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25화 (325/412)

엘드미아는 멀쩡해 보였다.

혼자서 백이 넘는 오크 기병을 막아 낸 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생채기조차 없다. 표정마저 평온하기 그지없으니 영락없이 자고 있는 것 같았으나, 이름을 불러 보아도 대답이 없고 흔들어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온몸은 펄펄 끓고 있는 상태였다.

이대로 죽는 건 아닐까. 저도 모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에 털컥 겁이 났지만 숨 소리마저 고요했기에 라그니스는 불길한 생각을 떨쳐낼 수 있었다.

"엘디한테 듣기만 했었는데, 훈련 많이 했나 보네."

함께 그를 바라보고 있던 아실리에가 가볍게 화제를 전환했다. 목소리는 라그니스가 기억하는 평소보다 좀 더 밝았지만, 어깨에 닿을 기세로 정도로 축 져진 귀만큼은 어찌하지 못하고 있었다.

문득 과거 오그웬에서 엘드미아가 비룡에서 뛰어내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혼절했던 아실리에가 떠올랐다. 이번의 전투는 그보다 더 무모했을 텐데도 저렇게 태연함을 유지할 수 있는 걸 보면 아실리에는 엘드미아의 곁에 있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마음을 단단하게 먹은 듯했다.

"열심히 하는 중이죠. 다행히 스승님은 제게 재능이 있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런 칭찬에 자만하기엔 너무 많은 일이 있었으나, 이를 악물고 훈련을 이어 나가는 데에는 도움이 됐다. 라드넬반데스는 재능 앞에서 누구보다 냉정한 마법사 중 하나였으니까.

스스로 느끼기에도 그의 말은 사실에 가까운 듯했다. 비록 체력적인 부분은 성장에 한계가 있었지만, 마법과 관련된 영역은 라그니스 스스로도 믿기 힘들 정도의 성취를 거둘 수 있었다. 그랬기에 메시나 왕녀의 부탁으로 움직이게 된 라드넬반데스가 실전이라는 명목하에 자신을 데려온 것이었는데...

"괜찮은 거겠죠?"

"열이 나는 거 외에는 조금도 고통스러워하지 않으니 그렇다고 믿고 싶어."

이번엔 정말 별일 없을 줄 알았는데 말이지. 작게 중얼거리며 아실리에는 엘드미아의 이마에 얹혀 있던 수건을 눈에 두었던 찬 수건으로 교체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처연해서 지휘관을 만난다는 핑계로 조금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홀로 군대를 상대했다고 하더군."

텐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서 그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던 라드넬반데스가 다가온 라그니스에게 말했다. 기에스에겐 구체적으로 들을 틈이 없었던 이야기였다.

"'그' 헤이리가 직접 말하더구나. 실로 영웅의 귀감이라고."

'인색한' 헤이리. 왕실에 자신의 삶을 바치기로 맹세한 비룡 기사단의 실력자는 그 실력만큼이나 남을 칭찬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겨우 열다섯 살에 불과한 소년에게 그런 후한 평가를 내렸다는 이야기가 퍼지면 왕국 기사단 내에서도 난리가 날 게 분명했다.

"계획에 대해 들은 바 있으신가요?"

"기병들을 막아 낸 이들은 이곳에 주둔시키고 추가 병력으로 공격에 나선다. 지휘관은 헤이리다. 따로 지휘부 구성은 하지 않고 명령만 하달하겠다더군."

애당초 이 모든 준비를 메시나 왕녀가 했으니 그녀에게 전권을 받다시피한 헤이리가 지휘를 하는 건 당연한 이야기였다. 다른 귀족들이야 전공하나 얻어 먹을 기회가 줄었다고 아쉬워할 수도 있겠지만 라그니스는 개의치 않았다.

그저 빨리 공격에 나섰으면 좋겠다. 엘드미아가 깨어나기 전에.

"날뛰고 싶어 하는 눈치로구나. 내 훈련이 아무리 가차없기로서니 성격까지 바꿀 정도는 아닌데."

"공격이 늦어지면 엘드미아가 깨어나서 합류할 가능성도 높아지는 거니까요."

