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들 사이에서 유독 귀가 좋기로 정평이 나있던 괴한은 생각했다. 분명 교전이 일어난 것이 확실한데, 들리는 소리가 이상하다고.
"방금 궁병 어쩌고 하는 대장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그것도 매우 다급한 어조였다. 평소 대장의 성격을 생각했을 때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만큼 예측하지 못한 기습이었다는 것일까? 전투는 금방 끝난 것 같지만 어째 불길했다.
"모험가들이었나보지."
정작 다른 이들은 재정비 후 각자의 상처를 살피며 그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비록 그들의 상처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포로들에게 치명상은 없는지 일일이 확인해야 했기에 조금 서두르는 중이었고, 그 사이 들려오는 혼잣말에 심각하게 반응할 틈은 없었기 때문이다.
귀가 좋은 괴한도 동료의 말에 애써 불안을 털어내며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포로들을 도우려는 이들이었다면 진즉에 협공을 했을 것이고, 불의 크기로 볼 때 그리 많은 인원이 이동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궁병 하나가 기습을 했다고 해서 큰 문제가 생기는 일은 없다. 그렇게 결론 지은 괴한이 고개를 돌려 포로들을 살피자, 가장 상태가 멀쩡한 남자 한 명이 그를 향해 일갈했다.
"빌어먹을 제국의 앞잡이들. 그러고도 네놈들이 서부의 자식들이더냐!"
"그런 허튼 도발에 넘어갈 이는 아무도 없으니 기력이나 챙기시지. 그쪽이 뒈지면 우리도 곤란하거든."
혹여 혀라도 깨물까 싶어 대충 천조가리를 물리자 체통도 무시한 채 미친개처럼 발버둥 치는 꼴이 퍽 우스웠다. 제국의 앞잡이라니, 정말 제국이 서부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나? 자의식과잉도 이 정도면 심각한 수준이다.
반제국주의 파벌들은 전부 이런 식이었다. 제국의 세가 커지면 언젠가 서부 왕국 지대를 좀 먹고 패권을 휘두를 거라는 논리로 무장한 그들은 자신들을 진정한 서부의 자식들이라고 자칭하며 당위성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 논리엔 그리 많이 배우지 못한 괴한이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큰 구멍이 몇 개 있었다.
그중 가장 큼지막한 구멍 하나는 제국의 세가 이미 더럽게 크다는 거였고, 나머지 하나는 제국의 확장 정책이 이미 수년 전부터 인간들의 영토가 아닌 마수들이 잠식한 미개척지대로 선회한 상태라는 점이었다.
제국에게 있어 서부 지대는 저 멀리 있는 이티스엘과 별반 다르지 않은 땅이었다. 그쪽이 마족을 막는 장벽이라면 이쪽은 오크와 대초원의 마물들을 가로막는 장벽일 뿐.
어차피 서부 지대는 서로 치고받고 싸우느라 제국을 견제할 방법도 마땅치 않은데 굳이 생산성 떨어지는 왕국들을 집어삼키면서 무리하게 몸집을 키우고 불필요한 지출까지 만들어가며 남의 전선을 가져가는 건 머저리나 하는 짓이었다.
'그리고 제국은 머저리가 아니지.'
화룡이 죽고 대초원의 마물들과 오크들이 사라지는 날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날이 아니었기에 반제국주의자들의 주장은 헛소리다. 그들은 그저 과도한 자존심과 허영 때문에 현실을 보고 싶은 대로 볼 뿐이었다.
그 몰골이 새삼 한심해서 혀를 차는 사이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져서 고개를 돌린 괴한은 피가 식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생전 처음 보는 거구의 청년이 숲속에서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한 손에는 익숙한 형태의 검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시체가 달려 있는 큼직한 양손 도끼를 든 채 말이다.
순간 괴한의 머릿속에서 '시체가 달려 있다는 표현이 과연 올바른 표현인가? 라는 주제로 짧은 고찰이 발생했지만, 당장 그것보다 저 몰골을 더 잘 표현할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흉갑과 뼈를 파고드는 과정에서 꼈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자질구레한 게 아니라 그 시체가 대장이라는 점이었다.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면 적의가 있다고 판단하고 죽인다."
그저 무덤덤하게 중얼거리듯이 던진 말이었지만 아무도 저항하지 못했다. 멀쩡한 실력자 열 명이 순식간에 죽어 버리고 대장마저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 부상자 다섯이서 뭘 어떻게 해 볼 상황이 결코 아니었다.
그게 매복으로 인한 결과여도 그랬고, 청년 혼자서 벌인 일이면 더더욱 위험했다.
