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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35화 (335/412)

켈바스트 요새 서쪽 관문지기들이 가장 바쁜 때는 보통 이른 아침과 초저녁이다. 저주받은 대초원 너머는 대부분 마물들의 영역이었기에 그들이 상대하는 이들은 절대다수가 모험가들이고, 그들은 보통 이른 아침에 나가 야영을 하지 않으면 해가 완전히 떨어지기 전인 초저녁에 귀환했기 때문이다.

주된 고객이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모험가들이다 보니 다른 관문지기들처럼 관행에 따라 상인들에게 '통행료'를 받는 식의 부수입을 기대할 수 없어 인기가 없는 근무지일 것 같지만, 고정적인 위험수당과 상대적으로 적은 업무량 때문에 보편적인 인식보다는 평가가 좋은 편이다.

일종의 휴양지라고 할 수 있겠다. 다른 관문에서 며칠 뼈 빠지게 통행료를 걷으며 고생하다가 느긋하게 초원을 구경하며 심신의 안정을 취하는 휴양지. 오크들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관문지기들이 당장 싸우는 것도 아니었기에 딱히 큰 단점은 아니었다.

관문지기 한스덱 역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 정도 인식을 가진 채 업무에 임하는 편이었다. 이른 아침에 초원으로 나가는 모험가들을 상대한 뒤 느긋하게 점심을 맞이하는 그 순간까지도 그랬었다.

저 멀리 지평선에서부터 마수를 탄 오크가 거대한 양손 도끼를 한 손으로 든 채 나타나기 전까지는.

반사적으로 비상 피리를 불고 경고 종을 칠 뻔한 한스덱과 동료 관문지기가 그나마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시야에 들어온 오크가 어딘지 모르게 평소와 달랐기 때문이었다.

마수를 타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초원의 후레자식 카쿨라 부족의 오크일 것이 분명하거늘 홀로 움직이고 있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성문으로 달려오는 게 아니라 매우 느릿느릿 걸어오고 있다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몽골이 송연해지는 와중에도 그런 점을 제대로 파악한 한스덱은 비상 시가 아니면 함부로 꺼내지도 못 하는 비싼 망원경이라는 물건을 꺼내 오크를 살펴보았고, 또 놀라고 말았다.

"사, 사람이잖아?"

마수는 그가 알고 있던 오크들의 마수가 맞았다. 정찰대를 따라 나갔다가 재수 없게 놈들을 만나 물어뜯길 뻔한 적이 있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위에 앉아 있는 것은 분명 인간이었다. 오크만큼 큼직한 덩치에, 야만인들이 걸치고 다닐법한 털 망토를 걸친 인간을 확인한 한스덱은 한시름 놓으면서도 인간이 오크처럼 마수를 타고 귀환했다는 걸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쉬이 결정하지 못했다.

물론 이방인은 한스덱이 제 할 일을 결정지을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분명 느리게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마수에 탄 인간은 어느새 관문 코앞까지 도착해 있었다.

"아."

아직 결정 못 내렸는데. 한스덱의 내면의 한탄과는 별개로 그와 동료는 기계적인 동작으로 관문지기가 해야 할 업무를 수행했다.

"저, 정지! 당장 그 마수를 멈춰 세우십시오!"

솔직히 이게 맞는 대처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 마수를 타고 도시에 다가온 인간이 없었으니까. 그나마 상대방이 요구에 맞춰 멈춰 섰으니 다행이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고 나니 더 위협적이었다. 모험가들 상대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거늘 어째서인지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남달랐다. 마수를 타고 있어서 그런가? 그런 위압감에 눌려 상대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 바짝 긴장한 상태로 노려보는 와중에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남자가 마수에서 내리며 물었다.

"실례합니다. 여기가 켈바스트 방벽입니까?"

굉장히 엉뚱한 질문이었다. 초원에 여기 말고 이런 장벽을 세운 도시가 또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도 결국 켈바스트에서 나갔으니 대초원에서 돌아오고 있는 것일 텐데 왜 저런 질문을? 그 순간 한스덱의 머리에 불길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씨발, 이거 혹시 초원의 악마인지 뭔지 하는 그 괴담이 진짜인 거 아니야?'

초원의 녹색 악마를 밀어내고 최근 떠오르는 신생 악마라는 우스갯소리와 달리 굉장히 살벌한 소문이었다.