이미 자신이 혹독한 훈련을 받는 이유를 다 알고 있는 라드넬반데스에게 숨길 이유도 없는 만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자 그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라드넬반데스는 대화를 이어 나가는 대신 레니사에게 전투에 관한 조언을 물어보는 라그니스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수도로 귀환할 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손녀딸같았던 아이였다. 전우이자 친우였던 그녀의 아버지 엔그린의 죽음 이후 상처만 받았을 저 아이를 귀족들의 권모술수에서 아예 떨어뜨려 놓기 위해 왕실의 계획에도 협력했었다. 이를 위해 제국으로의 망명이나 이적까지 왕실과의 합의 아래 준비했다.

엔그린 리엔 다 레비엥은 자신의 딸이 변경백이라는 자리의 무게를 감당하길 원치 않았었으니까.

그는 좋은 신하이자 좋은 아버지였지만 좋은 귀족은 되지 못했고, 자신의 자리가 가져다주는 중압감을 자식이 물려받길 원치 않았다. 라드넬반데스는 그와의 우정을 생각해 그가 이룰 수 없었던 소원을 이뤄주고자 했다.

결과적으로는 라그니스의 의견은 신경도 쓰지 않은 오지랖에 불과했다. 스스로 편협했음을 깨닫게 된 건 라그니스가 직접 자신에게 와서 훈련을 요구한 순간이었다.

그저 소녀에 불과했던 아이는 여자이자 귀족이 되어 있었고, 전사가 될 준비마저 마친 상태였다.

깨달음 뒤의 결단은 빨랐다. 처음엔 의지를 확인하고자 무리를 시켰지만, 이내 진심으로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그녀가 원하는 수준까지 닿기 위해서는 그마저도 부족했기에 내린 판단이었다.

지금도 그 판단이 잘못되었다 여기진 않았으나, 가끔씩은 라그니스의 재능에 깜짝 깜짝 놀랄 때가 있었다.

'나나 자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한 아이로 자란 듯허이.'

제 나이에 맞게 조숙하기도 하고 말이지. 남편감을 점 찍어둔 채 이 악물고 달리는 모습이 괜히 흐뭇했다.

사랑을 위해 자진해서 걷는 가시밭길이라, 방구석에서 소설로 낭만을 꿈꾸는 여식들보다 훨씬 적극적인 낭만이었다. 떠올려보니 엔그린도 안주인이 적극적으로 구애해서 결혼했었다. 라그니스의 성격은 집안 내력일 가능성이 컸다.

라그니스가 알았더라면 생사를 오락가락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뭔 생각을 하냐며 타박을 줬을 테지만 이런 일로 개인적인 사색에 감정적인 제동이 걸리기엔 라드넬반데스가 살아온 세월이 너무 길었다.

수많은 죽음과 기사회생을 보아온 그의 눈으로 볼 때, 엘드미아는 죽으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몸이 가볍다. 정신도 맑다.

마치 평생 꿈꿔왔던 꿀잠을 자고 일어나 개운한 상태를 맞이한 기분 속에서 눈을 뜬 내가 처음으로 보게 된 것은 불타는 여인이었다.

아니, 불붙은 여인이라고 해야 하나? 불로 빚어진 여인인가? 뭐가 됐든 생판 처음 보는 모습이었음에도 그 존재가 누구인지 짐작하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불의 정령님?"

[직접 마주하는 건 처음이구나.]

가까스로 인간의 형상을 취하고 있는 것에 가까운 불이 웃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겨울과는 동 떨어진 분위기의 숲속이 나를 반겼다. 겨울에 결코 필 수 없는 꽃들이 불길과 함께 춤추고, 불로 된 동물들이 그 사이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니 사실 겨울뿐만 아니라 현실과도 동 떨어져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내 머리를 받치고 있는 게 정령님의 무릎 베개라는 것을 깨닫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정령님의 손이 내 어깨를 가볍게 붙잡아 움직임을 막았다.

[아직 일어나면 안 된다. 네 마력이 안정을 취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니.]

딱히 강압적이진 않았지만 언제나 도움만 주는 분의 말을 거부할 이유도 없어서 곱게 드러눕자 정령님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실질적인 첫 대면이었으나 어색하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내가 그렇게 기도하고 감사하고 도움받는 분들 중 한 분이었으니까. 오히려 정겨울 정도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멀뚱히 누워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난 그대로 주변을 둘러보며 질문했다.

"여기는 어딘가요? 정령계인가요?"

[흠, 너희 인간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령계를 흉내낸 심상 세계라고 할 수 있겠구나.]

