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이라도 쓰는 것 같군.'
당연하게도 큰 소동이 일어났다. 이에 처음엔 가세하려고 했으나, 엘드미아가 정중히 막아서는 바람에 뒤에서 구경만 해야 했다.
불편한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관문지기의 공격을 피해가며 뒤에서 시비를 걸어온 용병과 여행자들 열 댓명을 홀로 때려 눕히는 건 솔직히 말해 굉장히 진귀한 볼거리였다. 조금 통쾌하다고 느낄 정도로 말이다.
그 와중에 관문지기에게는 손도 안댔다는 건 나중에 도시 내성에서 기사가 경비대를 끌고 왔을 때가 되어서야 눈치챌 수 있었다.
"기, 기사님! 저놈입니다! 저놈이 난동을 부리고 폭행을 일삼았습니다!"
대번 자신들이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이 아니라는 것은 깨달았지만 차마 막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하던 관문지기들이 기사에게 달라붙어 하소연을 하는 순간, 셀레비안은 상황이 매우 골치 아프게 돌아갈 거라고 예상했다. 한껏 험악해진 인상의 기사가 다가서서 엘드미아와 눈을 마주칠 때까지도 그랬고, 그 뒤에 있는 서른이 넘는 도시 경비대를 확인하고는 거의 확신하다시피 했다.
"사실인가?"
"거짓이다."
그리고 기사를 눈앞에 두고도 너무나도 당당하게 반말로 자기주장을 펼치는 엘드미아의 모습에 혀를 내둘러야 했다. 그나마 셀레비안을 비롯한 엘프들은 일행이니 혀를 내두르는 것에 그쳤지, 그에게 처맞고 나자빠진 이들이나 관문지기들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분노했다.
"저, 저 뻔뻔한!"
그러나 엘드미아는 주변의 소란에는 아랑곳도 하지 않으며 그저 당당하기만 한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기사를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나는 난동을 부린 적 없다. 관문지기에게 의무를 다 하라고 했을 뿐이고, 그 과정에서 내가 길을 막고 있다고 여긴 다른 이들이 시비를 걸어 대응한 게 전부지. 무기를 뽑지도 않았으며, 도시의 병력에게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았다. 오히려 무기는 저들이 뽑았고, 관문지기는 멀쩡히 신원 증명을 마친 엘프들의 출입을 사리사욕만으로 거절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런 주장을 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건가?"
"알다마다."
켈바스트 변경백의 신원 보증패를 내밀며 덤덤하게 대답하는 엘드미아의 모습에 기사의 얼굴이 한 번 더 구겨졌다. 당장 연행하라고 소리칠 줄 알았는데, 기사는 경비병들에게 명령하더니 관문 앞에 있는 이들의 증언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처벌을 받은 건 관문지기였다. 엘드미아는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였으나 셀레비안을 비롯한 엘프들은 적잖이 당황했다.
사유는 직권 남용과 월권행위 그리고 근무 태만. 졸지에 모두가 보는 앞에서 도시의 관문지기를 벌하는 입장이 되어 버린 기사가 상황을 정리하고 엘드미아를 노려보며 말했다.
"부디 감당할 능력이 있길 바라네. 그렇지 않다면 참으로 곤란해질 테니까. 서부에서 엘프들은... 그냥 엘프일 뿐이니."
인간들의 삶에 대해 많은 지식을 지니지 못한 셀레비안이었지만 기사가 무슨 의미를 담아 한 말인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동화 몇 개로도 조용히 끝날 수 있었을 일을 이렇게까지 키워 기어이 창피를 줬으니, 설령 엘드미아의 행동이 정당하다 하더라도 시선이 고울 수는 없을 것이다.
충분히 조용히, 그리고 원만하게 해결할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기사는 그러지 않은 오만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은연중에 압박하고 있었다.
"조언 고맙군. 보답으로 나도 조언 하나 하지."
그 속뜻을 이해못했을 리 없는데도, 한없이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며 기사의 견갑을 두드린 엘드미아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난 할 만하니까 한다."
셀레비안은 몰랐다. 그게 정신 나간 여행길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건 엘드미아를 감시하고 있던 감시자도 마찬가지였다.
