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의 뒷정리는 예상보다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아군의 피해는 예기치 못한 조우 속에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사망한 황급 모험가 둘을 제외하면 중상자가 조금 나온 게 전부였고, 이는 마주한 적에 비해 놀랄 만큼 적은 피해였기에 단순히 상황만 놓고 본다면 주변을 정리하고 오크와 마수들의 시체를 치울 인력이 충분한 게 맞았으나 그들의 행동이 빠를 수 있었던 데에는 다른 이유가 더 크게 작용했다.
비스퀜테는 유독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이들이 전부 마을 보호를 위해 미리 고용되어 있던 모험가들이라는 공통점을 놓치지 않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며 궃은 일도 도맡아서 할 뿐만 아니라 오크들의 시체 사이에서 거대한 바늘 같은 투사체가 발견되면 더할 나위없이 정중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들고 와서 기절한 엘드미아를 간호하고 있는 엘프에게 건넸다.
전투가 끝남과 동시에 그가 기절한 탓에 미처 회수하지 못한 마도구가 순식간에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는 모습이 묘하게 유쾌해서 비스퀜테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원리를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렇게나 압도적인 위력을 보여주었으니 누구 하나 흑심을 품을 만도 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잘못 생각한 거 같았다.
그에겐 좋은 일이었다. 오크들을 쫓기 위해 헤이리가 자리를 비운 지금, 이곳의 지휘관은 비스퀜테 본인이었고 그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아 남은 이들을 닦달하고 싶지 않았다. 의도야 어찌 되었든 자발적으로 움직여주니 마음이 편했다.
허겁지겁 도망치는 오크들 덕에 굳이 엘드미아를 앞세워 움직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헤이리는 일말의 주저 없이 선두에 서서 그들을 추적했다. 어차피 오크들이 살아서 돌아가면 비룡 기사의 존재도 알게 될 터이니 이제부터는 시간과의 싸움이라고 결론을 내린 끝에 취한 행동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을 기에스라 소개한 비룡 조종사에게 별도의 명령을 내려 수도에 파발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극히 현명한 판단이었다. 오크들은 분명 군대였고, 인근에서 볼 수 없는 마수를 타고 달려들었다. 게이트가 쓰였다는 가설은 사실이 되고 위협은 커졌으니 왕실의 방침을 빠르게 정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주변을 정리하고 전투가 이어지는 동안 박살 난 나무들을 긁어모아 목책을 구성하는 것만으로도 저녁이 다가왔다. 엘드미아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애완견이 한바탕 휘젓고, 오크 기병들이 날뛴 탓에 목재는 넘쳐흘렀다. 너무 크다 싶은 것은 예카트리나가 직접 나서 망치질 몇 번 해주는 것만으로 거침없이 쪼개졌다.
어차피 내일 이동은 글렀으니 만에 하나 있을 기습에 안정적으로 대처하자는 마음으로 쌓아 올린 목책들은 그러한 노력 덕분에 꽤 튼튼해 보였다.
헤이리가 홀로 돌아온 것은 숙영지 보강이 끝나고 저녁 식사를 시작할 무렵이었다.
기도비닉을 유지하기 위해 불조차 쓰지 않은 채 높은 고도에서 장시간 비행을 한 그녀의 갑옷에는 두꺼운 서리가 내려앉은 상태였다. 그 정도면 체면도 집어던지고 당장 불가로 달려오고 싶을 법도 할 텐데 여전히 품위를 유지하며 절도 있게 걸어오는 모습에 비스퀜테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투구를 벗은 그녀는 추위로 인해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음에도 의연한 태도로 엘드미아에 대한 것부터 물었다.
"에가 경의 용태는 어떤가."
"의식은 여전히 없습니다. 딱히 고통스러워하는 기색을 보이지는 않으나 고열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단 한 번도 깨어나지 못한 건가?"
"예."
헤이리는 침음을 흘리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눈을 감으며 안타까움을 표할 뿐.
비록 그가 메시나 왕녀에게 수 차례 무례를 저질렀다고는 하나 이번에 보여 준 모습은 영웅적이었다는 상투적인 표현으로밖에 묘사할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운 수준이었고, 이해를 넘어선 강함에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으나 무인이자 기사로서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상의 병력이 이렇게까지 온전하고 마을에 피해가 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8할 이상이 엘드미아의 도움 덕분이다. 사적인 감정으로 푸대접을 하기가 더 힘든 상황 속에서 헤이리는 시선을 움직여 엘드미아를 찾았다.
다행히 그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거꾸로 세워진 거대한 워 해머와 그 주인이 엘프와 함께 이정표처럼 그 옆을 지키고 있었으니까.
"예카트리나 라는 모험가와 에가 경의 지인인 엘프 분은 모든 근무에서 제외하도록. 근무 인수 인계로 교대마다 에가 경의 용태 파악을 지시하고, 이상이 있을 경우 언제든 나를 깨우라 해라."
"...제가 대신 보고를 받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오늘의 전투도, 그 후에 이어진 추적도 하나같이 쉬운 게 아니었다. 체력을 회복할 틈조차 가지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비룡 기사였기 때문이다. 그 정도는 아랫사람에게 맡겨도 되지 않을까 싶어 한 말에 헤이리는 덤덤히 고개를 내저으며 비스퀜테의 의견을 기각했다.
