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난한 하루가 흘러가고 다음날이 밝아왔다.
그 사이 정신 못차린 기사 몇 명이 또 돈을 바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에게 털린 기사들보다 명백히 실력이 위에 있다는 이들은 명예 때문이라도 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켈바스트 변경백이 말했던 것처럼 나를 이용해 이야기를 꾸미는 밑작업과 연관이 있는 것인지 감감 무소식이더라.
솔직히 거기에 이르러서는 돈보다 실력자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더 컸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아쉬움 속에서 눈을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귀족치고 굉장히 이른 아침 식사를 제의한 켈바스트 변경백이 식사를 마친 뒤 내게 건네준 것은 문서같은 게 아니라 모험가 등급표처럼 생긴 도그 태그였다.
"아무래도 문서보다는 이러는 편이 낫겠지. 서부 지대 내에서는 어디에서도 쓸 수 있을 거라네."
역시 영향력이 굉장한 양반이었다. 악용할 가능성이 두렵지 않냐고 물었더니 편도 티켓에 가까운 물건이라고 하더라.
"켈바스트에서 멀어질 때에만 아무런 제약 없이 통과할 수 있는 물건이지. 그러니 돌아가는 길에 빼먹은 거 없는지 잘 확인하며 움직이게. 다시 돌아갔을 때 불이익이 있는 건 아니지만 조사를 받은 뒤에야 통과시켜줄 것이고, 자네에겐 많이 귀찮은 일이 될 거야."
진짜 별걸 다 만드네. 이거 사실 추방자한테나 쓰는 물건 아닐까?
뭐, 설령 그렇다고 한들 떠나기 급급한 나에겐 안성맞춤인 물건이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얌전히 감사를 표하며 물건을 받자 켈바스트 변경백도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모로 아쉬운 만남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할만큼 하고 무난하게 정리된 것 같군. 게이트와 관련된 문제는... 이티스엘과 원만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진행해 보도록 하지. 나머지 자잘한 사항은 사용인들이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언질을 넣어 두겠네."
준비가 끝날 때까지 얼마든지 손님으로 있으라는 뉘앙스같았지만, 그와 동시에 될 수 있으면 빨리 가라는 의미로 해석될 가능성도 있는 말이었다. 진상처럼 눌러앉는 것도 재미라면 재미겠지만, 그 대가가 나의 시간이다 보니 이번엔 참기로 했다.
"배려 감사합니다만, 마침 어제 준비를 끝마쳤기에 이대로 출발하고자 합니다."
"하긴, 갑작스럽게 게이트를 타고 넘어왔다고 했으니 지인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겠군."
"그...렇죠."
너무 걱정해서 아마 돌아가면 등짝에 불이 날 겁니다.
외면하고 있던 현실이 갑자기 코앞에 들이밀어진 탓에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지만, 어쨌든 켈바스트 변경백과의 마지막 담화는 무난하게 끝을 맺었다. 그렇게 자리를 파한 뒤, 내 모든 짐을 챙기고 나와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내 말과 그 위에 든든하게 얹어진 빵빵한 장비들을 보니 왜 캠핑하는 사람들이 장비병에 걸리는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기분 좋은 건 딱 거기까지였다.
내성을 벗어나 도시의 정돈된 길과 관문을 완전히 넘어 켈바스트를 벗어나자마자 눈 앞에 펼쳐진 것은 거대한 황야였고, 길게 입김을 내뱉으며 그 광경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한숨이 나오며 막막해졌다.
아무리 내가 열심히 미래를 설계하고 대비했다고 하지만 대뜸 아무것도 모르는 타지에 혼자 덩그러니 떨어지고 나니...
"하, 체감 좆되네."
헛웃음과 함께 욕만 나왔다. 어차피 말을 몰며 앞으로 나아가든, 제자리에 가만히 있든 막막한 것은 똑같았기에 일단은 앞으로 나아가며 막막해 하기로 했다.
아침 일찍이라서 그런지 아직은 길이라고 불릴 만한 곳을 따라 가고 있음에도 도시로 향하는 행렬이나 여행자들은 적었다. 아는 길이었다면 무료함 속에서 몸부림 쳤겠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홀로 지도에 의존해야 하는 나에게 그런 감정은 사치와 다름없었고, 정신 한 번 차릴 때마다 시간과 거리가 훅훅 지나가는 마법에 당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래서일까, 분명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며 출발했었는데 어느새 등 뒤로 해가 지기 시작했다.
