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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44화 (344/412)

얼핏 보면 위협이 사라지고 소강상태에 이른 것 같지만, 아직까지는 나를 포위하던 게 도적에서 엘프들로 바뀌었을 뿐이다.

오히려 어중간한 도적들보다 상태가 안 좋았다. 난 이들이 주변에 있다는 것조차 몰랐으니까. 어쩌면 아실리에가 보여줬던 정령 축지법으로 순식간에 다가와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위험 요소라는 건 변함없다.

심지어 보이는 것 외에 더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는지, 무슨 수로 나를 특정했는지 알 수 없으니 저들이 적일 경우 눈앞에 펼쳐질 수많은 위험과 변수를 염두해야만 했다.

내가 살면서 이종족에게 칼맞을 짓은 한 적 없다고 자부하지만 혹시 모르잖아?

"맞긴 한데, 그쪽은 뉘신지?"

그렇다고 해서 저자세로 나가거나 떠볼 생각은 없었다. 그딴 이유로 내 이름 밝히는 걸 주저할 수는 없지.

내 당당한 태도에 이름을 물었던 엘프가 귀를 까딱거리며 반응했다.

"...우리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에 거리까지 내줬으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거리낌 없이 인정하는 건 조금 안일한 판단 아닌가?"

어라? 매우 보기 드문 반응이다.

후드 아래로 얼핏 보이는 얼굴은 마치 실수를 저지른 애를 바라보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분명 자신들이 우위에 있다는 뉘앙스이기는 한데... 그거로 협박을 하는 것도 아니고 되려 지적하고 알려주는 분위기라니 굉장히 미묘하네. 뭐 하는 친구들이지?

일단 묘한 호의가 함께하는 반응인지라 그의 말에 대놓고 따지기보다 제대로 정정해주기로 했다.

"조금도 안일하지 않은데."

"도적들을 처리해준 것에 대한 작은 감사의 표시로 왜 그렇게 판단하는지 알 수 있겠나?"

정정. 묘한 호의가 아니라 굉장히 정중하고 온건하며 확실한 호의였다. 그렇다면 나도 응당 걸맞는 대우를 해줘야지.

"당신들이 나한테 활을 겨누는 것보다 내 바늘이 죄다 꿰뚫는 게 더 빠르니까?"

"...바늘?"

피익, 하고 짧게 휘파람을 붐과 동시에 파우치에서 치솟은 바늘들이 순식간에 엘프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다치게 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날 협박 하는 것도 아니고, 공격적인 언사를 내비친 것도 아니며 정중하기까지 했으니까. 그저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고자 그들의 머리 옆에서 우뚝 멈춰 선 바늘을 보여 준 것에 불과했다.

"인사해. 내 원거리 친구 바늘이라고 해."

물론 제대로 된 반응조차 못했는데 머리 옆에 흉기가 떠 있는 상황에 맞닥들인 당사자들에겐 위협으로 느껴지겠지만, 정중할지언정 아직 피아구분이 안 되는 상황이니 그 정도는 애교로 봐줘야지.

겉으로 보일 정도로 바짝 긴장한 엘프들을 뒤로한 채 바늘을 회수하자, 대화를 나누던 엘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실리에가 어처구니없는 인간을 만났군."

그리고 여기서 튀어나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름에 이번만큼은 진짜 당황했다.

"그 한 마디로 지금 물어볼 게 엄청 많이 생겼는데."

머리가 따라가질 못했지만 상황을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실리에가 고향 사람들에게 모종의 방법으로 연락을 취했고, 그 사람들이 날 찾으러 서부까지 내려왔다는 거겠지. 그게 아니고서는 저 위쪽 북부에 있는 엘프들 중 나를 알고 있는 엘프들이 우연히 서부로 내려와 우연히 내 소문을 듣고 마주쳤다는 건데 전자의 추측도 어이가 없지만 후자는 더 말이 안 되잖아.

문제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는 거다. 이동은 숲을 이용한 엘프 축지법을 썼다고 해도, 연락까지 가능하다고?

