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바스트는 결코 작은 도시가 아니었지만 영주가 다급하게 호위를 이끌고 장벽으로 향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도시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보통 영주가 움직이면 오크와 관련된 이야기가 흘러나왔으니 시민들 입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고, 덕분에 이번에 일어난 사건 역시 빠르게 퍼져 나가며 이목이 집중되었다.
정체불명의 모험가가 하나가 뒤베르트 경의 양손 도끼를 들고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기사 한 명을 반으로 쪼개놓았음에도 영주가 정중히 데려갔다는 이야기는 그가 방벽으로 향했다는 이야기보다 훨씬 빠르게 퍼졌고, 영주 성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을 통해 수시로 정보가 갱신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루어진 정보 전달 속에서 도시가 환호할 만한 이야기는 딱 하나였다.
드디어 그 저주받을 오크 새끼가 죽었다더라.
그 외엔 어딘지 미심쩍거나, 앞뒤가 안 맞거나, 켈바스트의 시민으로서 조금은 마음에 안 드는 내용들 뿐이었다.
누구는 예의도 모르는 모험가 놈이라고 하는 반면 누구는 귀족 뺨치게 예의 바르다고 하고, 누구는 제대로 오러조차 안 느껴지는 풋내기가 운 좋게 도끼만 들고 도망쳤다고 말하는가 하면 또 다른 이는 갑옷을 반으로 쪼개는 사람이 어떻게 실력이 없냐고 반박한다.
겨우 하룻밤사이에 퍼질 수 있는 소문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다양한 이야기가 터져 나온 탓에 모험가는 순식간에 켈바스트의 유명인이 되어 버렸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렇게 유명해졌다는 점에 일부는 그 인물에 관한 이야기 자체가 헛소문이라 치부하는 이도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러한 소문은 당사자의 의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영주 성에 머무는 일부 기사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도끼를 돌려 받아야 합니다!"
켈바스트 변경백이 모험가가 말한 내용의 진위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한창 바쁜 틈을 타 삼삼오오 모여 사태의 심각성을 논하던 기사들 중 누군가가 탁자를 내려치며 열변했다.
혈기 왕성한 젊은 평기사가 외쳤다면 억지로라도 웃어 넘겼겠지만 그 외침의 주인은 기사들 중에서도 꽤 오랜 시간 동안 켈바스트를 지켜오던 중견 기사였고, 이 자리에서 그의 뻔하면서도 뾰족한 수는 전혀 없는 항변같은 하소연을 막을 수 있는 기사들은 손에 꼽았다.
"켈바스트를 위해 평생을 희생한 뒤베르트 경의 유품을 어찌...!"
안타깝게도 그 손에 꼽는 기사들 중 가장 높은 서열의 사람들은 영주와 회의 중이었고, 비슷한 서열의 사람들은 그와 의견을 같이 했다.
덕분에 영주를 호위하느라 서쪽 관문까지 따라나갔던 기사들은 죽을 맛이었다.
'순수 완력만으로 사람이랑 갑옷을 반으로 쪼개버리는 오크 같은 놈에게서 뭔 수로?'
뒤베르트 경이 활약할 당시에 수습 기사로 활동하던 이들이었으니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됐지만 그거랑 현실은 별개였다. 중견 기사는 연신 명예도 모르는 모험가 놈에게 신성한 결투를 신청해 도끼를 되찾아야 한다고 설파하기 시작했지만 호위 기사들은 곧 죽어도 그 인간에게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겉으로는 오러조차 제대로 안 느껴졌다. 격의 차이를 떠나 그냥 미미했다. 하지만 도끼에 남아 있던, 미처 다 닦지 못한 피기름이 모험가가 도끼로 기사를 죽였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으니 그 참상을 오롯이 근육으로 일궈냈다는 소리다.
