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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27화 (327/412)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대놓고 떠받들기 바쁜 상황은 전생과 현생을 통 틀어서 처음 겪어 봤지만 그다지 유쾌한 경험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거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하나는 저들이 진심으로 이 상황에 열광한다는 점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아직도 오크들이랑 치고받고 싸우는 와중에 저러고 있다는 현실 때문이었다.

우상화와 덧없는 희망 심기라는 왕실이 딱 좋아할 만한 여건들을 알아서 갖추며 기뻐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 하니 벌써부터 두통이 밀려오는 기분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몇 놈들만 하더라도 마치 내가 이 상황을 타개해 줄 것처럼 희망찬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성질 같아서는 가서 뒤통수를 후려주고 싶을 지경이다.

그래도 내가 잠든 사이 대대적으로 명성작을 시도한 건 아닌 모양인지 열성적인 반응을 보이는 놈들 사이로 대체 뭔 일인가 싶은 반응을 보이는 녀석들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 희망을 가지고 환호성을 지르는 녀석들을 잘 살펴보니 대부분이 마을 호위로 고용되었던 모험가 녀석들이다.

그러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지. 난 환호성을 지르는 놈들에게 흙을 걷어차며 외쳤다.

"에라이 새끼들아, 그럴 시간에 가서 오크라도 한 마리 더 잡아!!"

"으악! 퉷퉷!"

일갈하는 것만으로 흥이 올랐던 분위기를 파토낼 수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이미 눈이 뒤집힌 놈들은 졸지에 흙을 퍼 먹게 됐으면서도 좋다고 실실 거렸다. 그만큼 피해가 적었다는 이야기인 거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영 꼴보기 싫은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에가 경! 움직여도 괜찮으신 겁니까?!"

계속 머저리들에게 흙을 걷어차 주고 싶었지만 순식간에 달려온 비스퀜테 때문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발길질을 멈춰야 했다.

"다행히 움직이는데 아무런 불편함도 없습니다. 혹시 정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지휘소로 함께 가시죠. 그나저나 사흘을 누워 계셨는데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그럼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오기를 부리지는 않습니다."

오기를 부려서 해결될 일이라면 시도라도 하겠지만 그런 형편 좋은 일은 얼마 없는 법이다. 비스퀜테의 안내를 받아 지휘소까지 가는 동안에도 뒤에서는 환호성이 끊이지 않았지만 정작 그는 그런 모험가들의 반응이 당연하다는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거 저대로 내버려 둬도 되는 겁니까?"

"하하하, 영웅적인 행보에 열광하는 걸 뭐라 할 수는 없죠. 눈치채셨을지 모르겠지만 저들 대부분은 마을 호위에 고용되었던 이들입니다. 딱히 사기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닌데 죽을 뻔한 위기에서 구해 준 이에게 환호조차 못하게 하는 건 조금 눈치가 좀 보여서요."

으으윽. 정론이라서 할 말이 없군. 내가 똥 씹은 표정으로 침묵하자 비스퀜테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아실리에 님께 어느 정도 전해 들으셨겠지만 상황이 저희의 예상을 훨씬 벗어난 상태입니다. 이번 사건의 결정권은 완전히 왕실로 넘어갔으며, 지휘관도 헤이리 경에서 다른 분으로 바뀌었죠. 비룡 기사분들은 적의 본진을 타격하기보다 주변으로 확산되어가는 오크들의 세력을 대대적으로 소탕하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오크들이 계속 충원된다는 말씀입니까?"

"다행히 그 정도는 아닙니다. 일종의 몰이 사냥을 하다보니 매우 바쁠 뿐입니다"

덤덤히 대답하는 비스퀜테에게서 불안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게 이 상황을 왕실에서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전장에서 싸우는 기사의 마음가짐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예상되는 적의 병력만 수천이고, 수도와 달리 인근의 도시들은 아예 도시 병력까지 차출해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상대가 오크라 다행이지 만약 이게 마족들의 군대였다면 정말 끔찍한 피해를 입을 뻔 했습니다."

