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어먹을 오크 놈에게 짓눌려 속터진 찐빵이 될 뻔한 상황을 가까스로 피하고 안도할 틈도 없이 익숙하지 않은 풀 내음 속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여전히 쉬이 빠지지 않는 검을 아예 더욱 깊게 찔러 놈의 어깨를 바닥에 고정시킨 뒤 녀석이 쥐고 있던 도끼를 빼앗기 위해 손을 뻗었다.
"뀌...익!"
물론 저항이 있었으나 뇌진탕 앞에서는 아무리 오크라 하더라도 평등한 법이었다. 어쭙잖게 아귀에 힘을 줘서 버텨보려고 하지만 어림도 없지. 아무리 무식하게 힘이 세다고 해도 어깨 깊숙이 칼빵 맞고 정신이 없는 놈인데 내가 질 리 없잖아?
"꺼져. 이 도끼는 이제 내꺼야."
그대로 한쪽 발로는 놈의 손을 지르밟고 나머지로는 머리통을 걷어차며 도끼를 뺏었다. 온 힘과 마력을 담아 때렸음에도 아직 놈의 두개골이 멀쩡한 건 좀 충격이었지만, 그건 이놈이 특이 케이스같으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묵직하지만... 밸런스가 예술이네."
긴 씨가 사용하는 배틀 액스만큼 큼직한 날에 예카트리나의 워 해머보다는 아주 살짝 짧은 손잡이, 나쁘지 않은 무게감. 이거라면 나도 꽤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을 것 같다.
계획에서 조금 많이 어긋난 감이 있지만 이 정도면 괜찮은 수확이지. 난 경악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오크들이 다가오기 전에 족장의 목을 칠 생각으로 있는 힘껏 도끼를 휘둘렀다. 괜히 시간 끌다가 이도 저도 아니게 되어 버리는 클리셰를 피하고자 굉장히 신속하게 취한 행동이었지만, 바닥을 기고 있는 와중에도 놈은 재빠르게 반응했다.
무려 지 어깨에 박힌 내 검을 비틀어 도끼를 막아 낸 것이다! 검을 뽑을 틈이 없었기에 당연히 놈의 어깨가 작살이 나다시피 했지만 목은 날아가지 않았다. 저게 마음먹었다고 해서 쉽게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닐 텐데 정말 질리는 녀석이다.
"뀌이익!"
목이 날아갈 뻔한 위험은 겨우 피했어도 막는 방법 자체가 더럽게 무식했기에 놈의 입에서는 고통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오크라도 한들 충분히 기절하고도 남을 고통이었을 거 같은데, 놈은 오히려 두 눈을 투지로 불태우며 주술을 시전했고, 난 내 발을 붙잡으려는 불쾌한 꿈틀이를 피하기 위해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와 미친 세상에, 넌 진짜 록타르 오가르를 외칠 자격이 있는 찐 오크다."
저 정도는 해야 대족장 해 먹는 건가? 역시 게이트만 닫는 게 아니라 무조건 저놈도 죽여놔야 안전할 거 같다.
그러기 위해 이번에는 내 검을 피해 골프 치듯이 아래에서부터 목을 날리려 했으나, 애석하게도 방금 전에 놈이지른 비명을 듣고 정신을 차린 오크들이 조금 더 빨랐다.
"뀌이이익!!"
돼지 멱 따는 소리에 이어 뭔가 외치긴 했는데 공용어가 아닌 오크어라서 알아먹진 못했다. 대충 족장을 구하라는 말이겠지. 안 그래도 거리가 그리 있지도 않은 편인데 외침보다 행동이 더 빨랐기에 일단 카쿨라에게 다시 달려들기 전에 놈들부터 상대해야 했다.
"옘병."
설마 이걸 노리고 공격 주술이 아니라 속박 주술을 시전한 건가 싶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놈의 반응을 보아하니 거기까지 생각하고 취한 행동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달려오는 오크 기병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기에 난 익숙하지 않은 도끼를 고쳐잡으며 바늘을 날렸다.