그들이 뒤베르트 경의 위업과 그 도끼가 어떤 물건인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주워 듣고 살지 못했다면 마법의 도끼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쯤 저 열광적인 분위기에 휩쓸려 맞장구를 치고 있었겠지.
"맞는 말입니다! 어찌 인류와 문명의 경계를 수호하는 켈바스트의 기사가 그런 명예도 모르는 모험가에게 유서 깊은 무구를 강탈당한 채 손가락만 빨고 있겠습니까!"
"관문 앞에서 기사를 양단한 야만인입니다! 오크와 다를 게 뭐가 있겠습니까!"
아닌데. 영주님이 수상하리만치 법을 잘 알고 있다고 하던데...
떨떠름한 세 명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고, 암묵적인 동의하에 일단 주둥이를 다물기로 했다. 여기서 괜히 반박하고 나섰다가는 한참 윗 기수인 저들에게 무슨 잔소리와 기합을 받게 될지 감도 오지 않았다.
"피가 끓어올라 안 되겠군! 내 당장 그 무법자 놈에게 정의와 명예가 뭔지 보여줘야겠소!"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는 목소리가 늘어나자 확신이 생긴 것인지 결국 중견 기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실제로 그를 말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결국 열 명의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 모험가가 묵고 있는 방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열심히 입을 다물었지만 그 흐름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었던 호위 기사 셋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빛을 교환했다. 씁, 이 정도면 그래도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예법에 대해 걱정하느라 잠깐 지체되긴 했지만, 기사들은 어차피 모험가니 적당히 하자는 식의 결론을 낸 뒤 다짜고짜 모험가가 있는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시라는 정중한 목소리가 돌아오자마자 문을 연 중견 기사는 가장 선두에 서서 모험가에게 짧은 목례를 한 뒤 말했다.
"머나먼 이티스엘에서부터 온 내방자여, 이렇게 약속도 없이 만나러 와서 미안하오! 허나 그대가 언제 여행길에 오를지 모르는 반면 우리에겐 이 상황이 너무나도 시급하여 결례를 무릅쓰고 행동부터 나섰으니 부디 이해해주셨으면 하는구려!"
호위 기사들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생겼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너무 예법을 날려 먹은 게 아닐까요 선임 기사님.
다짜고짜 들어와서 일방적으로 사과하고 양해를 강요하다니. 비록 변경백께서 예법을 소홀히 하고 실리를 추구하는 성품이라고는 하나 영주를 섬기는 기사들까지 그러는 건 좋지 않다고 맨날 말씀하셨는데.
호위 기사들의 시선이 슬쩍 모험가에게로 향했는데,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반응만 보이고 있었다.
침대에 편하게 드러누운 상태로 꼼짝도 안 하고 멀뚱히 눈만 돌려 기사들을 바라보던 모험가의 시선과 침묵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쯤이 되어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
"무슨 용무이십니까?"
"...흠흠, 그대도 이미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모험가가 이해하고 넘어갔다고 여긴 중견 기사가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았지만 호위 기사들의 주름은 늘어만 갔다. 영주님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법 잘 아냐고 물어 봤던 인간인데 지금 저 반응이 맞나?
왜 '이해하고 넘어가겠다.' 가 아니라 '대체 뭔데 이런 무례까지 저질렀는지 들어나 보자.' 처럼 들리지?
"...하여,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 켈바스트의 기사들은 신성한 결투를 통해 그대에게서 위대한 뒤베르트 경의 양날 도끼를 돌려 받을 기회를 얻고자 하오!"
중견 기사가 말을 끝내고 반응을 기다렸지만 이번에도 모험가는 침묵했다. 아주 평온한 태도로.