"진짜 네 전 주인이 복덩이었다. 복덩이었어."
말도 잘 듣고 튼튼하기까지한 말의 목을 두드려주며 깊은 만족감을 얻은 나는, 강에서 조금 떨어진 숲 언저리에 터를 잡고 야영을 준비했다. 잠깐 둘러보니 장작으로 쓸만한 것들이 꽤 있어서 잠들기 전까지는 그냥 모닥불에 의지하기로 했다.
서둘러 실을 풀어 주변 나무에 걸치며 종을 달고, 텐트를 세운 뒤 마지막으로 안에 마석 난로와 방범 마도구를 설치하니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해가 완전히 떨어졌다. 텐트에 돈을 아꼈으면 자꾸만 쓰러지는 폴대와 가대에 시달리느라 시간에 못 맞췄을 게 분명했다.
"흠, 나쁘지 않아."
홀로 움직여서 그런지 몰라도 평소 해왔던 일인데 묘한 충족감이 몰려왔다. 생각보다 시간도 많이 남아서 내친김에 원래 간단하게 먹고 끝내려 했던 저녁 식사 계획을 전면 수정해 스튜를 끓여먹기로 했다.
그래 봤자 오늘 내일 안에 대충 구워 먹으려고 했던 고기를 감자와 여러 조미료를 넣고 끓일 뿐이지만.
가방이 있었다면 예전에 예카트리나와 대련 좀 한 대가로 제조법을 알게 된 러빌의 조미료를 꺼냈을 텐데, 아쉬운 대로 이것저것 넣고 끓여 맛을 봤지만 역시 많이 아쉬웠다. 이건 뭐 스튜라기보단 국에 가깝군.
"그래도 향은 좋네."
전생에는 요리 하나 제대로 못 해 먹었는데 나날이 발전하는 스스로의 실력이 감탄스러워 실실 쪼개며 완성되는 것을 멍하니 기다리고 있었더니, 어느 순간부터 인위적인 잡음이 멀찍이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최근 정말 질리도록 들어왔던 소리였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옘병, 마석 난로 쓸 걸 그랬나."
돈 아낀다고 모닥불을 지폈는데 저딴 소리가 벌써부터 들려오니 영 기분이 좋지 않다. 간간이 고성도 오고 가는 것을 귀 기울여 들어 보니 몬스터랑 싸우는 게 아니라 사람끼리 싸우는 모양이었다.
딱히 내 알 바는 아니었기에 접근만 하지 않으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느낌으로 방치하고 있었는데, 어째 싸우는 소리는 사라졌는데 불빛이 일렁이며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하...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사람을 건드리려고 하네."
괜히 더 방치했다가 기껏 설치한 함정도 끊어 먹고 내 식사도 조질 거 같아, 옆에 눕혀두었던 도끼를 주워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길을 가다가 도적들을 만난다.
서부 왕국 지대에서는 굉장히 흔히 있는 일이다. 도시와 마을이 밀접해 있는 곳조차 강도는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고, 조금만 거리가 멀어졌다 하면 적당히 터 좋은 곳을 꿰차고 먹이를 노리는 도적들이 존재했다.
왕국끼리의 싸움뿐만 아니라 귀족들간의 싸움도 잦은 곳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많은 용병단이 생겼다가 전투 한 번에 갈려 나가 도적으로 전락하는 경우는 너무 흔해서 이상하게 여기는 이조차 없다.
그러다 보니 흔해빠진 도적인 척 접근해 암살을 시도하거나, 원한 관계를 청산하려고 시도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바로 지금처럼.
"대장, 중요 인물들의 포박을 마쳤습니다."
긴 전투 끝에 패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이들의 뒤통수를 몽둥이로 후려치고 하나하나 묶는 작업을 마친 괴한이 덤덤한 어조로 보고하자, 대장이라 불린 남자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도 귀족 간의 흔하고 지저분한 뒷싸움 중 하나에 불과했으나, 결코 가벼운 일은 아니었다. 그들이 오늘 붙잡은 이들은 경쟁 가문에게 있어 거대한 족쇄로 자리 잡을 테니까. 불안했던 계획과 적들의 무시할 수 없는 실력에 비해 일이 잘 마무리되어 부상자도 적은 게 참으로 다행이었다.
"저 불빛은 어떻게 할까요? 소리를 들었을 게 분명합니다만."
