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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34화 (334/412)

대초원을 마주하고 있는 켈바스트 요새 도시의 겨울은 혹독하다.

화룡의 영역인 대초원과 붙어 있으니 기온이 혹독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서부 5 왕국 중에서는 가장 포근한 편일 것이다. 켈바스트의 겨울이 혹독하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순전히 겨울만 되면 미쳐 날뛰는 오크들 때문이었다.

오크들이 한 해를 지내는 방법은 지극히 단순하다. 저들끼리 피 터지게 싸우다가, 세력이 규합되면 인간들의 도시를 노린다. 인간들이라면 활동조차 꺼려할 겨울에 그 공세가 시작되는 이유는 지극히 오크다운 이유에서였다.

식량이 느리게 상하니까. 더 많이, 더 오래 싸울 수 있다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이유.

서부 왕국 지대 모든 이들의 머리털 건강에 악영향을 끼치는 그 행동방침 탓에 수백 년 동안 대대로 골머리를 썩혀 오던 왕국들은 결국 대장벽을 세우고 모든 왕국의 물자를 모아 괴물들과의 국경을 유지할 도시를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중립 요새 도시 켈바스트. 모든 왕국들이 서로의 등에 칼을 찌르더라도 절대 건드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신성 불가침의 영역을. 그리고 변경백과 다를 바 없는 지위를 준 채 자율적으로 행동하게 보장해주었다.

즉, 대신 머리빠져 줄 사람을 구한 것이다.

“대체 이 잡것들이 왜 조용하지...?”

그리고 그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자리에서 영주의 의무를 다 해야 하는 ‘명예로운’ 켈바스트 변경백은 밤잠을 이루지 못한 채 오늘도 머리털을 쥐어뜯고 있었다. 귀족으로서의 품격이나 예의범절은 느껴지지 않는 말투와 행동이었으나 묵묵히 옆을 지키고 있는 집사는 아무런 제재도 하지 않았고, 켈바스트 변경백 본인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마굴이라 할 수 있는 대초원을 목전에 둔 켈바스트를 유지하는데 그런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었으니까. 그에게 필요한 건 대초원으로 나가 돈이 되는 마수들을 사냥해서 돌아오는 모험가들과 도시를 지킬 수 있는 병력, 그리고 이를 뒷받침해 줄 자금과 식량이었다.

오크들만 아니었더라면 매년 천문학적인 자금이 오고 가는 켈바스트의 절대 권력자로 군림하며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렸을지도 모르겠으나, 그 유일한 단점이 모든 장점들을 상쇄시킨다. 매년 연례행사와도 같이 성벽을 보수해야 했고, 사상자들에게 대가를 지불해야 했으며, 그러면서도 또다시 다음 한 해를 준비해야 하는 쳇바퀴와 같은 일상 속에서 그가 받은 축복이라고는 튼튼한 모근 뿐이었다.

솔직히 제발 오크들이 1년만이라도 잠잠하게 해 달라고 신께 기도한 적도 많이 있었다. 그렇게만 하더라도 켈바스트의 자금으로 새로이 시도할 수 있는 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니까. 그런데 정작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불안해서 잠도 못 이루게 되었다.

원래 이번 해에는 역사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끔찍한 대공세가 있을 것이라 여겼었다. 수십 년 만에 오크들을 거의 대부분 합병시킨 정신 나간 오크가 나타났기 때문에.

대족장 카쿨라.

그 초원이 낳은 후레자식의 존재가 가져다주는 위협을 제대로 인지 했을 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조금만 정찰을 나가도 오크들의 전초 기지가 드문드문 보였고, 모험가들은 마수보다 오크들의 머리를 더 많이 들고 귀환했다. 그렇게 방치하는 사이 놈들은 겨울이 시작됨과 동시에 지랄맞게 날뛰었으며, 모두가 침공이 멀지 않았다며 바짝 긴장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잠잠해졌다. 정확히 2주 정도 전부터.

처음에는 화룡이 잠에서 깨어나 심심풀이로 초원에 불이라도 놓았나 싶었는데, 정기 정찰대조차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었다. 결국 켈바스트 변경백은 좀 더 본격적인 정찰을 시도했고 들려오는 정보는 기가 차는 것들 뿐이었다.

처음엔 오크들이 줄었다는 보고가, 한 주 뒤에는 겁에 질린 채 도망치는 오크들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그리고 이번 주에는 밀수업자들로부터 오크들이 초원에 나타난 악마를 두려워하며 몸을 사리고 있다는 해괴망측한 보고가 들었다.

그래, 빌어먹을 밀수업자 놈들. 돈만 벌 수 있다면 몬스터에게도 무기를 팔 거라는 이야기를 몸소 증명하는 인류의 배신자들이 실제로 인근의 오크들과 밀거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직접 와닿으니 허탈한 마음도 들었다.

