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실리에에 대한 열렬한 변론과 옹호를 펼쳐야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조장. 애초에 인족은 백 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피고 지고를 반복하는 이들이니, 나이를 두고 보는 게 아니라 이 인족을 두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요?"
"으음, 하지만 내 마지막 기억이 맞다면 아무리 인족이라 하더라도 성년식은..."
"그건 일의 긴박함을 알리기 위한 수단이었을 가능성도..."
"숲의 정령들은 장문의 내용 전달을 어려워하니까요. 효과적이긴 했다고 봅니다."
진지한 얼굴로 셀레비안과 같이 고민하던 엘프들이 알아서 아실리에를 옹호해줬기 때문이다.
뭔가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타종족을 바라보는 것치고 굉장히 열린 시각으로 열렬히 이루어지는 대화에 끼지 못해 잠시 침묵하고 있었더니, 이내 생각을 정리한 셀레비안이 멋쩍은 듯 사과했다.
"이거 정말 미안하네. 난 아실리에와 달리 평생을 부족의 곁에서만 지냈거든.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폐쇄적인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네. 엄연히 아실리에의 은인인데 또 생각이 한쪽으로 치우졌어."
차마 '그게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말할 수 없었기에, 난 애써 웃으며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괜찮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죠."
나야 서른살 먹고 아실리에와 연애하는 것에 가까운 느낌이라지만 남들 입장에서는 전혀 다르게 보일 수밖에. 되려 이렇게까지 편견 없이 받아들이려고 하는 모습이 더 생소하고 신기하다.
그래도 '아실리에가 생각이 짧거나 사람 보는 눈이 없지는 않았으니까...' 라고 중얼거리며 열심히 스스로를 납득시키려는 모습을 보면 엘프들의 관점에서도 모두가 공감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나 보다.
"아무튼 서부 왕국 지대에 아직 깨어 있는 숲이 많아 다행이었어. 조금만 더 겨울이 깊어졌더라면 이렇게 빨리 만나지는 못했을 텐데."
가볍게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셀레비안이 던진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림짐작은 가능했다. 숲을 통해 이동하는 걸 말하는 거겠지. 나도 '아실리에 페도필리아 의혹'이라는 주제를 오래 붙잡고 있어 봤자 이로울 게 없는 입장이었기에 그 주제를 덥썩 물었다.
"아실리에를 통해 한 번 경험했었습니다. 숲을 통해 이동한거군요?"
"맞아. 고생한 자네한테는 실례일 수 있지만 떨어진 곳이 서부라서 다행이었지. 이곳은 화룡의 영역과 가까워서 겨울의 영향이 많이 늦게 오거든."
세상 편리해 보이던 이동법에도 숲이 어느 정도 이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 외에 다른 제약이 있는 모양이었다. 셀레비안은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를 보이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여기서 조금 더 동쪽으로 이동하면 세계수까지 돌아가기에 충분한 숲이 있다네. 일단 그곳을 통해 부족으로 돌아가고 나면 이티스엘과 최대한 가까운 곳까지 이동할 수 있겠지."
숲과 숲이 이어지면 이동 가능, 세계수와 숲이 이어져 있으면 숲에서 세계수로 이동 가능, 세계수에서는 숲과 이어져 있지 않아도 활성화만 되어 있으면 어디든 이동 가능인 건가? 너무나도 개사기 종족 특성이라 감탄 밖에 안 나오는 와중에 그게 겉으로 티가 났는지 셀레비안이 작게 웃었다.
"세계수와 숲의 정령이 윤허해준 권능이 매우 유용한 건 사실이지만 자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만능은 아닐세. 이번 사례는... 그녀가 우리를 위해 해준 것에 대한 보답이 섞여 있다고 할 수 있지."
"흠, 그렇군요. 어쨌든 초면인데도 호의적으로 대해주실 뿐만 아니라 도움까지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 지금 미리 말해두는 거지만, 잠깐 스쳐 지나갈지라도 부족원 모두가 자네에게 호의적이진 않을 거야. 내가 편견 없이 세상을 보기 위해 노력하는 데에 다 이유가 있는 환경이라고 미리 말해두고 싶군."
'세상 사람들이 다 너를 좋아하지는 않을 거란다.' 같은 어린아이 교육용 멘트 같은 게 아니라 엘프 중에서 나를 곱게 보지 않는 이들이 있을 거라는 말이었다.
뭐, 그럴 수 있지. 인간도 혐간이 있는데 엘프라고 깐프나 귀쟁이가 있지 말라는 법은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금도 개의치 않으니까요."
"으음... 직접 겪으면 또 다를 수 있겠지만, 그렇게 말해 주니 다행이군."
걱정도 팔자로군. 진짜 괜찮은데.
뭔가 불미스러운 일을 겪게 되면 안 괜찮은 건 걔들이 될 테니까.
◈
갑작스럽게 연락한 아실리에 때문에 정신없는 며칠을 보낸 셀레비안은 조금 가벼워 보였던 첫 대면과 달리 굉장히 정중하고 침착한 엘드미아를 보며 속으로 웃었다.
평생 자기는 저런 귀걸이는 선물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여장부가 아실리에였다. 실력 좋은 동료이긴 했으나, 그 괄괄함과 사나운 성격 때문에 대체 누가 저걸 데려가냐고 반쯤 놀리기도 했었다.