심지어 여전히 일어나지도 않은 채 누워 있었지만 이미 이쪽에서 무례를 저지르고 들어온 터라 아무도 지적하지 못한 채 못마땅한 시선만 보내고 있었더니 잠시 천장으로 시선을 돌리며 뭔가 고민하던 모험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옆에 풀어두었던 검을 챙겨들더니 덤덤하게 중견 기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훈련장이 있겠죠. 안내하십시오."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평온한 태도였지만 중견 기사를 필두로한 다른 기사들은 그저 도끼를 돌려 받을 빌미를 만들었다는 것에 기뻐하며 흔쾌히 앞장섰다. 앞뒤로 모험가를 호위하듯. 혹은 도망치지 못하게 포위하듯 움직이는 기사들 중 일부가 아주 작은 소리로 모험가를 비웃었다.
"아무래도 한 명만 상대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하하, 설마 그렇게까지 무지하겠나. 분명 '켈바스트의 기사들'이라고 학센 경이 제대로 말했는데. 평민이라 하더라도 그 정도 차이는 알고 있겠지."
"알았다면 정중히 결투를 거절하지 않았을까?"
"흐음, 일리가 있는 말이군."
평민 출신에서부터 오직 노력만으로 호위 기사가 된 세 기사들마저 뚱해지게 만들 발언이었지만 그런 걸 배려할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호위 기사들은 그저 조용히 따라갔다. 그렇게 주변이 이목을 집중시키며 훈련장에 도착한 기사들이 주변을 빙 두르는 동안 중견 기사 학센은 훈련장 중앙에 서서 여전히 시큰둥한 태도로 주변을 훑어보는 모험가를 마주한 채 검을 뽑아 자세를 잡으며 말했다.
"나 요새 도시 켈바스트의 기사 학센 스트라우드는 지금 이 자리에서 뒤베르트 경의 양날 도끼의 소유권을 걸고 신성한 결투에 임할 것을 신들 앞에서 맹세하오!"
동시에 몸 안에 잘 갈무리해 두고 있던 오러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성 내에 있는 오러 익스퍼트에 도달한 기사들 중에서도 수준급의 실력을 지닌 그가 위압 삼아 뿜어내는 오러는 확실히 범상찮았으나, 그걸 바라보는 모험가는 마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듯 아무런 변화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반걸음 뒤로 물러나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한 뒤 흐트러짐 하나 없이 깔끔한 동작으로 검을 뽑아 들 뿐.
"어?"
구경하고 있던 기사들에게서 반사적으로 의문이 새어 나오게 만드는 군더더기 없이 완벽한 동작을 보며 호위 기사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나는 엘드미아 에가. 라단 에가와 에비셔 루이나의 아들이자, 오가토르프의 검을 배우며 기사의 길을 걷는 견습이자, 훗날 왕국의 안녕과 인민의 평온을 위해 방랑의 길을 걷기로 맹세한 한 자루 검이다."
어쩐지 이럴 거 같았다.
"켈바스트 요새 도시의 기사들이 내가 전장에서 쟁취한 정당한 전리품인 뒤베르트 경의 유산이라 불리는 양날 도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바, 나는 그들이 내게 보인 무례와 그들이 바라는 것에 준하는 대가를 지불하기 전까지 결투에 임할 것을 만신들이 보는 앞에서 맹세한다."
사태가 순식간에 심상치 않게 돌아기 시작하는 걸 이해한 기사들 사이에서 혼란이 일렁였지만 자신을 엘드미아라고 밝힌 모험가는 상단 자세를 잡으며 말을 맺을 뿐이었다.
"이 자리에서 명예를 잃었으니, 이 자리에서 명예를 되찾고 대가를 받을 것이다. 그전까지는 검을 거두지도, 입을 열지도 않겠다."
얼빠진 기사들 사이에서 호위 기사들만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명예를 몰라? 무법자? 야만인? 저게 야만인이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야만인이었다.
'역시 영주님의 말씀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어.'
그날 켈바스트 변경백은 장장 세 시간에 걸친 회의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휘하의 기사 일곱 명이 죄다 이티스엘에서 온 모험가에게 깨지고 몸값을 지불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뒷목을 잡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