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26화 (326/412)

내 표정을 읽은 정령님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표정을 읽을 수는 없어도 그게 의문을 표하는 제스처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네게서 탐탁지 않은 기색이 느껴지는구나. 육신의 안전을 걱정했으면서 오히려 아무렇지 않다는 사실에 불편하는 이유가 무엇이니?]

역시 말이 통해도 정령의 감각이라는 것일까. 적절한 대답이 무엇일지 잠깐 고민한 나는 최대한 단순하게 설명했다.

"몸이 멀쩡한 건 좋은 일이지만...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력을 과도하게 사용할 때마다 몸의 한계를 느꼈다고 생각했거든요. 지금 제가 느끼는 건 그러니까... 미지에서 오는 두려움 같은 거죠."

'마력을 쓰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수명을 대가로 하고 있기 때문에 몸이 멀쩡한 거였습니다.' 같은 거면 정말 좋지 않다. 난 이번 생마저 단명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음... 그렇군. 너희들은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아가니, 미지의 영역이 가져오는 불안 요소와 위협을 걱정하는 것이로구나.]

"정확합니다. 그게 비록 나중의 일이라 할지라도 말이죠."

정령님은 한동안 침묵하며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사방이 타오르는 숲속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잠시 기다리니 이내 정령님의 손가락이 내 심장 쪽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혹시 네가 느꼈던 '육신의 한계' 가... 이런 느낌인가?]

어어어?!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걸 직접 느끼는 건 좀...?

"어라."

순간 오크와 싸울 때 느꼈던 대환장 파티가 생각이 나서 움찔거렸는데, 느껴지는 것은 평소에 몸에 담긴 마력을 과도하게 소모했을 때의 감각이었다.

"어, 예. 이 느낌이 맞습니다."

[이건 그냥 네 몸에 있는 마력이 비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일 뿐이잖니. 오크와 싸울 때처럼 채워 넣으면 될 일인데?]

"...예?"

아니 이게 뭔 소리야? 이 온몸이 뻐근하고 호흡조차 곤란해지는 감각이 그냥 마력의 고갈을 의미하는 거라고? 내 얼굴에서 의아함을 넘어서는 경악을 느낀 것인지 정령님의 고개가 다시 한번 기울어졌다.

[애초에 너는......에...]

아 잠깐.

진짜 잠깐만. 이건 아니지, 이건 진짜 아니지!!

아 진짜 지랄하지 말고! 아!!

방금 전까지만 해도 뚜렷하게 느껴졌던 감각들이 사라지며 정령님의 목소리가 안 들리기 시작한다. 똑바로 떠져 있던 눈이 억지로 감기려고 하고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후에...마력......]

그런 내 이마에 손을 올린, 여전히 표정을 읽을 수는 없는 이글거리는 불은 어째서인지 온화하게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내가 어떤 상태인지 이해한다는 듯이.

근데 그건 정령님 사정이고 당연히 나는 조금도 웃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외쳤다.

"아니 진짜 이건 아니죠 정령니므끄으어억!"

"끄아아악!"

그리고 현실에서 누군가와 거하게 박치기를 하며 깨어났다. 덕분에 정신은 번쩍 들었지만 머릿속에서는 이 상황을 두고 욕하기 바빴다.

악랄해도 너무 악랄하다. 어떻게 그 타이밍이 이딴 식으로 끊기냐고!!

하지만 그런 억울함과 이마에서부터 느껴지는 격통에 나뒹굴 틈도 없이 옆에 있던 아실리에가 휘둥그레진 눈을 한 채 연신 내 얼굴을 만지기 시작했다.

"에, 엘디!? 정신이 들어!? 괜찮은 거야?"

"...응. 나 괜찮아 누나."

대체 며칠을 제대로 못 잔 건지 수척해진 채 어깨까지 귀가 떨어진 아실리에를 보니 억울함과 화가 흐지부지 되어 버렸다. 그렇게 수 차례 더 내 안색을 확인한 아실리에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고, 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녀를 안아 달래줘야 했다.

"그런데 대체 나 누구랑 부딪친..."

주변이 어딘지 확인할 틈도 없이 일단 안타까운 사고에 휘말인 이에게 사과하려고 고개를 돌리니,

"...이런."

눈을 까뒤집고 뒤로 자빠진 채 기절한 세네란이 있었다.

처음엔 너무 세게 부딪쳐서 내 이마가 걱정이었는데, 남 걱정부터 해야 할 때였다.

다행히 세네란은 금방 정신을 차렸다. 이마에 비록 볼록 튀어나온 혹을 가진 상태였지만 그녀는 그런 것보다 내가 깨어났다는 사실이 더 중요해 보였다.

"강 속에서 물장난을 치는 기분으로 마력을 썼다고?! 어땠어!? 어떤 감각인데!?"

