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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21화 (321/412)

지상에서 움직이는 이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맞춰야 했기 때문에 비룡을 탔음에도 우리의 이동 속도는 그다지 빠른 편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예 훅치고 나가서 정찰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괜히 목표했던 것만큼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오크들을 자극해봤자 계획만 틀어지고 좋을 게 없었기에 주변 정찰을 통해 혹여 기습을 노리는 오크들과 길이 어긋나는 일이 없게만 주의하며 이동했다.

그리고 그 과정은 내 예상보다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이어진 비행과 함께 했다. 장담컨대 정령님의 가호가 없었으면 그냥 비룡 위에서 뛰어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가호가 함께 하잖아? 말처럼 흔들리고 충격받을 일이 없어 안 그래도 시승감이 장난이 아닌데 정면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대부분을 기에스가 받아주고 있으니 세상 이보다 편한 여행이 없다. 원래대로라면 온전히 제 옷만으로 온기를 유지해야 했던 기에스도 내 덕에 등 따시게 있을 수 있는 거였으니 서로 윈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치 시체를 노리는 까마귀처럼 지상 병력의 머리 위에서 크게 원을 그리며 이동하길 반나절 정도 지났을까. 숲속에 그럴싸한 공터를 발견한 우리는 식사와 휴식을 위해 잠시 멈추기로 했다.

물론 말이 휴식이지 명령권자들은 그런 거 없이 또 한 차례 모여 여기서 회의를 가져야만 했다. 나는 정말 팔자 좋게 와서 딱히 힘들지 않았지만 다른 네 사람은 추위 탓인지 조금 피곤해 보였다. 그나마 말을 타고 이동한 비스퀜테와 예카트리나는 상태가 양호했으나, 칼 굴스는 불가에 다가오자마자 손발부터 녹이기 시작했다.

헤이리? 그녀도 내색은 안 했지만 칼 굴스만큼이나 모닥불에 붙어서 몸을 녹이기 바빴다. 비룡 기사 커스텀으로 제작된 갑옷이라고 해도 그 살벌한 추위를 다 막아 내지는 못한 모양이다.

그렇게 두 사람이 어느 정도 여유를 찾고 떨림이 잦아지기까지 조용히 기다리던 비스퀜테가 자연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며 헤이리에게 말했다.

"용병들은 그래도 전장과 행군의 경험이 있어서 균일하게 움직이지만 모험가들이 따라잡기 힘든 상황입니다. 능력의 부족이라기보다는 아무래도 경험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음... 행군이 익숙한 모험가는 드물겠지. 안 그래도 위에서 지형을 살펴본 바, 이만한 휴식처는 한동안 보이지 않을 것 같더군.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오늘은 여기서 숙영지를 구축하고 비룡 기사들만으로 주변 정찰을 나서는 게 나을 것 같다."

추위 때문에 손끝은 미세하게 떨면서도 목소리만큼은 침착한 헤이리는 판단마저도 올바르기 그지없었다. 제대로 정신머리가 박혀 있는 기사 둘이 지휘권을 잡으니 일이 너무 편해져서 감탄을 금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아무런 이상도 없었고, 앞으로의 방침에도 변화가 없었기에 회의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중에 식사를 마친 뒤 불침번을 정하기 위해 한 번 더 모이자는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알아서 흩어졌고, 나는 모험가들에게 회의 내용을 전달한 뒤 아실리에와 기에스 그리고 예카트리나를 모아 적당히 자리를 잡고 텐트를 쳤다.

다행히 서로 일면식은 있는 사이였기에 시작부터 분위기가 어색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기에스와 나의 인연이 오그웬에서부터 이어졌다는 것을 들은 예카트리나가 적극적으로 내 기행에 대해 아는 게 있냐고 물어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실 저도 아는 건 얼마 없지만 어디에 내놔도 정신 나갔다는 소리 듣기 딱 좋은 위업을 같이 하긴 했죠!"

당연히 나올 이야기는 스카이 다이빙 밖에 없다. 물론 앞서 기에스와의 첫 대면에 델트의 부하들을 썰어 버린 것도 있긴 했지만 예카트리나에게 극적인 반응을 이끌어낸 건 내가 델트의 목을 따기 위해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이 비룡에서 비룡으로 뛰어내렸을 때였다.

"대, 대체 무슨 정신머리로...?"

아실리에와 함께 준비한 요리를 먹으면서도 예카트리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고, 그럴수록 직접 그 광경을 목격했던 기에스의 콧대만 높아졌다.

나름 내 인생의 업적 중 하나라고 여기는 사건인 만큼 거기까지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누가 아니래요. 세상 위험한 일이 알아서 엘드미아 님을 찾아간다 해도 믿을 지경입니다."

"제국에서는 황녀를 구한답시고..."

"...그렇게 마검한테 정신 지배를 당하게 생겼으니 모두가 놀랐지. 근데 갑자기 짐승의 형상을 한 마검의 얼굴에..."

갑자기 이야기의 주제가 '겁대가리를 상실한 엘드미아의 무모한 기행에 대한 평가'로 넘어가더니 아실리에까지 합류해서 가루가 되도록 날 까기 시작한 것이다.

졸지에 제국에 있을 때 나와 에스뮈에의 친목도모를 위한 희생양이 된 지크프리트와 같은 입장이 되어버린 나는 아실리에가 있어 차마 반박도 하지 못한 채 한동안 라이카나 쓰다듬으며 쭈그리 엘드미아가 되어야 했다.

그 영겁과도 같은 조리돌림이 끝난 것은 갑자기 예카트리나의 표정이 심각해지고 아실리에의 귀가 까딱거린 뒤였다.