"...내일 아침이라도 이상함을 눈치채고 이 주변을 살펴본다면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아주 약간의 불안 요소도 남겨둘 수 없었기에 죽여야만 했다. 관련 없는 제 3자를 끌어들이는 건 미안했지만, 운이 없었다고 여길 수밖에.
그의 대답을 들은 열명의 괴한들은 구구절절 설명을 듣기도 전에 재정비를 마치고는 부상자 다섯을 묶인 포로의 감시역으로 둔 채 숲 한쪽에서 일렁이는 불빛을 향해 움직였다. 기도비닉을 유지할 필요없이 서두르는 게 목적이었기에 횃불도 끄지 않은 채 접근했기에 이동은 빨랐다.
하지만 조우는 그들의 예상보다 더 빨랐다. 상대방 역시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횃불의 빛이 제대로 닿지 않아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기 힘든 거리에 서서 상대가 말했다.
"긴 말 안 한다. 뒈지기 싫으면 꺼져."
대뜸 보자마자 욕부터 박고 보는 게 거친 삶을 살아온 모험가나 용병인 듯했다. 한쪽 어깨에 큼직한 양손 도끼를 짊어진 것을 보아 모험가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냥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벅찰 거 같은데 굳이 자신이 꾸려놓은 야영지라는 이점을 버리고 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들어온 걸 보면 머리가 살짝 모자란 것 같기도 했다.
하긴, 그러니까 열 명을 상대로 저리 당당한 거겠지. 야만 전사라도 되는 모양이군.
"운이 없었다고 생각해라."
이미 수십 수백 번의 합을 맞추며 협공에 익숙해진 그들에겐 신호도, 기합도 필요 없었다. 대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정확하게 속도를 맞추며 괴한들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한 명이라고 방심할 생각은 없었다. 저런 행동을 취하는 것부터 이미 자기 실력에 자신감이 있다는 이야기였으니, 자칫 잘못하면 부상자가 생길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지랄을 해라."
아니나 다를까 상대방은 자신을 향해 열이나 되는 이들이 검을 뽑고 달려드는데도 겁먹지 않았다.
그저 도끼를 고쳐쥘 뿐.
이에 괴한들은 도끼의 사정거리를 짐작하고 휘두르기에 대비했다.
그렇게 예상한 사거리에서 도끼가 휘둘러짐과 동시에 몸을 뺄 준비를 한 찰나, 상대방이 휘파람을 불었다.
-피이이익!
신호. 협공. 함정.
휘파람 소리와 상대의 당당한 태도를 기반으로 완성된 합리적인 의심이 괴한들의 발목을 붙잡고 경계를 끌어올렸으나, 그땐 이미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다섯이 넘는 이들의 머리통을 꿰뚫은 뒤였다. 그 모습을 조금 뒤에서 확인한 대장이 경악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궁병이다! 함정이었...!"
하지만 그의 외침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휘두를 거라고 여겼던 도끼가 대뜸 날아와 둔탁한 충격과 함께 그의 가슴에 틀어박혔기 때문에.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몸이 붕 뜨는 것을 느끼면서도 대장은 의아함을 지우지 못했다. 이만한 무기를 무슨 손도끼처럼 던져? 바닥에 쓰러진 뒤에도 도끼의 무게 때문에 구르는 것조차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처음엔 생각할 여유가 있길래 자신이 입고 있는 갑옷이 제 역할을 한 줄 알았으나, 고개를 들어 살펴본 도끼는 한쪽 날이 반 이상이나 틀어박혀 있었다.
'제기랄, 죽음이 다가와서 무감각했던 거였군.'
그래도 무기를 던졌으니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가지고 앞을 바라봤지만, 보이는 건 그 짧은 순간에 다 죽어 버린 부하들과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도끼의 주인이었다. 그의 손에는 부하들의 것으로 보이는 검이 들려 있었다.
심지어 피가 뚝뚝 흐르는 걸 보니 그새 무기를 빼앗고 부하들을 베어죽이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씨발, 대체 어디서 이런 괴물 새끼가..."
이딴 게 말이나 되는 우연인가. 갑자기 세상 모든 게 억울해지는 마지막 순간, 그를 내려다보던 남자가 작게 읊조리며 검을 세워 들었다.
"운이 없었다고 생각해."
'개같은 야만인 새끼. 말 참 좆같게... 아, 내가 했던 말이군.'
핏물이 튀어나와 말도 할 수 없는 와중에 뒤늦은 깨달음을 얻은 대장의 심장에 검이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