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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40화 (340/412)

켈바스트 변경백이 정식적인 절차를 밟아 신원 보증서를 제작하기까지 하루 정도 걸린다고 하길래 나는 여행용품을 구매하기 위해 두둑해진 주머니를 든 채 도시로 나왔다.

아는 것 하나 없이 이 큰 도시를 일일이 돌아다니는 건 좀 많이 막막한 일인지라 성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 둘에게 은화 몇 개 찔러 주며 조언을 구했더니, 순식간에 싱글벙글 웃으며 친절해지며 모험가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구역을 앞다투어 알려주었다.

"켈바스트는 다른 도시들에 비해 물건들이 비쌀테니 마음 단단히 먹고 가슈!"

위대한 은화의 힘을 맛보고 십년지기 친구를 배웅해주는 것처럼 웃는 얼굴로 손까지 흔들어 주는 그들을 뒤로한 채 잘 포장되고 정돈된 길을 따라 도시로 향했다.

생각보다 굉장히 번화한 도시였다. 투박하고 높게 지어진 외곽 성벽과 달리 내부는 왕국 수도라고 해도 믿을 만큼 화려하기 그지없다. 내성에 가까운 구역이라 더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쳐도 오크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침공하려는 것을 틀어 막고 있는 도시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다.

그 모습이 대공세 이후로 긴 세월을 지나오면서 단 한 번도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여 조금은 고까웠다.

이 정도 능력이 있으면 관리 좀 잘하지 씨발.

사실 고대의 게이트라는 게 관리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이들에게 죄를 묻는 건 부당한 일이었지만 피해를 입은 입장에서는 아무나 붙잡고 남탓을 하고 싶은 거 아니겠는가. 졸지에 겨울 바캉스가 혹한기 훈련으로 변질되어 버렸으니 입 밖으로 내지는 않을지언정 한탄 정도는 하게 된다.

그래도 기사들이 처방해준 금융 치료 덕분에 기분이 많이 나아진 나는 중간중간 보이는 군것질거리도 주워 먹고 기념품같은 게 없나 찾아도 보면서 최대한 관광하는 기분으로 움직였다. 어차피 닥친 상황 화내고 짜증낸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니 최대한 즐기는 게 이득이었다.

그렇게 삼십 분 정도를 걸었을까, 슬슬 주변에 보이는 가게들이 일반인들과는 거리가 먼 물건들을 진열하고 팔기 시작했다. 오고 가는 사람들도 모험가들이 점점 늘어나는 게 적어도 길을 잘못 들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허어, 확실히 값이 더 나가네."

이티스엘이 아무리 대륙 대부분의 국가들로부터 온갖 지원을 받는다고 한들 엄연히 전쟁 중인 터라 딱히 물가가 싼 건 아닌데 여긴 더 했다. 코앞에 오크들이 바퀴벌레처럼 산개해 있는 것도 이유라면 이유겠지만, 전체적으로 모든 물건들이 비싼 걸 보면 모험가들의 벌이가 좋은 편인 게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았다.

군것질까지는 별 체감이 안 되는데 여행장비들은 체감이 확 됐거든. 아낌없이 주는 기사들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먹고 살 길이야 뭐든 있겠다만, 여비를 버느라 이곳저곳에서 시간을 많이 빼앗겼을 게 분명하다.

운명과도 같이 나타나 일용할 자금을 융통해준 머저리들에게 감사하며, 나는 마음 놓고 쇼핑을 시작했다.

이동 및 탐색뿐만 아니라 야영과 식사 준비부터 주변 경계까지 홀로 해야 하는 만큼 사야할 게 많았다. 전생이었다면야 답도 안 나오는 상황 속에서 모닥불을 지키며 밤을 지새다가 동이 틀 무렵에 겨우 잠들고 점심이 다 될 때쯤 힘겹게 일어나 잠깐 또 이동하는 식의 여행이 됐겠지만, 다행히 여기서는 돈만 있으면 어떻게든 해결되는 문제들이 많이 있다.

당장 모닥불부터가 휴대용 마석 난로를 통해 한 큐에 해결된다. 거기에 원래대로라면 번거롭게 장작을 챙겨 다니거나 야영지에서 나무를 주워야 하는 걸 가볍고 작은 마석으로 충당할 수 있으니 짐도 가벼워지고 시간도 절약할 수 있지.

화력 조절을 통해 가벼운 요리도 가능할 뿐만 아니라 랜턴으로도 쓸 수 있으니 몇 없는 모험가 전용 치트키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이다.

"손님 보는 눈은 굉장히 좋은데, 돈은 있으신가? 그거 비싼데."

"얼만데요?"

"금화 2개."

여행 도구 하나가 1/2 켈바스트 기사라니! 하지만 납득할 수밖에 없는 가격이었기에 난 닥치고 값을 지불한 뒤 마석도 추가로 구매했다. 그래도 기사놈들 덕에 환전 걱정은 없어서 다행이다.

군말없이 값을 지불한 덕인지 가게 주인은 이것저것 괜찮은 물건들을 내놓으며 할인을 제시했으나 그중 필요한 거라고는 마나를 부여하면 잠깐 동안 밝게 빛나는 발광석과 야전삽만한 작은 삽 정도였기에 그리 많은 할인은 받지 못했다.

"신기한 손님이네. 보는 눈도 있고, 돈도 있는데 물건들은 초행길이라. 어디 던전에 잘못 들어갔다가 날려드셨나?"