모난 곳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모두와 잘 지내던 자랑스러운 부족의 일원이었고, 그랬기에 그녀의 수색을 중단하기로 부족 회의에서 결정이 내려졌을 때 숭고한 희생의 결말이 노예가 되는 거냐며 많은 이들이 분노하기도 했다.
그런데 큰 봉변을 당하기 전에 이런 기이한 인연을 얻어 무사할 수 있었다니, 그야말로 아샤께서 함께 했다고 감히 장담할 수 있는 수준이다.
"아, 혹시 동행하는 동안 제가 유의해야 할 게 있을까요?"
무엇보다 다행인 건 엘드미아와 대화를 나누고 그가 취하는 행동을 볼수록 처음에 느꼈던 불미스러운 오해가 사그라든다는 점이었다. 그와 만나고 완전히 밤이 내리기까지 몇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음에도 그가 15세의 인간이라는 점을 망각하기 일쑤였다.
외적인 요인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그랬다. 어지간한 인간들보다 대화하기 편한 어린 인간을 보며 셀레비안은 아주 조금은 아실리에의 선택을 납득할 수 있을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딱히 없다네. 하지만 서부 왕국 지대의 사람들은 이종족에게 그다지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다 보니 우리로 인해 불미스러운 일을 겪을 가능성은 있겠군."
일곱이나 있으니 안심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뭉쳐 있기 때문에 되려 더 적의를 비추는 것에 가까운 곳이었다.
어쩌면 시도 때도 없이 영역을 침범하는 오크들 때문에 더욱 그런 성향이 짙어졌을지도 모를 노릇이었으나, 지금은 그런 이유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엘드미아는 그런 셀레비안의 조언에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니 괜찮습니다. 서로가 서로로 인해 불미스러운 일을 겪을 가능성이 있게 되었으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면 되겠군요."
나름대로 분위기를 풀고 부담을 덜어 주려는 배려였을까? 그렇다면 퍽 유쾌한 농담이었기에 셀레비안을 비롯한 다른 엘프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웃어 보였다. 인간들은 이럴 때 신사적이라고 표현한다 했던가. 이어지는 부드러운 분위기 탓에 셀레비안은 엘드미아의 첫 인상을 완전히 잊어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다음 날을 맞이하고, 도보로 이동해야 하는 그들의 걸음에 맞춰 천천히 이동하여 이틀 만에 인간들의 도시 문턱에 도착하기 전까지 꾸준히 이야기를 나눈 끝에, 셀레비안을 비롯한 다른 엘프들은 어쩌면 아실리에가 범상치 않은 선견지명이 있었기에 엘드미아라는 인간을 미래의 남편감으로 삼은 게 아닌가 하는 방향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댁은 괜찮지만 귀쟁이들은 안 돼."
그래. 도시의 문턱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제대로 신분을 증명하는 패까지 보여줬음에도 당당하게 거절하는 관문지기의 태도와 이를 본 도시에 들어서기 위해 기다리던 이들의 비웃음이 흘렀지만 셀레비안을 비롯한 엘프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신의 비호를 받는다는 자각없이 위태로운 삶을 이어 나가는 이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자신들의 불안을 희석시키기 위해 무분별한 적의를 흘리기도 하는 법이니까.
저 정도 태도는 서부에서 그나마 양호한 편이었다. 동화 몇 개만으로 충분히 해결이 될 정도로 말이다.
"왜?"
하지만 엘드미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되물었다. 지금까지 그가 보여 준 예의 바른 모습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그 반응에 엘프들이 귀를 까딱이며 의아함을 표하는 사이 새삼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관문지기가 대답했다.
"왜긴 왜야. 저 귀쟁이들이 도시에서 뭔 짓을 할 줄 알고?"
"그건 너희가 제대로 확인한 뒤 도시에 들여보낸 다음 눈여겨 볼 일이고. 당장 저들이 아무런 증명패도 없었으면 납득하겠는데 그것도 아니잖아? 혹시라도 문제를 일으키면 나나 켈바스트 변경백이 감당할 문제인거지, 네가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것에 대한 정당한 사유가 되지는 않는데?"
허, 꽤 타당한 주장이었다. 하지만 법과 논리보다 폭력이 더 가까운 이들에게 저런 말이 통할 거라고 보긴 힘들었다.
실제로 그의 말을 들은 관문지기의 표정이 더욱 구겨졌다. 그는 쥐고 있던 창을 뒤집어 창대로 엘드미아의 가슴팍을 툭툭 두드리며 씹어 내뱉듯이 말을 이었다.
"허, 씨발. 어디서 못 배워 먹은 모험가 새끼가 관문지기에게 훈수를 하려드네? 너 이 새끼 켈바스트 증명패 있다고 뵈는 게 없나 본데, 그거 있다고 감옥 안 들어가는 게 아니야 이 새끼야. 한 일주일간 쥐새끼들이랑 같이 박혀 있다가 나와볼래?"
"재밌네."
재미? 이게?
순간 자기가 잘못 들었나 싶어서 엘드미아의 얼굴을 확인한 셀레비안은 그의 입가에 걸려 있는 사나운 미소에 강한 불안감을 느껴야만 했다. 오죽했으면 당당하게 공권력을 등에 업고 창대를 휘두르던 관문지기마저 살짝 움찔했을 정도로 위협적인 미소였다.
하지만 엘드미아는 그런 주변의 반응과 제 가슴팍을 치는 창대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미소를 유지하며 되물을 뿐이었다.
"넌 법 좀 알고 있냐?"
그 질문이 무슨 의미인지 셀레비안이 알게 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