처음엔 내 몸 어디에 문제라도 생기지 않았나 면밀히 확인한 그녀였지만 이내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고 내 발언이 더 해지자 매드 사이언티스트 같은 본성을 보이며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솔직히 정령님께 의도치 않은 절단마공을 당한 탓에 기운이 빠진 상태라 대충하고 싶었지만 이야기를 들어 보니 내 상태에 대해 전해 듣자마자 모든 걸 제쳐두고 달려왔다고 해서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녀의 연구욕을 채워 줄 만한 증언을 어느 정도 마친 뒤에야 아실리에와 평범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

"몸은 좀 어때? 삼일을 내리 잤는데 어디 불편하지는 않아?"

미친 씨발 세상에. 삼일? 배도 안 고프고 몸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더럽게 놀랐지만 일단은 내색하지 않고 아실리에부터 안심시키기로 했다.

"오히려 개운해. 몸도 아무 이상 없고. 그런데..."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깨어났다'는 느낌이 없다. 아마 나는 정령님의 무릎베개를 받으며 눈 떴던 그때 정신을 차린 상태였던 모양이다. 달라진 건 육체와 분리된 상태냐, 아니냐일 뿐. 덕분에 삼일 만에 일어났음에도 맑은 정신으로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일단 삼일이나 지났음에도 마을이 아니고, 우리 텐트도 아니다.

내가 있는 곳은 흔히 이세계의 군대에서 지휘관 개인 숙소로 쓰일 수준의 큼직한 텐트였다. 내부에서 모닥불을 피울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공간에는 대체 어디서 가져 왔는지 알 수 없는 편의를 위한 도구와 옷장, 마석 난로가 있었다. 당연히 저것도 우리 장비가 아니다. 심지어 내가 눈을 뜬 침대는 야전 침대도 아니고 귀족들이 원정을 나갈 때 챙길법한 조립식 침대였고 바닥에는 카펫까지 깔려 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누가 봐도 귀빈 대우를 받고 있는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져서 아실리에를 바라보니 여전히 내 이마에 손을 얹거나 몸을 만져 보는 등 상태를 확인하던 아실리에가 대답해주었다.

"음, 좀 많은 일이 있었지. 엘디가 오크를 막은 뒤 수도에서 본격적인 지원이 오고, 오크들과 대대적으로 싸우는 과정에서 전선이 생기고, 그 와중에 엘디의 상태를 알 수 없으니 섣불리 움직일 수 없어서 이렇게 대우받고..."

"잠깐 누나, 전선? 아직도 오크들을 토벌 못한 거야?"

아무리 그래도 병력 지원까지 왔으면 진즉에 다 조져놔야 정상인데? 아예 내 눈꺼풀까지 들어서 눈의 실핏줄까지 확인하기 시작하던 아실리에는 정말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신한 것인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맞아. 숫자도 숫자지만... 저 오크들이 일반적인 오크들이 아니었어."

내 삶이 워낙 스펙타클하니 이제는 뭘 들어도 별로 놀랍지도 않을 거라 여겼는데, 일반적인 오크가 아니었다는 기상천외한 대답은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저 이족보행 돼지들이 일반적이지 않아봤자 이족보행 멧돼지인 게 고작인 거 아닌가...?

"서부 왕국 지대 너머에 있는 대초원은 엘디도 알지?"

"알지. 오크들이 유독 많이 있는 곳이잖아. 왕국 날려 먹은 오크들의 대확장 전쟁도 거기서 나온 작품이고."

거기 오크들이라는 말인가? 대체 무슨 게이트가 뚫렸길레 진짜로 그 먼 거리를 무시하고 여기까지 날아올 수 있었는지는 매우 궁금했으나 여전히 그래 봤자 오크는 오크라는 인식이 강했다.

"지금 거기에서 또 한 번 오크들을 통합하고 있던 게 저들이야. 초원의 악몽 카쿨라의 부족. 수천의 오크들을 거느리고 있다 알려져 있지."

그리고 아실리에의 대답을 듣고 그 인식을 접어두기로 했다. 그러네, 일반적이진 않네.

"이런 씨발 대체 서부 왕국 지대는 뭘 하고 있길래..."

오크들뿐만 아니라 놈들을 견제해야 하는 서부 5 왕국들조차 말이지.

내가 국가 차별주의자는 아니지만 서부 왕국 지대에 있는 놈들은 대가리에 많은 문제가 있거나 범국가적 저능아들의 나라임이 분명하다. 수천의 오크가 규합되는 꼴을 눈 뜨고 방생했다고? 이미 과거에 세 개의 왕국을 날려 먹은 기념비적인 땅덩어리에서?

이 씨발 완전 하급 모험가 같은 새끼들 아니야?

눈 뜨자마자 혈압으로 다시 쓰러질 것만 같은 와중에, 나는 아실리에가 내뱉은 이름이 뭔가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깐. 카쿨라?"

"응. 왜?"

