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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36화 (336/412)

미개한 투구걸이 놈 하나 때문에 첫 단추를 참으로 좆같이 꿴 기분을 지울 수 없었지만, 도둑놈에게 베풀 자비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후회는 없었다.

가뜩이나 이틀 전에 미처 도망치지 못한 마수 하나를 붙잡아 강제로 타고 오기 전까지 하루가 멀다 하고 오크들의 대가리를 쪼개느라 예민해져 있는데 대뜸 와서 한다는 소리가, 뭐? 적법한 소유권?

거의 일주일 가까이 이동하며 놈들의 발할라인 하늘의 대초원행 특급 열차에 태워 보낸 오크만 족히 수백 마리가 넘었는데도 이 하나 빠지지 않은 도끼가 범상치 않은 물건이라는 건 이미 카쿨라와 싸울 때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래서 기사 놈이 말한 대로 영웅의 무기네 뭐네 하는 것도 충분히 납득했다.

그래, 매우 중요한 상징일수도 있고,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만한 퀄리티의 무기니까 성능 때문이라도 돌려받고 싶을 수 있지.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들이 치우지 않고 있던 똥이 게이트를 통해 고향까지 흘러들어온 것만으로도 죄다 정수리를 쪼개버리고 싶은 심정인 사람을 앞에 두고 지금까지는 뒈지는 게 무서워서 방치하고 있던 무기를 기회가 왔다고 착각해서 날름 처먹으려는 건 선 넘었다.

정말 이 도끼를 반환 받고 싶으면 이티스엘 왕성에 직접 서한을 보내 이번 오크 게이트 사태에 대한 책임 문제와 배상까지 싹 다 해결한 뒤 물구나무 서서 재롱을 부리며 엄청난 금액을 제시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근데 별 미친놈이 적법을 떠들다가 검을 뽑으려 들었으니 방법이 있나? 쪼개야지.

다행히 투구걸이와 다르게 관문지기들은 말이 참 잘 통했다. 나는 미개한 투구걸이와 다른 문명인이었기에, 애먼 상대에게까지 화풀이를 하는 못 배워 먹은 행태를 보이는 대신 묘하게 침착한 관문지기와 함께 서 있으면서 약간의 정보료를 제공한 뒤 켈바스트의 분위기나 근황에 대해 물어보며 잠깐 시간을 때우는 식의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했다.

그렇게 이십 여분 정도가 흘렀을까? 딱 봐도 굉장히 높으신 분처럼 보이는 누군가가 세 명의 호위를 대동한 채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씨발 세상에. 이 상황에 대한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차림새와 주변의 반응을 보면 높으신 분인 건 분명한데 말투가 생각보다 정감있군.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과 달리 그다지 당황한 눈치도 아닌 듯했다. 물론 그가 아무리 당황하지 않았다고 한들 호위로 따라온 이들은 기사였던 것을 보고 그의 앞을 가로 막으며 무기를 뽑아 들었지만, 그 정도는 지극히 정상적인 대응이었기에 난 도끼를 거꾸로 세워 기댄 자세 그대로 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은 법 좀 알고 있습니까?"

자신이 관문에 도달하는 것을 뻔히 보고 있음에도 당당하게 나오는 남자를 보며 켈바스트 변경백은 생각했다.

이거, 어디서 튀어나왔는지는 몰라도 범상찮은 놈이다. 기사를 갑옷째로 쪼개버린 것도, 그래 놓고 저리 당당한 것도 충분히 차원이 다른 비범함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상대방의 진가는 그게 전부가 아닌 듯했다.

정말 오랜만에 상대방을 파악하기 위해 최대한 머리를 쓰는 사이 호위로 따라온 기사들이 앞으로 나와 자신과 남자 사이를 막아 서며 외쳤다.

"무례하다! 감히 이분이 누군지 알고!"

자신의 호위 기사들이었지만 정말 굉장한 용기였다. 당장 눈앞의 시체를 보고도 저럴 수 있다니.