"너희에겐 세 가지 선택지가 있다."
그런 괴한들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청년이 검을 쥐고 있는 손을 들어 손가락 세 개를 폈다.
"하나는 여기서 그냥 뒈진다. 별거 없어. 얘 따라서 갈 길 가는 거 뿐이니까. 가장 심플하면서 빠르게 정리 가능한 선택지라 나에게도 좋은 일이지."
지금도 저녁인 스튜가 탈까 걱정이거든. 진심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청년의 손가락 하나가 접혔다.
"나머지 하나는 거기 묶인 놈들 내버려두고 도망친다. 이 새끼들은 다짜고짜 나한테 검을 휘둘렀으니 싹 다 죽은 거고, 너흰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들었으니 그 정도 배려는 해주지. 하지만 이건 번거롭게 포박까지 시도한 너희에게 그렇게까지 매력적인 선택지는 아닐 거라고 본다."
맞는 말이었다. 이대로 몸 성히 도망친다한들 반제국주의자들이 멀쩡히 제 갈 길을 가게 되면 그 후가 힘들어진다. 반제국주의자들은 이번 암살 및 납치 미수를 빌미 삼아 자신들의 주장에 힘을 더할 것이고, 이번 작전의 실패로 행동이 제약될 그들은 한동안 부득이하게 침묵해야만 했다.
의심의 눈초리가 거둬지기 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게 분명하다. 그동안 거기에 가세하는 이들이 늘어나면 정말 반제국주의 활동이 거세게 일어날지도 몰랐다.
그랬다간 결국 파멸이다. 제국이 서부에 관심이 없는 이유는 그들이 물지 않는 들개임과 동시에 딱히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집을 지키기 때문이다. 사료값이 들지 않아 방임하고 있던 들개가 갑자기 이빨을 들이밀면 제국은 자신들의 번견番犬을 동원하는 한이 있더라도 들개를 처분하려 들 것이다.
이전까지의 황제들은 그러지 않았지만 미래의 황제는 반드시 그러고도 남을 년이었다. 괴한이 짧은 순간 거기까지 생각을 마쳤을 때 청년이 마지막 선택지를 입에 담았다.
"거기서 마지막 선택지다. 묶인 놈들 다 끌고 따라와서, 이게 무슨 사단이며 왜 이 지랄을 쳤는지 전부 설명한 뒤, 내가 그냥 가라면 그냥 가고 데려가라면 데려가는 거. 그나마 너희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선택지지."
일방적이고 오만한 태도였지만, 아무도 청년의 말에 부정할 수 없었다.
"으읍! 읍읍! 으브읍!"
방금 괴한에게 입을 틀어막힌 반제국주의자만 제외하고. 그 눈치 없는 발악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지만 그는 계속 몸부림쳤다.
"...저 새끼 왜 저래?"
결국 의아함을 참지 못한 청년이 질문했지만 입을 막아놨으니 알 도리가 없었다. 결국 잠깐 눈치를 보던 괴한은 청년의 손짓에 따라 한숨을 내쉬며 물려놓았던 천을 풀어 주어야 했다.
그러자 기세 등등해진 반제국주의자가 목청껏 외쳤다.
"꼴 좋다 빌어먹을 제국주의자 놈들!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들에게 딱 알맞은 최후로구나! 서부는 승리한다! 으하하핫!"
욱하는 마음에 순간 그대로 귓방망이를 후려치고 싶었지만,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기에 괴한들은 주먹만 쥘 뿐이었다. 사실 이것만으로 청년이 원하던 설명은 끝난 것과 다름없었기에 허탈하기까지 했다.
압도적인 무력이나 권력 앞에서 손쓸 길이 없는 상황은 숱하게 겪어왔으나 이런 형태인 적은 없었다. 천재지변으로 피해를 입었더라면 이것보다는 덜 억울했을 것이다. 길가다 마주친 모험가의 입을 막으려 했다가 몰살을 당하...
"......"
미처 다 죽이지 못한 괴한의 양심이 억울할 게 없긴 하다는 것을 뒤늦게 인정했다. 대의든 뭐든 청년이 약했다면 죽은 건 그가 됐을 것이다. 태도를 보아하니 딱히 저 반제국주의자들과 한 패인 것도 아니니 그랬다면 정말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했으리라.
머리를 굴리고 발악을 해봤자 이미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일까. 냉정해진 머리로 판단하며 청년을 바라본 괴한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청년의 표정은 굉장히 미묘했다.
"제국주의자? 그렇게 말하는 넌 반제국주의자라는 거냐?"
"하! 당연하지!"