소문은 단순하다. '오크들이 겁에 질려 도망치고 있다.' 그저 그뿐. 그러나 평생을 오크들에게 시달리고 살아온 켈바스트 사람들에게는 그 단순한 소문이 오히려 더욱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얼굴을 맞대고 살다보면 싫어도 알게 되는 것이다. 세를 키운 오크들이 겁을 먹고 도망친다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를.

하물며 지금은 후레자식 카쿨라로 인해 유례가 없을 정도로 규모가 커진 오크들이다. 그런 놈들이 도망을 치려면 대체 얼마나 끔찍한 괴물이 튀어나와야 하는 것일지 한스덱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 그렇습니다. 여기가 인류의 방벽 요새 도시 켈바스트입니다. 신분증을 제시해 주십시오."

서쪽 관문에서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소개를 하며 앞으로 나가려 했더니 피곤한 얼굴 위로 안도의 빛을 띠운 남자가 손을 내밀며 한스덱을 저지했다. 불응이 아니라 잠시 기다려 달라는 뉘앙스가 강한 그 행동에 한스덱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남자는 들고 있던 도끼를 번개처럼 휘둘러 자신이 타고 왔던 마수의 목을 단번에 내리쳤다.

너무나도 빠르고 깔끔한 일격에 저항은커녕 반응조차 못하고 죽어 버린 마수의 거대한 몸뚱이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지는 것을 멍하니 보는 동안 천 조각을 꺼내 도끼를 닦아낸 남자가 덤덤하게 말했다.

"실례. 조련된 게 아니라서."

조련된 게 아닌 걸 어떻게 여기까지 타고 왔는데?

반사적으로 튀어나올뻔한 질문을 목구멍으로 쑤셔 넣을 수 있었던 건 방금 보여 준 실력 탓이 컸다. 게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고 열심히 따져 보면 나쁜 사람도 아닌 것 같았다. 더 다가갔으면 한스덱은 복귀전까지 핏물을 뒤집어쓴 채 근무를 서고 퇴근 후엔 쌍욕을 하며 장비 수입에 들어가야 했을 테니까.

어떻게든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머리를 굴리며 남자가 건네준 신분증을 받은 한스덱은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남자를 발견한 그 순간부터 의문이 끊이지 않는 것이, 뭔가 범상찮은 상황인 게 분명했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기에 한스덱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이건... 이티스엘 왕국의 모험가 패 아닙니까?"

관문지기는 기억력이 중요하다. 단순히 모험가와 평민들을 상대하는 거라면 몰라도 귀족이나 대상인 같은 주요 인물들은 즉각 알아보고 대처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 어딜 가나 그렇게 필요한 것만 깔끔하게 기억하라는 군대는 없는 법. 켈바스트 관문지기들의 악명 높은 부조리 중에는 '모든 국가의 모험가 패 외우기'가 있었다.

그리고 한스덱은 장담할 수 있었다. 40년을 살아오며 반평생을 관문지기로 살아왔지만 신병 때 외운 그 수많은 모험가 패들을 본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당연한 일이었다. 국가들을 마음대로 왕래할 수 있는 모험가들은 국적을 파기하고 공용 패로 전환한 이들 뿐이었고, 국적이 있는 상태로 돌아다니는 이들은 모험가 패가 아니라 특별 허가증을 들고 다니니까.

'그런데 그 기록이 오늘 깨졌네.'

켈바스트 최초가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하며 떨떠름하게 바라보니, 미간을 찡그리며 심각하게 고민하던 남자가 설명을 위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게 설명을 하면 조금 긴데..."

남자의 말대로 설명은 좀 길었지만 워낙 조리 있게 말을 잘해서 복잡하진 않았다. 덕분에 한스덱은 동료를 뒤로한 채 온 힘을 다해 막사로 달려갈 수 있었고, 자신이 들은 것을 열성적으로 설명했다가 경비대장에게 뒤통수를 후려 맞아야 했다.

"야이 답답한 놈아!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카쿨라의 부락 한가운데에 떨어진 인간이 제 발로 걸어 나온 것도 모자라서 놈을 죽이고 도끼까지 가져와?!"

억울했다. 그게 진짜가 아니라고 멋대로 넘겨짚었다가 진짜였으면 모가지를 자른다고 난리를 쳤을 거면서 왜 지랄이란 말인가. 그래도 감봉과 해고보다는 뒤통수가 좀 얼얼하고 기분이 더러운 게 나았기 때문에 한스덱은 열심히 경비대장을 설득했다.

그의 열성적인 모습 때문인지 아니면 마찬가지로 멋대로 가짜라고 여겼다가 진짜인 경우 자신의 입지가 위태롭다고 여긴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경비대장은 못마땅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카쿨라의 도끼를 알아볼 수 있는 기사를 찾았다.