"...으음, 아무것도 아니야."

분명 첫 정찰 때 죽인 놈 이름이 카쿨라 바솨였다. 그 대족장이라는 놈의 자식이었던 것일까? 어째 놈의 죽음을 기준으로 오크들의 움직임이 달라진 기분인데 지 자식 죽었다고 지랄하는 건가?

에이, 설마. 그럴 거면 정찰을 내보내질 말았어야지. 그렇게까지 병신같은 이유로 이 사달이 난 건 아닐 것이다.

"아무튼, 카쿨라는 예전부터 유명한 오크였어. 내가 아직 고향에 있을 때부터 이름이 들려왔었거든. 그땐 머리 수집가로 불리웠는데 지금은 아예 대족장 카쿨라로 불리더라고."

대족장 카쿨라.

주술사이자 전사로, 오크치고 굉장히 장수한 놈이라는 게 아실리에의 부가 설명이었다. 심지어 오크들 중에서 그나마 똑똑한 편에 속하는 주술사 태생인지라 머리도 좋다는데... 어디까지나 오크 기준이라니 그다지 걱정되는 내용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 새끼가 오크답지 않게 주술사로 족장을 꿰찬 놈인지라 주술사에 대한 복지가 나쁘지 않은 편이라는 점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수천이 있든 수만이 있든 비룡 기사가 편대로 날아서 폭격을 떨구면 싹 다 박멸되어야 하는 오크 놈들에게 견제 수단이 생긴 거니까. 심지어 기병까지 운용하고 있으니 그놈들이 사방팔방 퍼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비룡 기사들은 전선 외곽으로 돌리기 바쁘다고 한다.

당연히 왕실 입장에서도 본격적으로 손을 쓰고 싶지만... 오크들이 게이트를 통해 서부에서부터 넘어왔다는 게 또 문제다.

이미 마족들이 게이트로 수작질을 부린 전적이 있다 보니 수도를 노리기 위한 함정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카데미 생도라던가 다른 지방 영주들의 사병, 수도에 거주중인 귀족들의 사병을 다 동원하고 있음에도 정규군과 진짜 정예들은 움직일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였다.

타당한 판단이었다. 당장 나조차도 마족들이 뿌린 미끼가 아닐까 싶을 정도니까.

"눈 뜨자마자 상황 참 잘 돌아가는군."

침대를 벗어나 다시 내 장비를 갖춰 입은 뒤 검을 챙겨 들었다. 거기까지 사람들이 움직였다고 하니 내가 묵고 있는 텐트의 정체도 어렴풋이 짐작은 됐다. 오크 기병들을 틀어막은 공이 있으니 대우해준 거겠지.

덕분에 잘 쉬고 일어난 거 같긴 하니 다시 밥값을 할 때였다.

"그, 엘디? 일단 비스퀜테라는 분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어때?"

"그럴 시간이 어딨어. 초원이랑 연결된 게 확실하면 그 게이트가 열려 있는 이상 거기 있는 오크 놈들이 계속 이쪽으로 넘어온다는 말이잖아."

세상에서 가장 좆 같은 것 중 하나를 꼽으라면 남이 싼 똥 치우기일 것이다. 일면식조차 없는 서부 왕국 지대의 개새끼들이 싸지른 똥을 여기서 다 감당해야 하는 상황은 내 쪽에서 사절이었다.

"몸도 만전이고, 뭔가 갈피도 잡았으니 나도 빨리 합류해서 도와야지. 이렇게까지 움직였으면 아는 얼굴도 좀 왔을 텐데."

"그렇긴... 한데... 나가면 좀 힘들 텐데..."

"에이, 멀쩡하다니까."

묘한 표정으로 만류하려는 아실리에와 내 증언을 기록한 메모를 들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세네란을 뒤로한 채 텐트의 입구 천막을 걷어 밖으로 나가자, 영락없는 군사 주둔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식사하는 사람들, 정비하는 사람들 등등 정말 여기가 오크 기병들과 싸웠던 임시 숙영지가 맞나 싶을 정도다.

하지만 그런 감상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윽, 씨발 역겨워. 군대 두 번 온 기분이야."

그 모습이 심히 전생의 군대를 떠올린다는 점이 중요했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리며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하는데 어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점점 내게로 쏠리기 시작했다.

"...엘드미아다."

"에, 엘드미아가 깨어났다."

근데 그 반응이 뭔가 심상치 않았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반응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더니 한 두놈으로 끝나지 않고 숙영지 전체로 퍼져나갔다.

"엘드미아가 깨어났다!!"

"오크 학살자가 드디어 눈을 떴어!"

"비스퀜테 경을 불러! 엘드미아가 깨어났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환호성으로 이어졌다.

"아, 씨발."

아무래도 사룡 토벌에 또 다른 명예 타이틀 하나를 빼도박도 못하게 주워 버린 것 같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