최악을 상정하며 현재 상황에 웃을 수 있는 걸 보면 참 난놈은 난놈이었다. 그런 그에게 내심 감탄하며 도착한 곳은 전장과 어울리지 않게 굉장히 호화스럽기 그지없는 대형 텐트였다. 내가 비록 군대의 지휘부를 본 적은 없지만 아무리 이곳이 판타지 세계라 하더라도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화려하다.

그 앞에 경비를 서고 있는 인물조차 일반 병사가 아니라 한 명의 기사였기에 나는 지휘소와 거리가 있을 때 미리 허심탄회한 감상을 입에 담기로 했다.

"굉장히 높은 분이 와 계신 것 같은 지휘소로군요."

"귀족원의 사자께서 직접 행차하셨으니까요."

"...귀족원의 사자요?"

거기에서 사자라고 불릴 만한 사람은 레스롬 공작 정도 일 거 같은데? 설마 그 영감이 여기까지 나올 리가...

"아, 귀족들의 이명에 대해서는 잘 모르실 수 있겠군요. 귀족원의 수장이신 레스롬 즈라실 츠신 라위네라 공작 각하를 말하는 겁니다."

...있네.

왜 있지?

순간 표정 관리가 안 됐지만 다행스럽게도 비스퀜테는 앞장서서 경비를 서고 있던 기사에게 방문을 알리느라 내 떨떠름한 표정을 보지 못했다. 그냥 이대로 모르는 척하고 몸을 돌려 돌아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지만 금방 이야기를 마친 비스퀜테가 텐트의 입구를 걷어내며 내게 손짓한 터라 그럴 수도 없었다.

"하아아... 귀찮은 냄새가 난다."

뭐라고 비유해야 할까.

안 그래도 처리할 생각이었던 일에 손을 뻗으려고 하자마자 누군가 그 일 좀 처리해 달라고 부탁한 탓에 급격히 하기 싫어지는 느낌이다. 그래도 이대로 물러나면 유쾌한 이야기꾼이자 몇 없는 개념귀족 비스퀜테가 난처해질 것이기에 어쩔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이런, 어서 들어오게나.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구먼. 차 한 잔 하겠나?"

안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화려한 외부와 달리 참으로 실용적이고 심플한 도구와 가구들로 구성된 지휘소 안에서 레스롬 공작이 얼굴 가득 드리웠던 피로를 걷어내며 친근하게 나를 맞이해 주었다. 그 태도는 종종 귀족원을 찾아갔을 때와 다를 바 없었지만, 문제는 지금 그가 지휘소에 혼자 있는 게 아니라 사병을 이끌고 온 다른 귀족들과 함께 모여 앉아 이야기인지 회의인지를 진행 중이었다는 점이다.

덕분에 그와 한창 회의를 진행하던 귀족들의 여유롭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움직였다. 대체 어떤 경우 없는 놈이 귀족들의 회의에 끼어들어서 분위기를 흐리냐는 뉘앙스의, 굉장히 짜증나고 불만이 가득한 아니꼬운 시선으로 바뀐 채.

그 좆같은 시선에 비스퀜테는 조금 당황하며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고 말았다.

"누...읍!"

"흐읍!"

그러자 내게 금방이라도 불만을 쏟아 낼 것처럼 고개를 돌리던 이들이 기겁을 하며 빠른 속도로 시선을 원 위치 시켰다. 뭐지? 아무리 나라고 해도 눈깔 좀 똑바로 안 떴다는 이유로 귀족한테 칼을 뽑지는 않는데.

혹시 뭐라도 찔리는 게 있는 놈들이신가?

"마침 오크 토벌과 관련하여 구체적인 계획을 구상하는 중이었네. 이리 와서 앉지."

그러거나 말거나 레스롬 공작이 묘하게 장난기가 느껴지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자리를 권하자, 이에 목이 부러질 기세로 고개를 원 위치 시킨 이들 중 한 명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가, 각하! 아무리 그가 공을 세웠다 한들 어찌 전략과 전술을 구상해야 하는 지휘관들이 모인 자리에 일개 평민을..."

흐으으음.