"오...그럼 제가 왜 여기 있는 걸까요?"

[네 마력을 흡수하기에 이게 가장 효율이 좋기 때문이지.]

잘못 들으면 널 잡아먹는 중이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는 발언같았지만 그녀가 무슨 의미로 해준 대답인지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좀 많이 멋대로 쓰긴 했지.

"위험했나요?"

[글쎄. 모르겠구나. 그저 우리의 오랜 기억으론 그다지 좋지 않을 것이다라고 여겼기에 취한 행동이었다. 어쩌면 이로운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길을 막아 버린 것일지도 모르지. 아쉽니?]

"즈언혀요. 이게 치유 과정이라는 사실에 감사할 뿐입니다."

마지막 기억의 순간까지 진짜 더럽게 아팠는데 지금은 아픈 걸 모르겠다. 부탁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해준 분한테 역정을 낼 생각을 할 리가 있나. 도둑놈도 그런 도둑놈이 없지.

그래서 그냥 지금 이 상황을 즐기기로 마음먹으며 편한 자세로 눈을 감았다. 걱정한다고 빨리 일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닌 거 같으니 이러다가 졸리면 잠이나 더 잘 생각이었다.

[너는 역시 재밌구나. 왜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인지, 직접적으로 돕지 않은 것인지 안 궁금하니?]

그러자 이번엔 정령님이 먼저 질문했다. 도움은 충분히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덕분에 궁금한 게 하나 떠올랐다.

"하나 궁금하긴 합니다. 지금의 원활한 대화는 어떻게 가능한 건가요?"

정령님들과의 의사 소통은 굉장히 단편적이었다. 이거, 저거, 가능, 불가능, 약초, 적 등등 굉장히 짧은 단어들로 이루어지는 게 전부. 그마저도 텔레파시처럼 머리로 전달받는 거에 가까워서 일상적인 회화와는 매우 거리가 멀었다.

근데 지금은 아니네?

[후후, 그것부터 궁금해 할 거라고는 또 생각 못했으나 이유는 단순하다. 네 마력으로 힘을 얻는 거지.]

"정령님이 저로 인해 힘을 얻는다구요?"

[정확하게는 현신을 위한 힘을 얻는 거란다. 악마들을 상대해봤으니 무슨 이야기인지 감이 오지 않니?]

"아."

정령님들도 결국은 다른 공간에 있는 거라 우리의 세계에 넘어와 힘을 발휘하기 위한 조건은 비슷한 거로군. 정령님은 내 반응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시고는 주변을 둘러보셨다.

[이런 게 가능할 정도로 이번에 네가 흩뿌린 마력이 컸다는 의미지. 실로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뭔가 눈이 뜨이는 듯하면서 감이 안 온 터라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쉬웠습니다. 분명 현실에서 정신을 차린다고 하더라도 흉내조차 못내겠죠."

라이카에게 넘긴 마력이 예상보다 컸고, 그로 인해 이상증상을 겪어서 나온 우연의 부산물에 가깝겠지. 내심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고 있었더니 정령님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조바심 내지 말거라 아이야. 지니지 못한 잠재력은 끌어낼 수도 없는 법이니, 너는 분명 머지않아 그 힘을 자연스럽게 다룰 것이다.]

그런 구조인가...? 뭐, 오래 산 분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덕분에 자신감이 좀 생겼다.

"반가운 정보네요. 그보다 제가 다시 눈 떴을 때 멀쩡하게 움직일 수 있을까요? 아직 할 일이 남았는데."

[왜 그런 질문을 하니?]

"어... 기절하기 전엔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힘들었으니까요?"

[아하.]

마치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정령님의 대답은 조금 충격적이었다.

[네 몸은 아무런 문제도 없다.]

"...예?"

[다치지도 않았고, 몸 안의 어디가 상하지도 않았지. 오히려 매우 건강하다.]

"어, 정령님이 고쳐주셔서요?"

[아니, 처음부터 그랬다. 네가 느꼈던 그 모든 감각은 과도하게 흘러 넘친 마력으로 육신이 혼란을 일으킨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 원인이 되는 마력을 이렇게 겸사겸사 우리가 흡수하고 있는 거지.

태연하게 대답하며 웃는 정령님과 달리 여유롭던 내 머릿속은 조금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왜 멀쩡하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