"지금 이곳의 지휘관은 나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내가 관리해야 하는 게 맞지. 만에 하나 그를 급히 수도로 귀환시켜야 하는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 귀공의 배려는 마음만 받겠다."
그걸로 엘드미아와 관련된 지침은 끝이었다.
헤이리는 적당히 천막을 세워 구성한 임시 지휘소에서 비스퀜테가 도끼를 사용하는 모험가에게 부탁해 적당히 깎아 만든 통나무를 탁자 삼아 정찰로 얻은 정보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끔찍하다고 할 수준이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보고받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규모더군. 그 사이 게이트에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몰라도 대초원의 오크들을 전부 끌고 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많은 오크들이 모여 있었다."
그녀가 대충 파악한 수만 해도 삼천 가량. 왕국의 연대 규모를 넘어서는 오크들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명백한 위기였다.
"놈들은 마을만 노린 게 아니다. 그저 알고 있는 곳에 병력을 보냈을 뿐. 주변에 있는 몬스터나 동물들을 죄다 잡아 먹으며 똬리를 튼 채 다른 방향으로도 병력을 보낸 정황이 포착됐다."
"그 말씀은..."
"맞다. 동부가 위험해졌다. 그래서 비룡 기사들을 인근 도시에 전령으로 보냈다."
덤덤히 홀로 귀환한 이유를 밝힌 헤이리는 자신이 한 말의 무게를 되새긴 뒤 한숨을 내쉬었다.
동부가 위험하다니, 차라리 실언이었으면 좋겠으나 명백한 사실이었다.
"...세상에."
그 말을 전해 들은 비스퀜테는 표정 관리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모든 일에 무난하게 대처했다고 여겼는데, 어디서부터인지 몰라도 일이 크게 틀어졌음은 자명했다.
설령 일이 잘 해결된다 하더라도 그만한 오크들의 등장을 미리 예견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라비엘에 책임을 물을 지도 모를 일이라고 여겨 침음을 흘리고 있었더니 마치 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헤이리가 말했다.
"기밀이라 상세한 내용을 말해 줄 수는 없으나, 이로 인해 왕실에서 라비엘을 비롯한 주변 도시와 영주들에게 책임을 묻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건과 명백하게 관계있는 움직임을 보인 이들은 별개지만."
비스퀜테는 기밀에 의문을 가지는 대신 순수하게 안도했다. 다른 건 몰라도 라비엘은 이미 내부 정리를 마친 상태였기에 '청결'한 상태였고, 하늘이 두쪽으로 갈라지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이 사건에 직접적인 연관을 지닌 이가 나올 리 없었기에.
"그럼 왕실에도 추가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이미 최악을 가정해서 왕녀님께 보고 드렸으니까. 왕녀님의 판단을 믿고 기다리도록."
섬기는 이를 향한 굉장한 신뢰와 자부심이 넘치는 대답이었지만 메시나 왕녀에 대해서는 아는 게 많지 않았던 비스퀜테였기에, 그는 그저 존경할 만한 비룡 기사인 헤이리가 이렇게까지 신뢰한다는 사실을 믿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밝아오기가 무섭게 그는 헤이리의 믿음이 굉장히 근거 있는 믿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놀랄 일이... 너무 많군."
다양한 깃발들을 치켜든 기수들과 함께 군대가 나타났다. 수십 명씩 뭉쳐 있는 그들이 수도에 머물고 있는 귀족들의 개인 사병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중에는 아카데미의 상징을 깃발 삼아 나타난 아카데미 생도들도 있었다. 교수로 짐작되는 이들을 지휘관 삼아 나타난 그들은 급하게 징발된 것으로 짐작되는 마차에서 내리며 상기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거구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늙은 전사와 한 명의 여기사만 대동한 채, 가문을 상징하는 깃발이 달린 기창을 직접 들고 서 있는 여성이었다.
단 세 명이서 참전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색적인 광경이라 할 수 있었으나 그들이 다른 귀족들의 시선을 모은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레비엥 변경백...?"
레비엥 가문의 상징인 월계수와 원형 방패가 새겨진 깃발은 기수이자 가문의 주인인 여성의 머리카락처럼 붉었다. 붉은빛을 띠는 경갑을 착용한 채 깃발에 새겨진 문양을 그대로 뽑아낸 것 같은 원형 방패를 들고 있는 여성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게 빛나는 듯했다. 도착과 동시에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훑어본 그녀는 비스퀜테를 발견하자마자 천천히 말을 몰고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땐 여리디 여린 소녀라 했는데,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그 모습이 심히 위풍당당했다.
비스퀜테는 제 의무를 다하고 무너진 왕국의 방패를 향한 애도와 존경을 담아 무릎을 꿇어 인사했다.
"왕국의 방패이자 변경 레비엥의 수호자이신 레비엥 변경백을 뵙습니다. 저는 비스퀜테 다 라비엘이라 합니다."
고개를 숙일 필요까지는 없었기에 비스퀜테는 어렵지 않게 그녀와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콧잔등과 볼에 미세하게 박혀 있는 주근깨와 날카롭지만 큰 눈망울은 그녀가 풍기고 있는 분위기가 달리 묘한 친근감을 불러일으켰으나 그보다 신경 쓰이는 건 그 눈에 담긴 묘한 슬픔이었다.
비스퀜테가 그 감정에 의문을 가질 틈도 없이 레비엥 변경백이 살짝 고개를 숙여 그의 인사에 화답하며 질문했다.
"엘드미아 에가는 어디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