"다행이군. 우리도 물어보고 싶은 게 엄청 많거든."

다행히 상대방이 귀쟁이가 아니라 엘프인 덕에 대화가 성립될 가능성이 보였다.

내 반응을 본 엘프가 활시위를 풀자 다른 엘프들도 마찬가지로 경계를 풀었다. 그리고 하나하나 후드를 벗기 시작하자, 전형적으로 선이 고운 미남미녀가 아니라 꽤나 강인한 인상의 미남미녀들이 나를 포위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순간 자신들의 미모를 뽐내며 나를 오징어로 만드는 게 목적인가 싶어 딱밤이 마려워질 뻔했지만 나와 대화를 나누던 엘프가 호의 가득한 시선과 함께 악수를 권했기에 겨우 참을 수 있었다.

"시련을 통과한 자, 셀레비안 리즈란데스라고 하네. 흔히 하이 엘프라고 부르지. 아, 이건 아실리에에게 들어서 알고 있으려나?"

“예?”

“아실리에도 하이 엘프니까. 그녀가 말하지 않았나?”

엥. 처음 듣는데요.

졸지에 7명이 늘어나버린 탓에 마석 난로만으로는 온기를 채울 수 없어 다른 엘프들이 모닥불을 지피는 동안, 자신을 셀레비안이라 소개한 남자 엘프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거기엔 내가 의도적으로 아실리에에게 물어보지 않거나 그녀가 굳이 알려주지 않았던 과거의 이야기도 조금씩은 포함되어 있었다. 덕분에 나는 어쩌다가 그녀가 노예로 붙잡혀 머나먼 이티스엘까지 왔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실상 그녀 덕분에 엘프 사냥꾼들을 저지하고 몰아낼 수 있었지.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워낙 실력이 좋은 놈들이었던 터라 그 후에도 다방면으로 수소문했지만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 없어 반쯤 포기했었네.”

사냥이란 건 어찌 보면 굉장히 단순하다.

대상의 생태를 잘 파악하고, 대상을 확실하게 습격할 방법이 있거나 아예 대상보다 더 강하면 되니까. 그런 의미에서 엘프 사냥꾼이라는 놈들은 전생에서 보던 판타지 소설 속에서 나오거나, 내가 한번 거하게 조져놨던 노예 사냥꾼들하고는 궤를 달리한다.

명예보다 돈이 더 좋은 오러 익스퍼트 급의 인간들이 엘프를 잡아다가 파는 게 굉장히 많은 돈이 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직한 게 엘프 사냥꾼이니까.

그런 인간 한 둘을 주축 삼아 철저하게 사냥 도구를 준비하고 보조해서 움직이는 놈들은 그쪽 방면으로 프로가 맞다. 애초에 숲에서는 축지법까지 써가며 움직일 수 있는 엘프를 잡아다가 판다는 것부터가 범상치 않은 새끼들이지.

그 노력으로 용병질을 했으면 나라도 세웠을 거다.

당연히 엘프들도 바보 병신 머저리가 아니라서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지만, 그럴수록 사로잡은 엘프의 몸값이 치솟을 뿐이니 이미 눈이 돌아가 버린 놈들 입장에서는 극한의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으로 보일 뿐이다.

아실리에는 그런 엘프 사냥꾼 집단 하나를 기습해 주축이 되는 놈들 셋을 조지는 과정에서 붙잡힌 거였다. 셋 다 오러 익스퍼트 급이라서 그녀의 부족 뿐만 아니라 인근 부족들까지 전부 이를 갈 정도였다고 하는데, 몇 날 며칠을 노리고 기회를 본 끝에 시도한 기습 끝에 그 셋을 죽이는 것까지는 성공했으나 도주엔 실패했다고 한다.

냉정하게 판단했을 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녀의 실력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녀는 유능한 척후이자 사냥꾼이면서 다재다능인거지 특출나게 강한 게 아니거든. 숲이 아니라면 작정하고 접근하는 오러 익스퍼트 한 명도 상대하기 힘들다고 그녀 스스로 말했었으니 이건 오피셜이다.