"장비가 절 날려 먹었죠. 물건들은 이티스엘에 멀쩡히 있습니다."

"이티스엘? 거기서 여기까지 장비 날려 먹고 오기엔 너무 먼데?"

"케케묵은 게이트 타니까 한 번에 오던데요."

꽤나 예리한 질문을 던지는 것치고 순전히 흥미본위인 태도라서 진실을 말해줬더니 박장대소를 하며 농담으로 받아들인 가게 주인은 내 재치를 칭찬하며 은화 세 개만큼 가격을 깎아줬다. 가게를 나오는 내 뒤에 대고 실패도 하고 사는 거라며 덕담을 던지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던전에서 날려 먹고 자존심 때문에 농담을 던졌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정말 놀랍게도 그런 착각은 첫 번째 가게 주인만 하는 게 아니었다. 가방을 살 때도, 식량을 살 때도, 방한용 외투를 구입할 때도 사람들은 같은 착각을 하며 나를 동정했고, 졸지에 유쾌한 동정을 받게 된 나는 아주 조금씩은 더 저렴하게 원하는 물건들을 구입하게 되었다.

참으로 바람직한 착각과 오지랖들이었다. 나야 이득이니 아무래도 좋았지만.

그렇게 훈훈한 켈바스트의 정을 느끼며 마지막으로 방어구 수선을 위해 들어선 대장간의 대장장이는 이것저것 바리바리 들고 있는 내 꼴과 장비를 번갈아 보더니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

"대초원으로 떠나실거요?"

"아뇨. 내륙으로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그냥 한동안 도시에서 쉬는 게 좋을 텐데."

켈바스트 사람들은 인심이 좋은 건지, 대장장이는 내 가죽 흉갑을 살펴보면서도 열심히 조언을 이어 나갔다.

"오크들을 상대하느라 뒤쪽 상황은 모르는 듯한데, 지금 왕국끼리 사이가 안 좋소. 서로 붙은 영지끼리는 전쟁도 자주 하는 편이라서 잘못하면 불똥튈 상황이외다. 겨울인데도 도적들이 생겨나고 사병들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 뛰지. 도시까지 무사히 도착하면 아무 문제없겠지만 도중에 뭐라도 마주할 경우 좋은 이야기가 오고 갈 거라고는 장담 못하겠군."

어라? 이건 오지랖이 아니라 진짜 중요한 이야기인데?

"의심하려는 건 아닙니다만, 그런 것치고는 켈바스트의 분위기가 너무 좋던데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켈바스트는 왕국들이 백 번 천 번을 싸우든 아무런 불이익도 받지 않으니까. 이음매가 좀 망가져서 손 보는 게 좋을 거 같은데, 고칠거요?"

"아, 예. 부탁드립니다."

이티스엘이 마족막이로 지원을 받는 것처럼 켈바스트도 오크막이 역할을 통해 지원을 받는 구조라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불이익을 안 받는다고 호언장담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건 좀 신기해서 이유를 물었더니 대장장이는 별 희한한 걸 다 본다는 눈을 하면서도 말을 이었다.

"왕국 사람이 아닌가보군. 과거에 있었던 오크 대공세로 인해 여기 서부 왕국 사람들은 병적으로 오크를 경계한다오. 당장 이렇게 제국 부럽지 않게 풍족한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왕국도 싸움을 걸지 않는 이유지."

왕국에 속해 있지만 일종의 중립도시 같은 느낌이라는 건가. 정작 그렇게 오크들의 위협은 막아 놓은 채 지들끼리 신나게 치고받고 싸운다는 게 웃겼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래도 영지 밖은 무법천지 아닙니까? 그게 지켜지나요?"

"도적 같은 놈들에게는 안 통하지. 하지만 생각이 있는 이들은 영주님 인장이 박힌 문서 하나만 들고 있어도 그냥 보내주는 편이오. 그만큼 대공세의 충격이 컸던 것이기도 하고."

켈바스트 변경백이 나를 물먹이려고 일부러 말을 안 한 건가 싶은 생각도 잠깐 했었는데, 아무래도 보편적인 의식을 기반으로한 자신감이 있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긴 듯했다. 말이 변경백이지 왕이 따로 없네.

어차피 오늘 보고 안 볼 사람에게 구구절절 내가 내륙으로 가야하는 이유를 설명할 필요도 없었기에 팁을 얹어주는 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대장간을 벗어났다. 정보뿐만 아니라 실력도 괜찮은지 수선을 마친 갑옷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어째 돌아가는 길도 순탄하지 않을 것 같구만."

분명 내가 가는 길마다 새로이 사건사고가 터지는 건 아닌데... 이미 터진 사건들하고 계속 엮이다 보니 도무지 안심이 되질 않는다.

결국 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도구 상점에 들려 방범 장치를 추가로 구입했다. 발동시키면 일정 범위 안에 접근하는 생명체를 인식해 진동이 울리는 구조인데,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들어도 진동하는 주제에 유지를 위한 마석은 꾸준히 요구해서 참으로 병신같은 발명품이라고 욕한 뒤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물건이었다.

원래는 굵은 실과 작은 종을 이용해 간단한 부비트랩을 만드는 것으로 끝낼 생각이었는데, 도시의 대장장이조차 경고할 정도로 약탈이 만연하다면 그 정도 함정은 예상하고 접근하는 영악한 놈들을 상대할 가능성도 염두하는 게 나았다.

역시 온갖 적성 생물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혼자서 여행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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