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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39화 (339/412)

기사들을 상대하고 난 서부 왕국에 대한 평가를 살짝 수정하기로 했다.

오크조차 제대로 처리 못 하는 게을러 빠진 놈들이 가득한 동네에서, 머리 나쁘고 실력도 부족하지만 돈은 많은 기사들이 일곱 명씩이나 몰려와서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를 마련해주는 인정 넘치는 동네로 말이다. 영주와의 첫 대면 자리를 함께 했던 호위 기사 셋이 귀신같이 뒤로 빠진 게 많이 아쉬웠지만 별수 없지.

이제는 얘네가 오크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도 납득이 가기 시작했다. 이렇게나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착한 친구들이니 오크들을 상대하면서도 동정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이런 식으로 말도 구하고 돈도 벌게 될 줄은 몰랐는데."

싱글벙글 웃으며 이제는 내 말이 된 군마의 마갑馬甲을 벗겨 얼빠진 표정으로 서 있는 녀석에게 넘기자, 퍼뜩 놀라 크게 휘청거리면서도 어찌저찌 받아 든다. 가장 선두에 서서 무례란 무례는 다 저지르고 뻐기던 학센이라는 놈의 종자였는데, 몸값으로 말을 지불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저 모양이다.

섬기는 기사가 모험가에게 졌다는 게 충격적이었는지, 아니면 기사가 말을 몸값으로 지불했다는 게 충격적이었는지 몰라도 제 눈앞의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겠네.

근데 별수 있냐, 남들 곱절은 건방졌던 주제에 돈이 없으면 이런 거라도 빼앗겨야지. 꼬우면 말 잘 안 듣는 말을 데리고 다녔어야지 이렇게 잘 따르는 애를 두면 뺏기는 게 정상 아니겠어? 그래도 내가 양심이 있어서 마갑은 남겨 준다.

"안장이랑 배낭 그리고 투구는 내가 쓸 거니까 그리 전달해."

물론 괜히 쓸데없이 무겁고 필요 없으니 남겨 주는 거지만.

"...예, 알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은 묵직한 마갑과 안장에 달려 있던 투창과 활을 한 아름 안아 든 채 뒤뚱뒤뚱 마구간을 벗어났다. 얼마 안 지나서 크게 당황하며 뭔가 와장장 떨구는 소리가 들렸는데, 아무래도 사람을 피하다가 거하게 자빠진 모양이었다.

"기사도 시원찮고, 종자도 시원찮고..."

웃기는 곳이라니까.

절로 저어지는 고개를 바로잡으며 마구를 재점검하고 있었더니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며 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학센 경의 말인가?"

켈바스트 변경백이었다. 딱히 호위도 대동하지 않은 채 짐짓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며 무심한 척 말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이미 이야기 다 듣고 뒷목까지 잡은 다음 온 거 같았다.

저 태연한 모습이 진심일리는 없을 것이다. 무려 기사라는 것들이 근본 없는 모험가에게 개털렸으니 영주 입장에서도 얼굴에 똥칠을 당한 기분일 거고, 도시의 분위기도 한동안은 흉흉해질 테니까. '모험가 하나한테 털린 기사들이 우리를 지켜 줄 수 있는 게 맞아?' 같은 소리가 만연하겠지.

그럼에도 켈바스트 변경백의 연기는 완벽했다. 심리에 대해 추측만 할 뿐, 확신은 할 수 없을 정도로. 굳이 그걸 파고들 이유도 없었기에 나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좋은 말이더군요. 사람도 잘 따르고."

"다른 이들에겐 푼돈만 받았다고 들었네."

귀족들 입장에서는 푼돈이긴 했지. 기사 한 명당 금화 네 개씩만 받았으니까.

"받을 만큼 받았습니다. 더 지불할 만한 능력을 지닌 이들은 없더군요."