바늘 한 개까지는 치고 받고 싸우면서 어느 정도 쓸 수 있지만 다발로 쏠 때는 이야기가 달랐기에, 최대한 서둘러 오크들의 돌격을 파훼하고 카쿨라의 머리를 따야 했다.
노리는 것은 오크가 아니라 놈들이 타고 있는 마수. 일부는 반응조차 할 수 없게, 일부는 아슬아슬하게 반응할 수준으로 전탄 사출을 시도하자 예상한 그대로의 광경이 펼쳐졌다.
이미 알고 있던 대로 기수보다 제 몸을 우선시 하는 마수들은 바늘을 피하기 위해 오크들을 떨구다가 서로 부딪치거나 시체에 눌리는 둥 개 난장판을 자아냈다. 덕분에 겨우 두 차례 바늘들이 오고 갔을 뿐이지만 오크들의 돌진은 완전히 실패했다.
이제 진짜로 카쿨라의 목을 따기 위해 몸을 돌리니, 이 트루 오크 새끼가 어깨에서 피를 죽죽 쏟아 내면서도 내 검을 쥔 채 서 있었다. 오크의 표정을 알아볼 수 없어도 더럽게 힘들어 보이는데 자세는 꼿꼿한 게 참으로 위풍당당하다.
"크흐흐, 오늘 저녁은 하늘의 대초원에서 먹겠군."
이 새끼는 아까부터 사람 힘들게 해 놓고 지는 즐거운 생각, 처먹을 생각만 하네.
"거기 가서 처먹기 전에 저 게이트 너머의 돼지 새끼들 좀 물리고 가면 안 되겠냐?"
"하!"
좆까라는 말을 짧은 웃음소리로 대신한 놈이 내게 달려들었다. 평범한 롱소드 같은 거였으면 제대로 쥐지도 못했을 텐데 크기가 좀 있다 보니 놈이 들고 있어도 폼이 나쁘지 않았다. 검술 따위 개나 줘버리는 형태지만 여전히 제힘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는 움직임이다. 어쩌면 한쪽 어깨가 작살났으니 이 도끼보다 내 검을 든 지금이 놈에게는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르겠다.
그게 평범한 검이었다면 말이지.
"근데 그것도 내 검이야 이 새끼야."
사출한 바늘들을 죄다 회수함과 동시에 검에 마력을 연결하자 예전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 왔다. 전생을 통 틀어서 낚시엔 취미가 없었지만 입질이라는 게 아마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뀌익?"
놈도 제 손에서 검이 제멋대로 움직이려는 조짐을 느꼈는지 내게 달려오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검에 시선이 쏠렸다. 그리고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들어 도끼를 휘둘렀다.
"오크치고는 더럽게 잘 싸웠다."
그게 놈의 마지막이었다. 바늘을 쓸 때처럼 검을 회전 시키며 아무렇게나 사출시키자 그대로 놈의 손아귀를 찢으며 어딘가로 튀어 날아간다. 동시에 카쿨라의 미간 위로 내 도끼가 일직선으로 휘둘러졌다.
제 손에서 튀겨 날아오는 핏방울을 따라 시선을 돌리던 카쿨라가 나와 도끼를 확인했을 때에는 이미 주먹 하나 정도의 간격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오크의 얼굴 표정을 알아보는 능력은 없다고 여겼지만, 그 순간 카쿨라는 짧게 웃는 것처럼 보였다.
-쾅!
온 힘을 다해 시도한 내려찍기는 도끼로 하여금 놈의 두개골을 반으로 쪼개고 바닥까지 틀어박히게 만들었다.
부활의 주문 해치웠나를 외친다 하더라도 절대 살아날 수 없음이 확실한 그 몰골을 보고 나서야 바짝 긴장했던 신경이 조금은 이완되기 시작했다.
"비책이 있어서 웃은 게 아니라, 델트같은 놈이었군."
자기들이 믿는 오크들의 발할라 때문에 웃을 수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냥 당했다는 의미의 웃음이었던 걸까.