켈바스트 변경백은 직접적인 전투와는 한없이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지만, 몸 뿐만 아니라 검을 쥐려던 팔까지 통째로 잘린 시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정도로 무지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제대로 된 저항조차 못하고 일격에 죽었음이 분명한 그는 켈바스트 내에서도 실력이 좋은 평기사 중 한 명이었다.

지금 자신이 대동한 세 기사들과 비교했을 때도 그렇게까지 크게 꿀리는 실력이 아니었다.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려는 성향이 조금 많이 강한 탓에 곁에 두지는 못했지만, 유능한 병력이었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켈바스트 변경백은 그의 죽음을 목격하고도 자신의 의무를 다하려는 기사들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당연히 누군지 모르지. 그걸 알면 내가 이곳 사람이지 이티스엘 사람이겠냐?"

기사의 대응에 미간을 찡그리며 씹어 내뱉듯이 읊조리는 남자의 태도는 참으로 당당했다.

그 외에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변경백의 앞을 가로 막은 두 기사들이 살짝 움찔거리며 아주 미세하게 뒤로 물러날 정도로 말이다.

'쫄았군. 그럴 만도 하지.'

자기들의 실력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다는 증거였기에 변경백은 그들에 대한 평가를 깎거나 한심하게 여기는 대신 스스로 나서서 체면을 세워주는 방법을 선택을 했다.

"그만. 관문지기의 보고대로라면 저 자의 무지는 죄가 아니다. 물러나도록."

"하, 하오나..."

"괜찮다. 난동을 피우는 게 목적이었으면 진즉에 날 죽이려 들던가 다른 오만가지 방법을 시도했겠지. 그렇지 않나 이방인?"

켈바스트 변경백의 질문에 남자는 살짝 고개를 옆으로 까딱이는 것만으로 대답을 마쳤다. 짐짓 오만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동작이었지만, 켈바스트 변경백이 나서서 만류한 탓에 기사들은 더이상 뭐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요새 도시의 영주로서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군. 그 기사, 자네가 죽인 게 맞나?"

"예. 맞습니다."

영주라는 이야기를 듣고도 당황하는 일 없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대답에, 켈바스트 변경백은 남자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말을 덧붙였다.

"그 자는 빌렌이라는 이름의 평기사로 켈바스트 방벽 수호와 백성의 안전을 위해 앞장서던 중요 인물 중 한 명이었네."

도시의 주요 병력을 죽였는데 감당할 자신은 있나?

그렇게까지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으나 말 속에 담긴 의중을 이해하는지 못 하는지 시험해 보려고 조금 과장해서 던진 말이었는데, 돌아온 대답은 켈바스트 변경백이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그것이 무지함에서 비롯된 약탈 행위를 정당화하는 방패가 될 수는 없는 법이죠."

자신이 기대고 있던 도끼를 툭툭 두드리는 것만으로 설명을 마쳤다는 남자의 태도에 켈바스트 변경백은 조용히 신음했다. 껄렁껄렁하지만 귀족의 화법에 살짝 걸친 형태로 대화를 이어 나가는 모험가라니, 정체가 궁금하긴 했지만 당장은 그의 대답이 더 심각했다.

켈바스트 변경백도 눈이 있었기에 남자의 몸을 받치고 있는 도끼가 자신이 알고 있던 뒤베르트 경의 양날 도끼라는 걸 알았다. 그랬기에 그는 빌렌 평기사가 소유권을 주장하다 의견이 엇갈려 죽었다는 것을 방금 들은 대답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약탈이라는 과격한 표현을 쓰는 것으로 보아 아마 뒤베르트 경의 유품인 것을 빌미로 반환을 요구한 것 같은데...

그게 사실이라면 억울하게 죽은 게 아니라 최악의 선택을 해서 뒷사람까지 힘들게 만든 뒤 죽어 버린 상태에 가까웠다. 졸지에 난감한 입장이 되어 버린 켈바스트 변경백은 아쉬운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대의 실력이라면 몸값을 받아 낼 여지도 있을 것 같은데."