오크들은 수렵을 통해 얻은 불필요한 물건들을 잔뜩 쌓았다가 그들과 거래해 질 좋은 무기와 식량을 챙기니 이득이었고 밀수업자들은 자신들이 제공한 물자보다 훨씬 많은 부산물들을 얻어 엄청난 수익을 챙길 수 있었으니 이득이었지만, 당연히 켈바스트 변경백에겐 죄다 교수형에 처할 죄인들에 불과하다. 사실 그 기생충과도 같은 것들이 이런 정보를 흘린 것조차 원인을 파악해서 오크들의 숨통을 트이게 하려는 개수작이라는 걸 변경백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이야기를 무시할 수 없다는 현실에 화가 났다. 초원의 악마라니? 그건 원래 서부 왕국인들이 오크들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초원의 녹색 악마, 오크라고.

그런데 그런 놈들이 악마를 부르짖으며 도망친다고? 오크들 입장에서는 영웅이라 할 수 있는 대족장 카쿨라와 그 아래에 있는 수천의 대군세가 있는데도?

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것이 분명했기에 좀 더 확실한 정보를 얻고자 정찰대를 3 교대로 운용하고 있었음에도 얻어지는 건 시원치 않았다. 그나마 최근에 들어 좀 더 중심지에 있었던 오크 부락에서 대량 학살이 일어난 정황을 포착했다는 보고가 들어오긴 했다. 그리고 그건 유용하기보단 소름이 끼치는 정보였다.

그들이 지도에 표시해 보낸 곳은 카쿨라의 부족이 근래에 이르러 자리 잡은 곳이었으니까. 거기가 초토화되었다는 건 초원에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의미했다.

도무지 알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무언가 실마리가 없을까 싶어 수많은 양피지들을 정리하고 검토하는 켈바스트 변경백의 집무실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들어오게.”

짧은 수락과 동시에 빠르게 열린 문 사이로 보인 것은 하인이 아니라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 경비병이었다. 동시에 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설마 결국 오크들의 공격이 시작된 건가? 심지어 언제나 침착하던 집사마저 숨을 크게 들이쉬는 와중에 경비병이 말했다.

“벼, 변경백님을 뵙습니다! 현재 관문에서 자신을 이티스엘 왕국민이라고 주장하는 모험가가 나타나서 급히 보고 드리고자 합니다!”

하지만 의외의 보고에 켈바스트 변경백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걸... 그렇게 급하게 보고하는 이유가 뭐지?”

이젠 일개 모험가까지 자신이 신경 써야 하는 거냐고 부하를 윽박지르지 않은 것은 그가 인격자인 동시에 켈바스트를 유지하고 수호하는 가문의 일원으로 살아오며 신하들과 부하들을 신뢰했기 때문이었다.

“그, 그게, 동쪽에서 온 게 아니라 서쪽에서 왔습니다만...”

서쪽. 대초원.

하루에도 수십 명의 모험가들이 오고 가는 곳에서 새삼 이런 보고가 올라올 이유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급하게 들어온 경비병은 켈바스트 변경백이 재촉하지 않아도 알아서 중요한 내용을 보고했다.

“...그에게 출입증이 없었습니다.”

그마저도 시원찮았지만.

“...출입증이 없는 모험가가 어떻게 서쪽에서 오는데?”

지금 나한테 출입국 관리를 소홀히 했다고 자진해서 밝히는 건가? 그랬다면 저렇게 당혹스러운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을 텐데.

“확인 결과 도시에 상주하던 모험가가 아니었습니다! 보, 본인의 주장으로는 오크들이 연 게이트에 휘말렸다고...”

너무나도 진지하고 경직된 태도로 보고하는 경비병의 모습에 켈바스트 변경백은 지금 화를 내야하는지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진심으로 고민했다. 그는 반문하는 대신 방금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다시 한번 되새겨보았고, 결국 되물었다.

"오크가, 게이트를 열었다고?"

"예, 옙!"

"자네 지금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보고한 건가? 차라리 국경 보안에 구멍이 뚫렸다는 말이 더 신빙성 있게 느껴지는데."

"송구스럽습니다만! 광인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상세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들고 있는 무기가..."

무기는 또 왜? 어째 대화를 하면 할수록 의문이 해소되는커녕 점점 늘어만 가기 시작했다.

"무기가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 혹시 마검 보유자인가?"

"아, 아닙니다."

"그럼 뭐든 가져만 대도 베어버릴 정도로 엄청난 인챈트가 걸린 마법검이라서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위협이 되나?"

"그, 그것도..."

"그럼 대체..."

대체 왜 저렇게 질질 끄는 반응을 보이는 건지 순간 화가 나려는 순간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던 집사가 낮게 헛기침을 했다.

그제서야 켈바스트 변경백은 자신이 오크들로 인해 받은 스트레스를 의무를 다하기 위해 급히 달려온 성실한 경비병에게 해소하기 직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뒤늦게 후회하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미안하군. 내가 좀 예민했어. 자네를 추궁할 의도는 없었네. 그래, 그럼 뭐가 문제였나?"

최대한 표정을 풀며 질문하자 경비병은 집사의 눈치를 살짝 본 뒤에야 제대로 된 대답을 입에 담았다.

"그... 대족장 카쿨라의 도끼를 들고 있었습니다."

켈바스트 변경백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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