪치면 반드시 다 쓸어 버린다는 확신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입에 담는 헤이리는 과연 비룡 기사였다.

나름 이름있는 기사가 떠들었더라도 속으로 비웃으며 대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구경해 보고 싶었을 텐데 왕실의 비룡 기사이다 보니 말의 무게감이 다르게 다가왔다.

그와 별개로 계획 자체에는 문제가 없어 보여서 모험가 대표로서 고개를 끄덕였으나, 칼 굴스는 잠시 고민을 한 뒤 입을 열었다.

"놈들은 마을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포위망을 벗어나 마을을 노리는 오크가 있을 수 있으니 최소 인원을 남겨 놓고 가고 싶습니다."

"타당한 의견이지만 그건 비룡 기사가 알아서 한다. 한창 녹음이 푸르게 자라나는 시기면 몰라도 이런 겨울에는 우리들의 눈을 피해 숲을 벗어날 수는 없다."

헤이리는 자신만만하게 말하지 않았다. 해는 동쪽에서 뜬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그저 덤덤하게 읊조릴 뿐. 그에 칼 굴스와 예카트리나, 비스퀜테는 '아!'하는 소리를 내며 짧게 감탄했고 나는 제공권이 가져다주는 유리함을 아직 제대로 모르고 있는 판타지 주민들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평소에 그다지 느낄 일 없는 현대인의 뿌듯함 반, 앞으로도 공중 기습은 꽤나 잘 먹혀들어갈 거 같다는 즐거움 반으로 이루어진 감탄이었다.

"에가 경은 이미 비룡을 타고 움직인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금방 이해 하시는군요."

근데 그 뿌듯함을 느끼느라 적절한 반응을 못 한 탓에 헤이리의 묘한 시선을 받게 됐다.

얘 내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오라는 명령이라도 받은 건가? 그거까지는 그러려니 해 줄 수 있는데 방금 전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대대적으로 하대를 해 놓고 나한테만 존칭을 쓰니 괜히 눈치 보인다.

"얼마 없는 경험이었지만 동시에 확실한 경험이었죠. 비룡 위에서 공격을 할 수 없는 저조차 이점을 느꼈는데, 마법을 통한 폭격이 가능한 비룡 기사는 말할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내 대답에 다른 사람들은 의외라는 듯 쳐다보았고, 이 마을에서 시도한 엘드미아 랜딩을 목격했던 예카트리나는 묘하게 경직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내가 했던 것처럼 번지점프라도 시킬까 봐 겁먹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땐 땅이 가까웠으니 낙하산 없는 스카이 다이빙에 비하면 양반이었는데.

"속도가 관건일 것 같으니... 넉넉히 이틀 치의 식량을 준비해서 바로 집합시키도록 할까요?"

잠깐 옛 기억을 떠올리는 사이 빠르게 정리된 회의 막바지에 비스퀜테가 질문하자 잠깐 눈을 굴리며 고민한 헤이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방한 대책은 알아서들 하겠지. 그 외에도 집합이 완료되면 전투가 일어날 경우 따로 지시가 없을 시 전장에 접근하지 말라는 주의사항을 확실히 전달해 두도록. 숲을 전부 태울 생각은 없지만 적의 수가 많을 경우 화력이 예상을 벗어날 수 있다."

"기병대가 빠진 뒤 공격하는 것과 같은 이치인가 보군요."

예상치 못한 주의사항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중얼거리는 칼 굴스를 보며 헤이리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보다 더 심하지. 기병대는 불길을 남기지 않으니까."

아무래도 비룡 기사들은 방화범의 기질이 있는 모양이다.

회의가 정리된 뒤 명령을 전달받은 용병과 모험가들은 정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특히 모험가들은 내가 두들겨 팼을 때보다 더 빠르게 움직였는데, 왕실에서 직접 개입했으니 자칫 잘못하면 반역죄로 엮여 모가지가 날아갈 수 있다는 듣도보도 못한 소문이 퍼진 탓이었다.

놈들의 무식함에 새삼 진절머리가 났지만 결과가 좋았기에 그냥 방치하고 내 볼일을 보기로 했다. 강제 징집령이 내려지더라도 거부권을 행사하고 국외 추방될 수 있는 놈들이 반역죄를 걱정하다니, 웃기는 일이다.

덕분에 밍기적 거리는 놈들 하나 없이 순식간에 집합한 인원들은 참으로 제각각이었지만 군기는 바짝 든 골 때리는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나는 일단 기에스와 함께 움직여야 했기에 비룡에 오른 채 그 모습을 조금은 멀리서 볼 수 있었고, 대놓고 낄낄 거리며 기에스와 함께 녀석들의 멍청함을 비웃어 주었다.

"야, 저 머저리들 좀 봐라. 자기들한테 무슨 권리가 있는지 몰라서 반역죄를 두려워하며 군인 흉내낸다."

"그냥 성실한 거 아닙니까?"

"옘병, 성실이 아니라 실성이겠지. 저놈들이 성실했으면 내가 여기 와서 속이 뒤집히는 일도 없었다. 저 새끼들 저거 오크 방임주의였다고."

지금에야 일이 잘 해결되는 중이라서 다행인 거지, 자칫 잘못하면 정말 끔찍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내 투덜거림을 듣던 기에스는 처음엔 실실 웃었지만 오크 놈들이 불러왔을 최악의 결과까지 들을 때쯤엔 나처럼 모험가 놈들의 인성에 진저리를 치기 시작했다.