"잠깐, 뭔가 이상한 울림이 느껴지는데."

"뭔가... 달려오는 소리도 들려."

한두 번 본 게 아니지만 기가 막힌다. 대체 어떻게 된 감각이 엘프의 청력만큼이나 땅울림에 민감할 수 있는 거지? 심지어 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상함 낌새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 아, 아니네. 갑자기 비룡들이 뭔가 불안을 느끼는 것처럼 꿈틀거리고 있었군.

"뭔가 달려오는데... 말도 아니고... 멧돼지?"

"그렇다고 하기엔 상당히 많은..."

일단 두 사람의 감각은 무조건적으로 신뢰할 만했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장비를 챙기는 사이 조금씩 살이 붙는 설명에, 이번엔 내가 반응했다.

정확히는 내 판타지 뇌를 깨운 일천 하고도 하나의 엘드미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경기를 일으키며 반응했다.

"이런 씨발, 전원 발검! 엄폐물 뒤로 숨어! 오크 기병이다!"

오크 새끼들 만나러 가는데 갑자기 멧돼지가 달려오는 것 같은 울림이 들려오면 이어질 거라고는 뻔하잖아!

비록 내가 이세계에서 오크들이 뭘 타고 다니는 꼴을 보지는 못했을지언정 대초원을 부르짖는 새끼들이 아무런 탈것도 없이 제 두다리만 믿고 뛰어다녔을 거라고는 믿지 못하겠다.

"오크 기병? 갑자기 무슨 소리를..."

저딴 소리를 하는 놈이 한 명도 나오지 않길 바라는 건 너무 큰 바람이지. 하지만 그런 놈들보다 내 외침에 거의 반사적으로 반응하며 엄폐물을 찾아 움직이는 이들이 절대 다수였기에 화딱지가 날 일은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비룡 기사들과 기에스는 순식간에 비룡에 올라타며 날아오를 준비에 들어갔고, 용병단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방진을 짜기 시작했다.

내 외침에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이지 않던 놈들이 다급해진 주변 분위기에 허겁지겁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며 나는 아실리에와 예카트리나에게 물었다.

"방향은?"

"우리가 나아가는 방향이 맞아. 그런데 오크 기병이라니? 이게?"

의아해하며 귀를 까딱이는 아실리에에게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 워 해머를 고쳐쥔 예카트리나가 나 대신 설명해줬다.

"말이 아니라 늑대입니다. 그걸 늑대라고 불러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서부 지대에서 몇 번 본 적 있습니다."

"오크가 마수를 기른다는 건가요?"

"건너에 있는 대초원이라는 곳이 좀 많이 넓어서 무식한 오크들조차 두 발로는 한계가 있다고 하죠. 엘드미아 말을 듣고 나니 기억납니다. 이 울림은 그 비대한 늑대들이 오크들을 등에 얹고 뛸 때와 흡사합니다."

예카트리나는 설명에 그치지 않고 재빠르게 움직이더니 주변에 적당한 나무들을 향해 망치질을 시작했다. 성의 철문조차 박살 낸다는 일격이 휘둘러질 때마다 그리 크지 않은 나무들이 박살이나며 쓰러졌고, 그렇게 그녀가 잠깐 뛰어다니는 것만으로도 급조된 바리케이드가 생성되었다.

"너무 든든해서 눈물이 다 나려고 하네요."

"재밌는 표현이네. 그보다 엘드미아, 대체 어떻게 안 거야? 이 인근에서는 볼 수 없는 놈들일 텐데?"

그녀는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던진 질문이었겠지만 나에겐 저 오크 놈들이 정말 수개월 치의 거리를 게이트로 점핑해서 온 놈들이라는 확신이 서게 만드는 근거였다.

인간조차 기병은 비싼 병종이다. 오크들이 아무리 체계적이지 않다 한들 여유가 있어야 저런 놈들을 기를 수 있겠지. 당연히 그런 놈들은 예카트리나의 말대로 이 부근에 존재하지 않는다.

"타인에게 얻은 지식이라고 해 두죠."

소설에서 봤다고 할 수는 없잖아. 발바닥을 통해 느껴질 정도로 땅울림이 커질 때쯤 완전히 준비를 마친 비룡 기사들이 차례차례 날아 오르는 모습을 보며 숙영지의 모두가 바짝 긴장했다. 땅울림이 커짐과 동시에 명백히 짐승의 것인 거친 숨소리와 으르렁거림도 작게 울려 퍼졌다. 소리만 들어도 엄청 빠르게 달려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말이라면 결코 이 숲속을 저렇게 달리지 못하리라.

"기병 발...! 전...사출...!"

하늘에서 아련하게 울려 퍼지는 외침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모두가 위를 바라보았다. 네 마리의 비룡들 위에서부터 솟구친 불길이 마치 유성처럼 숲속으로 떨어지는 모습은 나름 장엄하다고 할 수 있는 광경이었으나, 아쉽게도 지금은 그런 걸 느긋하게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하늘을 가로지르며 떨어지는 거대한 불길들조차 발밑으로 느끼는 불안감을 몰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조금 거리가 있는 곳에 떨어진 마법은 더 큰 땅울림과 함께 폭발을 자아내고 숲을 태우며 순식간에 주변의 온도를 끌어 올린다. 그 뒤에 이어진 것은 이제는 익숙한 오크들의 비명과 짐승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전쟁이다!!"

...멈추지 않고 달린 끝에 불길을 뚫고 모습을 드러낸 수많은 오크 기병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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