일부러 고개를 돌리며 한 대답에 잠깐이나마 켈바스트 변경백의 가면에 금이 갔다. 자기 수중에 있는 기사들이 평가절하 당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오러라는 게 존재하는 탓에 기사들의 급이 천차만별로 나뉜다고는 하나, 결국 오러 못 쓰는 인간들보다는 한참 강하고 유리한 전투기계가 기사인 만큼 그들은 결코 값싼 병종이 아니었다. 중세의 슈퍼카 위치를 오러 유저가 꿰차고 있을 뿐이지 그들 역시 잘나가는 외제차 정도는 된다.

학센이라는 기사 놈이 떠들기로 자기보다 강한 이들이 셋은 더 있다고 했고, 놈을 포함해 두 명이 오러 유저였으니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켈바스트 변경백은 최소 슈퍼카 여섯 대와 외제차 7대를 보유하고도 수많은 병력을 거느리고 도시까지 굴릴 수 있을 정도로 자산에 여유가 넘쳐흐르는 정신 나간 부자라고 할 수 있겠다.

솔직히 나도 켈바스트에 대해서는 오크를 막는 장벽이라서 여러모로 지원이 후하고 부유하다는 이야기를 듣기만 했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근데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자기가 보유하고 있는 슈퍼카 세 대와 외제차 7대의 가치가 폐차 수준으로 떨어졌으니 아무리 사람이 좋다 하더라도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그렇게까지 궁핍하진 않네만."

현대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실제로 기사놈들은 더 많은 몸값을 지불할 수 있다면서 되려 목소리를 높힐 정도였다.

"그랬습니까? 제 생각보다 서부는 풍족한 모양이군요."

그런 놈들에게도 돈을 쓸 여유가 있다니 잘 사나보네. 노골적으로 그런 의도를 담은 내 답변에 켈바스트 변경백이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놈들도 주장했던 내용이라 당연히 알고는 있었다. 그냥 죄다 입 닥치게 만든 뒤 네 개씩 받은 거지. 처음엔 노발대발하며 군마 세 필도 살 수 있는 돈을 지불하겠다던 학센도 나중에 가서는 괜히 몸값이 깎일까 겁먹고 알아서 닥쳤다.

가만히 있는데 좆같이 굴면 좆같이 굴만한 이유를 만들어 주라고 했던가. 난 그 이유를 만들어 주는데 집중했을 뿐이다.

군마값도 안 되는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기사라니, 그걸 기사라고 두고 있는 이도 죽상을 쓰게 되고 당사자는 치욕스러워서 혀라도 깨물고 싶을 것이다. 아마 한동안은 전장에서 공을 세워도 금화 네 개짜리 기사라는 놀림 속에서 치를 떨며 살아야 할걸?

"하아, 자네 정말 그냥 모험가가 맞나?"

방금의 대화로 그런 내 의중을 이미 다 파악한 것인지 켈바스트 변경백이 주저 없이 돌직구를 던져 왔다. 딱히 힐난하거나 적의를 지녔다기보단 어이가 없다는 눈치였다.

비록 기사들의 돌발 행동이 원인이라고는 하나 형식 갖춰가며 좋게 넘어갈 수도 있었던 걸 죄다 뒤엎고 똥칠까지 한 사람을 마주 보는 사람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침착하고 평온한 모습은 연기가 아니었기에, 나는 아주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며 대답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생에 파도가 좀 많습니다."

"그거 참으로... 시적인 표현이군."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한 켈바스트 변경백은 고개를 내저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사실 이렇게 찾아온 것은 그 일 때문이 아니라 회의의 결과를 말해주기 위함이었다네."

"다행이군요. 쉬이 믿기 힘든 내용이었을 텐데 감사합니다."

"...아직 결과를 말하지 않았네만?"

"안 믿으셨다면 이 자리에 영주님이 아니라 창검을 들고 병사들이 왔겠죠."