다행히 그 과정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켈바스트에서 카쿨라의 도끼에 얽힌 사연을 모르는 기사는 없었고,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이는 더 없었으니까.

비록 기사에게 도끼를 들고 방문한 남자의 구구절절한 사연까지 말할 틈은 없었지만, 어차피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기에 한스덱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기사와 함께 관문으로 돌아온 한스덱은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주워 들으며 그 도끼가 정말 카쿨라의 양손 도끼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크게 놀랐다.

"모험가, 어떻게 이걸 얻게 됐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도끼는 켈바스트의 위대한 영웅 막시만 뒤베르트 경의 유품이다. 적법한 권리는 우리 켈바스트에 있으니 반납했으면 하는군."

"죄송하지만 이는 제가 카쿨라를 잡고 정당하게 획득한 전리품입니다. 거절하겠습니다."

"...말하지 않았나. 적법한 권리가..."

"그러니까......"

"...아니..."

그런데 놀라움을 추스를 틈도 없이 훅훅 진행되던 대화 끝에.

"야이, 씨발 법 모르는 새끼야! 그거 적법 아니라고!"

놀라움을 추스를 틈도 없이 상황이 순식간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 버렸다. 또 의심할 게 생겼군.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씨발? 새끼?

다행히 한스덱의 귀는 멀쩡한 게 맞았다. 평온한 태도로 턱을 높게 들고 있던 기사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으니까.

"뭐, 뭣?!"

"병신같이 오크새끼한테 개처발리고 빼앗긴 물건이 왜 아직도 너희들한테 권리가 있겠냐? 서부법은 세상에서 혼자 따로 돌아가냐? 내가 아주 만만하지?"

와, 씨발 존나 세게 나가네.

한스덱은 자신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떠져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기사는 남자의 말이나 실력을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한스덱은 자신이 직접 보는 앞에서 마수의 통나무 같은 목을 일격에 썰어 버린 남자의 실력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칼부림이 날 거 같은데 괜히 가깝게 있다간 뼈도 못 추릴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도 실력에 자신이 있는 것과 한 나라의 권력과 척을 지는 건 별개의 이야기라는 상식 속에서 살아온 한스덱에게 있어, 남자의 강경한 태도는 제 손발의 핏기가 빠져나가는 수준으로 끔찍한 것이었기에 본능적으로 거리를 두고 싶은 것도 있었다.

"어디 감히 모험가 나부랭이가!"

당연하게도 기사는 한스덱보다 더했다. 분노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기사가 허리춤에 있는 검으로 재빠르게 손을 가져갔다. 세상에, 정말 오늘 저녁 술자리 이야기의 주인공은 내가 되겠군. 기사와 모험가가 칼부림을 일으켰고, 엄청난 싸움이 이어졌다는 식으로 운을 뗄 때 동료들과 주변의 이목이 집중될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오싹오싹했다.

"미친 투구걸이 새끼가."

하지만 한스덱이 예상한 피 말리는 전투는 이어지지 않았다.

-콰직!

검보다 훨씬 무거울 게 분명한 도끼가 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휘둘러지며 기사를 갑옷과 함께 세로로 쪼개버렸기 때문에.

"...어?"

번개같은 움직임을 바라보며 한스덱이 느낀 건 마치 장작을 쪼개는 것처럼 사람이 시원하게 쪼개졌다는 어처구니없는 감상이었다. 그만큼 현실감이 없었다. 코앞에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 속에서 한스덱이 뒤늦게나마 공포에 떨려던 찰나, 남자가 죽은 기사는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한스덱에게 말했다.

"수고스러우시겠지만, 이번엔 법을 아는 사람을 좀 데려와 주시겠습니까?"

방금 전 쌍욕을 날리며 기사를 반으로 쪼갠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중한 그의 태도에 다시 한번 뛰기 위해 몸을 돌린 한스덱은, 어느새 저 멀리 달려 나가고 있는 동료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한탄했다.

'씨발. 이렇게 된 거 제발 높으신 분 좀 모셔와라.'

아닌가? 높은 분이 왔다가 똑같이 반으로 갈라져서 죽어 버리면 나도 원인을 제공한 게 돼서 위험한가?

기사를 죽여놓고도 아무 일 없다는 태연하게 도끼를 닦는 소름 끼치는 남자와 한 자리에 있으면서 많은 갈등을 하는 사이 원수같던 동료가 영주님과 함께 돌아온 것은 이십 여분이 지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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