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미친놈으로 취급될 것이라 여겼던 것과는 다르게 켈바스트의 영주는 생각보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게 켈바스트 변경백이 착하고 이해심이 넘치며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양식있는 지식인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여기서 '말이 통한다'라는 건, 이해득실을 따지기 위해 참을성 있게 기다릴 줄은 안다는 의미에 가깝다.
당장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해대는 거수자에 불과한 나에게 잘 대해 줄 이유라고는 카쿨라에게 강탈한 도끼 정도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나라도 갑자기 몬스터들이 연 게이트에 휘말려서 저 끝자락 딴 나라에서부터 날아왔다는 놈을 발견하면 의심의 눈초리부터 보낼 거다.
아마 그도 죽은 기사와 나를 저울대에 올려 고심한 끝에 내린 결론이겠지. 그 결론이라는 게 그에게 어떻게 작용할지는 알 수 없지만, 당장 전혀 모르는 애먼 곳에 떨어진 나에게는 굉장히 달가운 대우였기에 곱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차피 내가 들이는 수고라고 해봤자 구두로 상황을 설명하는 게 전부인데다가 모험가의 신분이라 딱히 귀족적인 예의와 형식을 갖출 필요도 없으니 나쁠 거 하나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그저 모험가라고?"
아주 솔직하게 말하면, 이 아저씨를 골려 먹는 재미도 무시할 수 없었다.
"한때는 잠시 귀족 가문의 집사로 몸담은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습니다. 아, 이티스엘 왕립 아카데미에서 조수로 일하기도 합니다."
"으음... 그렇군."
던져오는 질문만으로도 예상이 됐다. 내가 귀족 혹은 기사, 정말 하다못해 특정 가문에 속한 식솔이기라도 했다면 그는 분명 이티스엘 왕실과의 협상을 통해 카쿨라의 도끼를 돌려받으려 했을 것이라는 걸.
대체 어떻게 시도하고 성공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번 오크 게이트는 자연재해에 가깝다. 원래 이 세상이 몬스터에 관한 건 자연재해로 치는 편이고, 그런 상황이다 보니 이티스엘 왕실에서 켈바스트 요새 도시를 비롯한 서부 왕국에 항의는 할지언정 완벽하게 배상 받기는 많이 힘들다. 이런저런 귀족 화법이 오고 간 끝에 위로금과 사과의 의미로 주는 선물들을 받는 게 고작이겠지. 그리고 그건 배상금과는 거리가 많이 먼 액수일 게 뻔하다.
이 아저씨도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웃돈을 얹어서 호의를 보이는 대신 도끼를 반환받고 싶은 눈치였다.
이야기를 들어 보면 뒤베르트 경이라는 오크 학살자가 드워프들에게 그 위업을 인정받아 받은 무구일 뿐이라서 켈바스트 밖에서는 그다지 상징성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하니, 그가 부르는 액수에 따라서는 이티스엘 왕실의 무조건적인 호응을 이끌어냈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상황이 거기까지 갔을 경우, 내가 아무리 도끼를 원해도 국가에 충성을 다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면 꼼짝없이 뱉어내고 다른 보상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권력 뒤에 따라오는 책임이라는 게 그런 거니까. 내가 아무리 이런저런 업적을 많이 세워놨어도 여기서는 다른 보상을 많이 받는 대가로 한번 굽혀야 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저 모험가에 불과하다. 그 말인즉슨, 아무런 권력이 없는 지금은 아무런 책임도 지니지 않는다는 뜻이지.
애먼 곳에 화풀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열심히 오크 사냥에 나섰다면 내가 상대해야 할 오크가 한 마리라도 더 줄었을 거라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또 무상으로 오크들을 죽여줬으니 이 정도는 해도 된다고 본다.
의뢰받고 죽였으면 주머니에 금화 하나는 더 챙길 수준이었다고.
이미 기사 하나를 반갈죽 시켜가면서까지 의지를 확고하게 드러낸 탓에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었는지 성까지 마차를 타고 가는 동안 다양한 질문을 자연스럽게 던져가며 어떻게든 빌미를 찾아내려던 켈바스트 영주는 결국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한 채 나를 별실로 안내해 주었다.
"곧 사람을 붙여주겠네. 여독이 쌓여 있을 테니 오늘은 편히 쉬고 내일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세."
첫 대면부터 그렇지만 켈바스트의 주인이라고 하기엔 참으로 격식없는 양반이었다. 여긴 어지간한 대도시들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하나의 왕국과도 같은 곳이라고 들었는데, 이렇게까지 직접 발로 뛰는 인물이 영주로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심지어 주변 사람들도 굉장히 잘 따르는 편이고..."