물론 역으로 말하자면 숲속에서는 익스퍼트도 씹어 먹는다는 이야기다. 동시에 그 정도의 이점을 쥐고 있는 모든 엘프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잡아 죽이고 싶어 하는데 그러기 쉽지 않은 게 실력 있는 엘프 사냥꾼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했고.

어쨌든 그렇게 수년이 흘렀는데 갑자기 연락이 왔다는 거다. 나 좀 찾아서 데려와 달라고. 생사조차 알 수 없었던 영웅이 대뜸 그런 부탁을 했으니 부족에서 난리가 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솔직히 급히 조를 꾸리고 움직이면서도 반신반의했는데 귀걸이를 보고 나서야 확신이 섰다네. 무사히 살아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제국 아카데미에서도 그랬지만 아무래도 아실리에가 선물해준 귀걸이는 여러 의미와 상징이 담긴 모양이다. 그렇게 진심으로 안도하며 옅게 웃는 셀레비안과 달리 다른 엘프들은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침묵을 유지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하이 엘프는 어떤 이들을 말하는 겁니까? 아까 시련을 통과한 자라고 하셨는데.”

“아, 세계수의 시련을 통과하고 인정을 받은 엘프들을 뜻하는 거라네. 굳이 비유하면...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매우 고된 훈련과 시험을 통과한 전사같은 거라고 볼 수 있겠군.”

“...귀족 같은 게 아니라요?”

“하하하, 우리에게 귀족 같은 지위는 딱히 없다네.”

과거의 판타지 지식을 기반으로 무슨 고귀한 피를 지녔거나 귀족 같은 이들을 지칭하는 건가했더니 엄청 명예로운 특전사에 가까웠을 줄이야.

“물론 우리들에게는 의미가 크지. 아샤께서 직접 인정해주신 것과 다를 바 없으니 말이야.”

“...조금 난해하군요.”

“그럴 수 있지. 종족의 차이라네. 그보다 이젠 우리 좀 물어보고 싶군. 어떻게 아실리에를 만나게 된 건가?”

쫑긋. 방금 전까지 숙연한 분위기를 유지하던 엘프들의 귀가 동시 다발적으로 솟구쳤다.

그걸 보고 나니 숙연한 게 아니라 지루해서 입 다물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지만, 일단은 그 반응이 중요한 게 아니었기에 최대한 추려서 우리의 만남을 설명해주었다.

“...그러니까, 그녀를 붙잡고 이동하던 노예 상인들이 정체불명의 집단에게 습격을 당한 걸 우연히 발견한 도적들과 싸워서 그녀를 풀어줬다고?”

“정확합니다.”

딱히 어려운 내용도 아닌데 굳이 요약을 해야하나 싶었지만 내색하지 않는 사이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던 셀레비안이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그때가 8살이었고?”

“네.”

흔쾌히 대답해주니 이번에는 나를 위아래로 한번 훑어보며 굉장히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질문한다.

“...지금 15살이고?”

“맞습니다.”

내가 좀 많이 크긴 하니 저런 반응을 보일 수 있지.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엘프들의 표정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근데 어째서인지 한층 더 심각해진 얼굴로 입을 틀어막은 채 고민하던 셀레비안이 매우 조심스럽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 내가 인족과 교류를 한 지 좀 시간이 많이 지나서 그러네만, 혹시 인족의 평균 수명이 많이 줄었나...?”

“엘프들에 비하면야 한순간이지만 줄지는 않았을 겁니다.”

오그웬에서 평범하게 지내던 어르신 한 분도 나이가 여든이었는데 특별한 취급을 받지는 않았으니 못해도 그 정도까지는 살 거다. 오러나 마나를 익힌 인간들은 훨씬 더 오래 산다고 하니 대충 백 세는 넘기지 않을까?

전생한 뒤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주제에 대해 고민하며 셀레비안의 표정을 확인했더니, 이젠 아예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대체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던 찰나, 그의 입이 힘겹게 열리며 작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인족이라지만 반려로는 좀... 그, 많이 어리지 않나...?”

...누나?

대체 어디까지 말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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