"...내가 잘 이해가 안돼서 그러는데, 대체 왜? 제국은 대공세 이후 서부 왕국에 관심 끊지 않았냐? 남남인 거로 아는데?"
무식하기 그지없던 태도와 달리 약간의 지식과 상식은 있는지 괴한 못지않게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떨떠름하게 되묻는 청년에게, 묶여 있는 남자는 핏발까지 세워가며 말했다.
"제국주의자놈들이 떠들 법한 헛소리로군! 제국이 한낱 오크들 때문에 서부를 노리지 않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 대답에 청년의 반응이 순식간에 냉담해졌다. 미간을 찡그리고 잠시 눈을 감은 채 뭔가 골똘이 고민한 청년이 괴한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너네도 이렇게 생각하냐? 오크따위 별거 아니라고?"
"...그건 저 미친놈들이 세상 물정을 몰라서 지껄이는 헛소리에 불과하오."
"하오? 이 지경이 되어서도 하오체를 써? 목이 좀 뻣뻣한 거 같은데 반 정도 꺾어 줄까?"
"...불과합니다."
말투로 꼬투리까지 잡는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약간 지식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똑똑한 놈인 듯싶었다.
순간 죽음의 위협을 느껴 바로 말을 바꾸자 청년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차며 아직도 대장의 시체에 박혀 있던 도끼를 뽑아 들었다.
"데려가."
"...예?"
"데려가라고."
방금까지 기고만장했던 반제국주의자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괴한 역시 마찬가지로 눈을 뜨며 청년을 바라보자 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시선으로 둘을 훑어보고는 짧게 설명했다.
"황녀님 만세 씨발놈들아."
이에 반제국주의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며 뭐라고 외치려 했으나 괴한의 행동이 더 빨랐다. 그는 아까 생각했던 대로 귓방망이를 날린 뒤 충만하게 차오르는 통쾌함 속에서 다시 천을 물렸다.
그리고 정말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성큼성큼 걸어서 멀어지려는 청년에게 물었다.
"정말 이걸로 끝입니까?"
그 질문이 청년을 멈춰 세웠다. 그것만으로 괴한들 모두가 움찔거렸지만, 청년에게서는 이제 아무런 적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가?"
"당신이 저희의 일행을 죽인 것을 두고 뭐라 할 생각은 없습니다. 당신의 실력이 부족했다면 죽는 건 그들이 아니라 당신이었을 거고, 그건 굉장히 억울한 죽음이 되었을 테죠. 하지만, 지금 이 모든 상황이 정말 방금 나눈 대화만으로 마무리되고 뒤탈 없이 끝난다고 믿어도 되겠습니까?"
"변심해서 뒤통수 치지 않을 거냐는 이야기를 참 길게도 말한다. 스튜 탄다고 씨발."
자신을 죽이려고 시도한 것보다 당장 스튜가 탈지도 모르는 상황이 더 짜증난다는 것처럼 대답하며 청년이 괴한과 눈을 마주쳤다.
"공격 판단을 내린 대가리도 죽었고, 공격한 놈들도 죽었으며,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말을 잘 들어서 기회를 줬을 뿐이다. 그리고 거기서 신들께서 너희를 향해 미소 지었을 뿐이지. 하지만 그게 내가 너희에게 맹세까지 해가며 뒤통수 안 친다는 보장을 해야 한다는 걸 의미하진 않아. 너희가 믿든 안 믿든 상관없어. 꺼지던가, 지금이라도 뒈지던가."
순간의 호기심에게 져서 목숨을 날릴 위협을 또 다시 느끼게 된 괴한은 두말하지 않고 동료들과 함께 포로들을 챙겼다. 다행스럽게도 행동방침을 결정하는데 의견 교환이 필요하진 않았다. 청년은 그런 괴한들에게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 등을 돌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너희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두 번은 없다. 알아서 잘 피해라."
"자, 잠깐! 그대가 누구인지는 알아야 조심할 거 아닙니까!"
동료들은 왜 자꾸 지나가려는 자연재해를 붙잡냐고 눈으로 욕했지만 결코 간과하면 안 될 중요한 내용이었기에 괴한은 꿋꿋했다. 외모만 전달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혹여 그들에게 명령을 내린 이가 죽은 이들의 복수를 바라더라도 이름까지는 알아야 했다.
한 번 더 눈으로 욕먹을 각오를 한 것과 달리, 청년은 멀어져 가면서도 또렷한 발음으로 대답해주었다.
"엘드미아 에가."
인연이 될지, 악연이 될지 알 수 없는 만남을 뒤로한 채 자신을 엘드미아라고 밝힌 청년은 숲속으로 멀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