귀족이 응당 지녀야 하는 권위와 품위가 느껴지지 않는다며 허심탄회하게 대하는 주인을 되려 푸대접하는 정신 나간 인간들이 결코 적지 않은 세상에서 저 정도면 못 해도 상위 5%에 들어가는 슈퍼 귀족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뭐, 당장 내일 떠나게 될지도 모르는 내가 신경 쓸 건 아니지."
이제야 겨우 문명의 영역으로 돌아왔을 뿐, 아직 갈 길이 멀다.
켈바스트 변경백이 붙여 준 하녀의 도움을 받아 옷을 세탁하는 동안 장비들을 점검하며 가지고 있는 것들을 확인했다. 다행히 지난번 제국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구급 파우치는 항상 들고 다녔기에 초원을 가로 지르면서 크게 불편하지 않았지만, 내 돈주머니가 4차원 주머니는 아니라서 집까지 돌아가기 위한 여비가 충분하지 않다.
"그림자 발이 준 포션이라도 팔아야 하나."
하나만 팔아도 아껴 쓴다는 전제하에서 부족하지 않을 게 확실한데... 지금의 나로서는 구하기 쉬운 물건도 아닌데다가 선물 받은 거라서 영 내키지 않았다.
"이건 정말 급할 때 다시 생각하기로 하고..."
가진 돈은 금화 두 개와 은화 십여 개 그리고 동화 조금. 모든 장비를 다 갖춘 상태에서의 자금 사정이라고 치면 매우 풍족한 수준이나, 동계 장비를 처음부터 다 사고 말까지 있어야 하는 장거리 여행자 입장에서는 굉장히 빠듯하다. 그것도 한 겨울에.
장거리 여행을 위한 튼튼한 말 한 마리만으로도 금화 하나가 날아 가고, 오크들의 부락을 헤집으며 노획한 망토와 침낭은 그야말로 구색만 갖춘 수준이었기에 될 수 있으면 중고로 판매한 뒤 새걸 구해야 했기에 또 돈이 나간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돈 될 만한 것도 좀 찾아서 주워 오는 건데, 라는 후회도 생겨났지만 안 가져온 게 아니라 여건이 되지 않아서 못 가져온 거였으니 진심어린 후회라기보단 그저 푸념에 불과했다.
사방팔방에서 쫓아오는 오크들의 추격을 피해 나아가면서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는 도시로 향하는 여행길에 귀중품은 결국 짐이었으니까. 보석 같은 거라도 있었다면 열심히 챙겼겠지만 아쉽게도 내가 턴 놈들은 그런 거에 별 관심이 없더라고.
"끔찍한 자금 사정이군."
당장 필요한 물건들을 최소한으로 구매하되 말과 지도처럼 돈을 들여서라도 좋은걸 구해야 하는 것에서는 아끼지 않은 결과, 내 수중에 남는 돈은 잘해봤자 은화 이십 개가 고작일 것으로 예상됐다.
최단 거리로 게이트를 이용하며 넘어가더라도 게이트 사용료마저 빠듯한 상황. 수년 째 전쟁 중인 이티스엘 물가로 계산 한거라 여기 물가가 낮다면 아주 조금은 더 나아지긴 하겠지만 그다지 희망적이진 않았다.
오는 길에 오크 많이 죽인 걸 높이 사서 변경백이 돈을 쥐어 주면 참 좋겠지만, 기사도 하나 죽이고 도끼까지 안 주겠다고 뻐팅기는 입장에서 그런 걸 기대하는 건 사치를 넘어서 맹렬히 불타는 행복 회로일 것이다.
"...진짜 그 새끼 살려 둬서 몸값이라도 받을걸 그랬네."
비슷한 놈이 또 나타나면 정말 몸값을 뜯어내겠다고 다짐하며 난 모처럼 만에 맛 보는 고급 침대에 드러누웠다.
거의 일주일만에 제대로 맛보는 문명은 너무나도 달콤해서,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
엘드미아가 돌아오지 않은 채 오크들의 움직임에 이상이 생기고, 지휘체계에도 차질이 생긴 틈을 타 본격적으로 시작된 토벌 작전은 일주일이 넘어서야 겨우 막을 내렸다.