보편적인 귀족의 선민의식을 지녔고, 격에 맞지 않는 상황에 불만을 지니면서도 그런 결정을 내린 레스롬 공작 비난하는 게 아니라 하소연 한다라. 잠깐 둘러보니 앉아 있는 이들 모두 비슷한 반응을 보이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 전부 귀족인 건 맞는 거 같지만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감이 오질 않아 입 닥치고 있었더니 레스롬 공작이 의연한 태도로 귀족의 반발에 답변했다.

"대체로 맞는 말이지만, 일개 평민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게나. 왕국을 위해 큰 공을 세운 이를 어찌 일개 평민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게다가 자네들도 이미 알다시피 엘드미아는 이번에 홀로 오크 기병대를 반파시키다시피 했다네. 이전에는 반역자 엔벨데의 저택에 단신으로 들어가 그의 목을 베어내기도 했지. 비록 혼자라고 한들 그 능력은 군대의 전력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으니, 1인 군대라고 생각하면 그 자신이 군대이자 지휘관으로서 이 회의에 참여할 자격이 충분하지 않겠는가?"

자기가 말해 놓고 마치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듯 허허 웃어 보이는 레스롬 공작의 태도에 불만을 제기하던 귀족들은 자기들끼리 어색하게 눈치를 보며 따라 웃었다.

그런 귀족들에게 자연스럽게 시선을 뿌리던 레스롬 공작이 나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겼을 때, 나는 저 능구렁이 영감의 의도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거, 아무래도 오크들을 이용해서 추가 물갈이에 들어갈 요량으로 고문관들을 추려온 모양이다.

그렇다면 조금 거들어줄 의향이 있지. 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예법에 맞춰 허리를 살짝 숙인 채 입을 열었다.

"일개 몬스터에 불과한 오크들을 상대로 승리했을 뿐입니다. 그러한 표현은 과분하니 부디 거두어 주시지요."

옆에서 비스퀜테가 움찔거리고 귀족들이 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이 레스롬 공작의 미소가 더욱 짙어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하여간 속이 시커먼 영감같으니.

"허허. 과분하다니, 겸양하지 말게. 홀로 수십 마리의 오크들을 군대가 휩쓴 것처럼 도륙냈으니 충분히 훌륭한 위업 아니겠는가."

"그 결과 사흘을 앓아 누워야 했습니다. 만용이 일궈낸 우연의 일치에 불과하죠. 이곳에 계신 귀족 분들 중 한 분만 검을 뽑아 들어 자신의 군대를 움직이셔도 능히 열 배, 스무 배가 넘는 오크들에게 죽음과 절망을 선사한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귀환하실 텐데 어찌 이런 것을 위업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내 대답에 순간 귀족들이 움찔거리고 레스롬 공작이 두 눈을 빛낸다. 체면과 명예라면 죽고 못사는 이들을 위해 떡밥은 던져 줬으니 남은 건 레스롬 공작의 말빨에 달린 일이었다.

당연히 레스롬 공작의 말빨은 끝내줬다. 그가 귀족들을 구워삶은 끝에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오크 대군을 향해 돌격하게 만드는 데에는 10분도 걸리지 않았고, 나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기묘한 표정을 하고 지휘소를 나가는 이들을 뒤로한 채 레스롬 공작과 독대하게 되었다.

"그래, 뭘 어떻게 하고 싶나?"

둘만 남기가 무섭게 거두절미하고 태연하면서도 친근한 태도로 결코 가볍지 않은 화두를 던지는 그는 역시 능구렁이 영감이었다. 솔직히 서로가 서로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을 거 같았지만 시간이 촉박했기에 그대로 어울리기로 했다.

"비룡 조종사 좀 빌리고 싶습니다."

"기에스 라고 했던가? 그 친구가 숙영지 내에 대기하고 있으니 데려가게. 그 외엔?"

"비룡 기사들도 잠깐 빌리고 싶습니다."

단순 조종사까지는 쿨하게 대답한 그였지만 비룡 기사에서는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내가 뭘 하려고 하는지도 모르면서 안 된다는 말이 안 나오는 건 좀 의외였다.

"...끄응, 대체 무엇을 하려고?"

결국 비룡 기사만큼은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넌지시 암시하며 되물어보는 레스롬 공작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소심해 보여서, 나는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제 방식으로 게이트 좀 닫으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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