당연한 이야기를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하자 켈바스트 변경백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군. 사실 우리도 도시에 박혀서 놀고먹기만 한 건 아니라서 이런저런 정황이 맞물린다고 결론 내렸거든. 이미 파발마를 보낸 상태일세."

"파발마요?"

"아, 켈바스트에는 비룡과 게이트가 없거든.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위해서 말이지."

예전이었으면 오크 새끼들이 뭔 수로 게이트를 쓰고 비룡을 타냐고 했겠지만 카쿨라 때문에 과연 선조의 지혜라는 생각만 들었다.

"솔직히 지금까진 별 병신같은 가능성을 염두한다고 여겼네만, 선조의 지혜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군. 어쩌면 과거의 대공세 때 비슷한 일을 겪었을지도 모르겠어."

뭐야 씨발. 내 생각이라도 읽은 줄 알고 깜짝 놀랐네.

그 뒤로도 내가 정비를 마치고 마구간을 나올 때까지도 자연스럽게 대화하며 동행하던 켈바스트 변경백은 성에 있는 정원 언저리에 다다를 때쯤이 되어서야 지나가듯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최대한 빠르게 연락을 취한다고 하나 이티스엘까지 이쪽의 서신이 가는 데만 보름은 걸릴 걸세. 회답이 오는 것을 포함하면 한 달은 걸리겠지. 마음 같아서는 자네도 같이 보내주고 싶지만..."

"왕국의 비상 연락 수단을 이용하니 신원을 알 수 없는 외지인을 동행시킬 순 없으시겠죠."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군. 이티스엘의 모험가들은 다 자네처럼 박식한가?"

"칭찬 감사합니다만, 결국 사람 사는 곳은 다 거기서 거기인 거 같습니다."

가엔달 파티 같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당텔 같은 새끼도 있으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본다. 내 대답에 그는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대신이라고 하기도 뭐하지만 자네가 원한다면 내 이름으로 신원 보증서를 작성해 줄 수도 있네."

"...제 발언의 진위여부가 확실해질 때까지 어떻게든 붙잡아두는 편이 유익하신 거 아닙니까?"

"글쎄, 잠깐 회의하는 사이에도 이런 일이 터졌는데 그게 과연 유익할지 모르겠구만."

자기가 말하고도 껄껄 웃는 걸 보아하니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내 얼굴에 똥칠을 하다니 당장 저놈을 잡아 죽여라!' 라고 외치는 상황이 연출되었어도 '그럴 수 있지.' 라고 받아들일 생각이었는데.

물론 그랬을 경우 다른 많은 사람들은 내 도끼와 칼 그리고 바늘을 받아야 했겠지만.

"비록 신분증이라고는 이티스엘 모험가 패 뿐이지만 대초원에서 왔으니 밀입국을 의심할 이유도 없지. 완벽하게 자유로운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티스엘로 돌아가기 위해 왕국들을 지나치는 데에는 불편함이 없을 거야. 아니면 아예 이곳에서 손님으로 묵으며 이티스엘에서 자네를 마중할 사람이 오길 기다리는 방법도 있지."

"전자의 경우엔 대가로 무엇을 바라십니까?"

"침묵을 바란다네."

이건 예상치 못했던 대답인데? 뭔 소린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라보니 켈바스트 변경백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설명해주었다.

"자네가 간 뒤에 우리도 체면은 세워야 하지 않겠나. 이 지경까지 와서 자네에게 도끼를 돌려 달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뻔뻔하지. 그냥 자네를 영웅으로 만들려고."

"......뒤베르트 경의 유지를 이은 정체불명의 여행자가 나태해진 켈바스트의 수호자들을 벌해 경각심을 일깨우고 정처 없이 동부로 향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는 그의 반응을 보아하니 비슷했나보다.

"탐나는 인재로군. 혹시 왕국 생활에 관심 없나?"

"아직 부딪쳐야 할 파도들이 많아서."

아쉬워하는 켈바스트 변경백의 감언이설을 뒤로한 채 나는 신원 보증서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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