아실리에가 기억하는 카쿨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자존심 강한 오크가 불리하다는 이유로 도주를 선택했을 리는 없으니 엘드미아와의 조우에서 무슨 일이 생겨 게이트를 거꾸로 탔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일까, 엘드미아의 모습 역시 발견되지 않았다. 시체 뿐만 아니라 장구류조차 보이지 않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숭고한 희생을 하여 게이트 건너 편에서 통로를 파괴했고, 그로 인해 토벌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어질 수 있었다며 하루가 멀다 하고 포장했지만 아실리에는 그런 분위기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게이트가 한쪽에서만 파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인간들은 너무 전설과 영웅담에 심취하는 경향이 강하다니까.'
살아 있는 건 확실하다. 그건 라이카와의 대화를 통해 이미 확인했다.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알아듣는 건 가능한 라이카는 엄연히 주인과 연결된 마검이었고, 엘드미아가 살아 있냐는 질문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마력을 공급해주는 주인이 없어서인지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하루 대부분을 수면으로 보내기 시작 했지만 말이다.
"사실 엘디는 게이트가 보이면 일단 안으로 들어가고 보는 게 아닐까...?"
당사자가 들었다면 억울하다고 항변 했을 의견이었지만 그녀 옆에 서 있던 예카트리나와 라그니스는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라며 추임새를 넣었다.
죽지 않았다는 걸 안 순간부터 엘드미아의 생사에 대한 걱정은 하나도 하지 않는 이들이었다. 어지간하면 만에 하나의 경우를 염두하며 걱정하겠는데...
이제 와서 그러기엔 엘드미아가 해온 기행들이 너무 많고, 보여 준 실력이 지나치게 확고해서 조금도 걱정이 안 됐다. 오히려 그 무모함에 화만 날 뿐. 세 여인이 또다시 입을 모아 엘드미아의 무모함을 까고 있는 사이 왕실에서 파견된 마법사들과 함께 게이트를 살펴보던 라드넬반데스가 다가오며 라그니스에게 조용히 말했다.
"아무래도 재가동은 힘들 거 같다. 주술을 통해 억지로 문을 연 흔적이 있는데, 그 탓에 성질이 많이 변했어. 마법사들이 제대로 준비해서 문을 연다 하더라도 몇 개월은 걸릴 거다."
졸지에 연구 대상을 상실한 세네란이 경기를 일으키며 달라붙었음에도 저런 결론이 나왔다는 건, 다른 누가 와서 보더라도 딱히 평가가 뒤집힐 일이 없다는 말과 같았다. 그다지 좋지 못한 소식에 아실리에의 미간에 주름이 늘어났다.
카쿨라가 있었으니 서부 왕국 지대로 이어진 게 확실하니 그 점은 걱정이 되지 않았지만 거기서부터 이티스엘로 돌아오는 길이 멀고도 험해서 문제였다. 게다가 겨울이잖아.
'에스뮈에의 도움을 받아야 하나.'
어차피 그녀도 알아야 하는 사실이니 서신을 보내 이야기는 해야 했고, 그러기 위한 연락 방법도 제국을 방문했을 때 서로 합의하에 공유한 상태였다. 도와달라고 하면 간접적인 지원을 펑펑 해 줄 테지만, 딱히 엘드미아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도 아닌데 도움을 받자니 조금 내키지 않았다.
"......"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많이 내키지 않았다.
아무리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한 남자를 두고 노려보는 사이인데, 일방적으로 그녀의 능력에 의존하는 건 자존심이 상했다. 자신에게 수단과 방법이 없으면 주저없이 부탁했겠지만 이번엔 그렇지만도 않았다.
"...하아, 이렇게 연락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게이트가 있던 동굴을 추가로 탐색하는 사람들을 뒤로하며 홀로 밖으로 나온 아실리에는 오크들의 시체를 치우는 인파들을 피해 숲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무 나무에 이마를 기댄 채 정령을 불렀다.
"숲의 아이야, 친구의 부탁을 들어 주었으면 해. 푸른 넝쿨의 아실리에 엔데리니아가 부탁할게."
숲의 정령이라는 건 워낙 거래의 대가를 확실히 요구하며 까탈스럽기에, 이런 부탁을 하고 나면 이것저것 바라는 게 많아져서 최대한 지양하는 방법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푸른 넝쿨의 가족들에게 전해 줘. 대초원에 홀로 떨어진 반려의 귀걸이를 찾아, 부디 아실리에에게 데려다 달라고."
노예 사냥꾼들에게 당한 이후로 수십 년간 연락도 안 하고 있다가 대뜸 이런 부탁을 하는 자신에게 쏟아질 잔소리가 예상되어 벌써부터 한숨이 나왔지만 그 역시 지금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은 아내가 힘내야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