오크 주제에 건방지긴 했지만, 솔직히 어지간한 사람 새끼들보다 나았다.
"뀌이이익!!!"
한 템포 늦게 오크들이 카쿨라의 죽음에 반응했다. 그딴 거에 일일이 반응해 줄 상황은 아니었기에 난 놈들을 뒤로한 채 카쿨라의 시체 너머에 있는 게이트로 향했다.
카쿨라의 시체를 챙긴다면 나중에 오크 토벌이 끝난 뒤 추가 보상이라도 받았을지 모르겠으나, 저 거대한 시체를 들고 갈 방법도 없고 여유도 없었기에 깔끔하게 포기했다. 이제 남은 건 게이트로 돌아가... 돌아...
...돌아가야 하는데, 저거 왜 샷따가 내려가고 있어?
"이런 씨발 안돼!"
카쿨라가 죽자마자 정체불명의 기운을 흩뜨리며 게이트의 빛이 꺼져가고 있었다. 저 주술전사 새끼가 이걸 유지하고 있었다고? 그러면서 나하고도 싸운 거고?
"이거 순 미친 새끼였잖아!!"
지가 죽으면 게이트 영업 끝나는 걸 몰랐나?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아무리 주술이 강력하다고 해도 이렇게 죽자마자 증상이 나타날 정도였으면 카쿨라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본인은 알았을 거다.
자신이 죽음과 동시에 이 대침공의 핵심이 되는 게이트가 닫히고 남은 오크들이 고립된다는 걸 몰랐을 리가 없다.
결국 오크는 오크였다는 거지. 전투에 미친 새끼같으니.
하소연할 시간에 한 걸음이라도 더 내디뎠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잠깐 눈을 돌렸다면 대체 왜 게이트가 작동을 멈췄는지 이해조차 못할 만큼 빠르게 빛이 사라졌으니까.
결국, 나는 있는 힘껏 달리던 추진력 그대로 훵하니 비어 있는 게이트를 결승선마냥 지나쳐야 했다.
"...하."
허탈해서 말도 안 나온다.
...생각해 보니 잘된 일이다. 나 아직 검도 회수 못했잖아. 하마터면 저 귀한 검을 버리고 갈 뻔 했네. 하하하.
마력을 다시 집중하자 순식간에 날아 돌아온 검을 따라 오크들의 시선이 움직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일단 손잡이를 대충 닦은 뒤 검을 챙겼다. 긍정적 마인드, 긍정적 마인드...
"씨발, 지금 이 상황에서 긍정적일 게 대체 뭐가 있지?"
집에 돌아가는 1회용 열차는 끊겼고, 집까지는 이론 상 말 타면 수개월, 중간중간 게이트와 비룡을 이용하더라도 얼마나 걸릴지 즈언혀 알 수 없는 상황이며, 집에 가는 길조차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게 아닌 상황.
주변은 겨울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퍽 포근한 편인 드넖은 대초원에, 나를 둘러 싸고 있는 것은 족장의 죽음에 정신 못 차리고 있다가 눈깔을 부라리며 적의를 불 태우는 수많은 오크들.
"씨발. 그래, 긍정적인 거 두 개는 있네."
새 무기를 어깨에 걸치며 고개를 돌리자 눈이 뒤집히기 일보 직전인 오크들이 무기를 꼬나든 채 나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지네 족장을 죽였다고 경계하는 것인지 그 동작이 빠르지는 않다.
어이없는 상황에 직면해서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는 속을 잠재우기 위해, 나는 내가 찾아낸 두 가지 긍정적인 면모를 연신 되내이며 놈들에게 말했다.
"기분도 좆 같은데 덤벼, 돼지 새끼들아."
긍정적인 점 두 가지. 새 무기의 길을 들일 수 있는 상황과 화풀이 대상이 공존한다는 것.
사방팔방에서 울리는 돼지 멱 따는 소리 속에서, 나는 다시 한번 바늘을 사출하며 가장 앞에서 달려오는 오크를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