"세상에 몬스터가 남아야 몬스터 퇴치로 먹고 살 수 있다는 논리라니. 끔찍하기 그지없군요."

"누가 아니래. 완전 미친놈들이라니까."

간만에 만난 회포를 모험가 뒷담으로 풀고 있는 사이 간단한 연설과 지시 사항을 전달한 헤이리가 말을 마치고 출발을 지시했다.

그에 열 명 남짓한 용병들은 오와 열을 맞춰 정예군처럼 움직였으나 모험가들은 그런 훈련조차 해 보질 않은 탓에 당나라 군대가 따로 없었다. 그 속에는 아실리에와 라이카 그리고 예카트리나도 있었지만 얼굴에서 빛이 나서 그런지 거기는 분위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전체적으로 군대가 출정 나가는 것과 같은 웅장함은 없어도, 바짝 긴장하고 있는 놈들이 많은 탓인지 나름대로의 비장함을 풍겼다. 어쩌면 그들의 안전을 기원하며 배웅해주는 거주민들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발 맞춰서 걷는 것조차 하지 않는 모험가들을 못 마땅하게 바라보는 동안 헤이리와 수신호를 주고받은 기에스가 고삐를 쥐자, 비룡이 우아하게 날개를 피며 날아 올랐다.

천천히 내려올 때와 다르게 상승은 빠르게 이뤄졌고, 순식간에 목표 고도까지 오르자 분명 최대한 껴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몸이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남들 걸어갈 때 날아간다고 좋아했는데 완전히 잘못 생각했다!

"와, 진짜 한겨울에는 탈 게 못 되겠는데 이거?!"

나름 열심히 챙겨 입은 노력이 무색하게 뼛속까지 시리다! 절로 터져 나오는 비명에 기에스가 웃음을 터트리며 외쳤다.

"그나마 제 뒤에 계셔서 그 정도인 겁니다! 저희가 괜히 천 뭉치가 되는 게 아니라니까요!"

남의 고통을 직면하고도 웃다니, 인성이 뒤틀리기 시작했군.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난 최대한 몸을 움츠려 필사적으로 기에스의 등 뒤에 숨었다. 당연히 내 덩치 탓에 택도 없는 행동이었지만 덜 추워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물론 착각이었다. 진짜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도저히 못 버티겠다.

"겨울에 신나게 축제를 벌이시느라 바쁘신 정령님들은 부디 노여워하지 마시고 한 번만 봐주시길 바랍니다. 불의 정령님, 이 추운 날 드높은 하늘에서 칼바람을 맞아야 하는 저를 불쌍히 여기신다면, 약간이라도 좋으니 온기 좀 부탁드립니다 제발. 뒤지겠습니다 진짜."

그래 봤자 착각은 착각이었기에 머지않아 저체온증이 올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낀 나는 정중하면서도 필사적인 심정을 담아 오랜만에 정령님께 부탁했고, 작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귀신같이 주워들은 기에스가 느닷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아니, 그걸 신이 아니라 정령에게 부탁하십니까?"

"왜 웃어 임마. 너 그러다가 정령님께 혼나!"

"제가 정령술에는 조예가 없을지언정 정령술사는 조금 알고 있는데, 엘드미아 님처럼 정령에게 간절히 부탁하는 분은 처음 보네요! 혹시 정령 신앙같은 거라도 믿으십니까?"

"난 마신 에파가님을 믿어."

"으하하핫! 아 진짜 그만하십쇼! 웃다가 떨어지겠습니다!"

진짠데 농담인 줄 아네. 에휴, 에파가님. 좀 모자라고 순박해서 사기도 당할지언정 애는 착합니다. 부디 노여워 하지 마십... 어라?

"오...? 정령님?"

온기다!

불의 정령님께서 날 보셨어! 가슴팍에서부터 퍼져나가기 시작한 따듯한 기운이 전신에 맴돌 때 쯤 이변을 눈치챈 기에스가 물었다.

"어? 엘드미아 님? 갑자기 등이 좀 따듯해지기 시작하는데 혹시 마석 난로 같은 거라도 들고 오셨습니까?"

"어허! 어디서 그런 망언을! 정령님이 은총을 내리셨다!"

"예? 아니? 진짜요? 정령술도 쓸 줄 아셨습니까?"

기에스는 진짜 당황했는지 도중에 몸까지 돌려 내가 아무런 난로도 쥐고 있지 않음을 확인하더니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야, 위험하게 뭐 해. 앞에 보고 운전해."

"이 정도는 알아서 갑니다. 그나저나 세상에, 정령술을? 대체 못 하시는 게 뭡니까?"

"그냥 도움받는 거지 정령술이라고 할 건 아니다. 전투에는 개입 안 하시거든."

"아니... 허어, 모르겠네 진짜. 뵐 때마다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으시단 말이지."

헛웃음을 터트리면서도 다시 제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고삐를 쥐는 기에스를 보며 나는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비룡 기사 넷을 뒤에 얹고 따뜻하게 비행을 즐길 수 있게 되니 지금까지의 빡침과 번거로움은 다 잊어 버릴 수 있을 것처럼 상쾌한 기분이었다.

그래, 이게 피크닉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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