"이곳이 이티스엘이었으면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초원 감시의 의무를 소홀히하여 제 고향에 위협을 안겨 준 이들 중 한 명이 무례까지 저지른 탓에 그럴 여유가 없었습니다."

세상에, 초원의 오크들이 이티스엘까지 날아가 피해를 줬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추궁 당하는 날이 올 줄이야. 그것도 모험가한테. 돌아가신 아버지조차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며 벌떡 일어날 일이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지금은 알 방법이 없다. 그랬기에 켈바스트 변경백은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정보로만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기사 하나가 덜컥 죽어 버린 건 분명 큰 타격이다. 허나 그 대상이 카쿨라의 도끼를 들고 초원을 건너온 이였기에 이야기가 조금 달라졌다.

카쿨라의 도끼가 여기 있다는 건, 결국 카쿨라가 죽었거나 도끼를 지킬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는 의미니까.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것이 사실이었으나, 기사를 일격에 죽이는 인간이 오크 부락 속에서 족장의 무기를 소리 없이 훔칠 수 있는 세기의 도둑일 가능성보다는 신빙성 있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저 남자가 카쿨라와 정정당당하게 일대일 결투를 했을 리도 없으니 그 과정에서 카쿨라 뿐만 아니라 놈의 군단에까지 부차적인 피해가 생겼음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고, 이는 평기사 하나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업적이었다.

설령 저자가 부당하게 빌렌을 죽였더라도 이 자리에서는 불문에 붙이는 게 이득일 정도로 큰 업적.

근데 정황상 부당하게 죽은 것조차 아니니 켈바스트 변경백이 굳이 이 자리에서 그와의 의리를 챙길 이유는 없었다. 나중에 가문에 위로금이나 넉넉하게 전해주면 되는 수준이다.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켈바스트 변경백은 어렴풋이 남자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초원의 악마.'

어처구니없는 헛소문이라 여겼거늘, 그렇게 따지고 보니 남자의 주장도 신뢰가 가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동안 한결같던 초원에 정체불명의 괴담이 생겨나고 오크들이 이상 행동을 일으키자마자 카쿨라에게 빼앗겼던 도끼를 들고 찾아와 자신이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남동부 끝자락의 이티스엘에서 게이트에 휘말려 왔다고 주장하는 모험가가 나타났으니, 계속 의심하는 게 더 힘들다.

동시에 사상 최악의 대사건의 서막이기도 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봐야 알 수 있겠지만 남자의 방금 전 반응을 볼 때 오크들이 이티스엘로 대거 유입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으니까. 자칫 잘못하면 의도적으로 서부 왕국들이 이티스엘에 해악을 끼치기 위해 수작질을 부렸다고 마녀 사냥을 당할 판이니 서둘러 진위여부를 파악하고 조치를 취해야 했다.

계산을 마친 그의 행동은 빨랐다.

"켈바스트의 영주로서 정중하게 사과하고 싶네. 그에게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그 도끼는 우리 도시와 연이 깊은 물건이라서 말이지. 일부 기사들 사이에서는 성물로 취급되는 수준이라서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 것 같네."

"그의 무례는 목숨으로 갚았으니 괘념치 마시죠. 그보다는 제가 도시에 들어갈 수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한 도시의, 그것도 서부에서는 왕들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 하는 켈바스트의 영주가 직접 사과를 했음에도 남자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아무리 저 먼 이티스엘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켈바스트가 어떤 곳인지는 알 텐데... 이제는 대체 무슨 삶을 살아야 저렇게까지 당당할 수 있는 것인지 호기심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물론이지. 오히려 성에 손님으로 초대하고 싶네. 자네가 겪은 불운에 심심한 위로를 보냄과 동시에 우리가 원치 않게 범한 실례에 대한 사과도 할 겸 말이야. 무엇보다도 자네가 말한 게이트 사태에 대한 원만한 해결책을 강구할 수 있도록 당사자의 조언과 도움을 받았으면 하네.”

하지만 직면한 문제가 있었기에, 켈바스트 변경백의 호기심은 나중으로 미뤄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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