'이거 완전 미친 새끼 아니야...?'
몇 가지 주의사항과 동시에 어떤 인물인지 추적하며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까지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조금 특별하다 한들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는 주변에서 감시와 추적에 타고난 재능이 있다고 칭찬할 정도로 뛰어나기도 했고, 일반적인 추적자들과 달리 마법을 이용한 은신이 특기였기 때문이다.
남들은 그런 마법 실력을 지니고 한낱 밀정 역할이나 하냐며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경쟁 상대라 부를 만한 이도 없고, 몸값은 높으며, 안전하고 자유로운 일이라는 걸 굳이 떠들고 다녀서 가만히 있으면 안정적으로 먹고 살 수 있는 길에 스스로 재를 뿌릴 생각은 없었다.
이 바닥은 유능한 경쟁 상대가 적을 수록 좋았다. 잠정적 고객이 될 수 있는 이가 그의 실력을 높이 산 덕에 제거당할 위협에서 벗어난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런 마음가짐으로 일을 받았는데, 어째 대상이 아주 제대로 미친놈인 거 같아 불안감이 엄습했다.
'대체 뭘 믿고 도시를 상대로 시비를 거는 거야?'
항상 하던대로 인근에 몸을 숨기고 도청 마법을 통해 이야기를 주워듣다가 하마터면 집중이 흐트러질 뻔했다. 살다 살다 이런 미친놈은 또 처음이었다. 괜히 근처에 있다가 불똥이 튈 거 같아 조금 더 먼 거리에서 관찰하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상황은 감시자의 예상대로 흘러 갔다. 대상이 여관에서 묵는 동안 동업자로 예상되는 이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그 행적을 어딘가로 보고하기 시작했다.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불 보듯 뻔했다.
아무리 엘프들이 함께 한다고 한들 대도시의 영주씩이나 되면 일개 모험가를 위협할 수단은 지천에 널려있는 법이다. 길거리 건달부터 시작해서 몰래 움직이는 폭력 집단들까지. 하루가 멀다 하고 이곳저곳에서 전투가 일어나는 서부 왕국 지대에 그런 이들은 매우 흔했다.
오죽하면 사람 잡는 사람은 서부에서 구하라는 말까지 있겠는가?
도시를 벗어나는 순간 영주에게 의뢰를 받은 이들이 무례의 대가를 회수하고자 달려들 게 분명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감시 대상은 세상 편하게 휴식을 취한 뒤 다음 날이 되자마자 엘프들과 함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도시를 벗어났다.
'이건 꽤 거리를 둬야겠구만.'
감시만큼은 육안으로 하는 걸 더 선호했지만 앞으로 일어날 유혈 사태를 감안하면 거리를 벌리고 마법의 눈을 쓰는 게 나았다. 대충 눈에 들어온 마법사만 둘이었다. 괜히 은신 마법을 눈치채거나 간섭을 일으키면 불똥이 튀는 정도로 안 끝난다.
-추적자가 붙은 것 같네. 서두르는 게 좋겠군.-
이동하면서 마법의 눈을 사용하고 도청까지 겸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그는 어렵지 않게 해냈다. 다른 마법사가 봤다면 그 깔끔한 실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을 수준이었지만, 그는 잠깐 자신의 마법이 오작동을 일으킨 게 아닌가 의구심을 느껴야 했다.
-아, 전 쟤들한테 용무가 좀 있어서. 먼저 가고 계시죠. 금방 따라 가겠습니다.-
-그, 그게 무슨 소린가?-
그러게. 그게 대체 뭔 소리야. 다행히 엘프들의 반응을 보면 완전히 잘못 들은 건 아닌가 본데, 당췌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건지 감이 오질 않았다.
-안 그래도 며칠 전에 좀 귀찮은 녀석들이랑 엮인 전적이 있어서 말이죠. 가는 길에 처리할 수 있는 건 바로 처리해 두는 게 장기적으로 유익할 거 같아서 말이죠.-
순간 들킨 줄 알았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쫙 돋았지만 다행히 자신의 존재를 눈치챈 건 아니었는지 감시 대상은 뭔가 조치를 취하거나 자신을 잡으러 달려오지 않았고, 그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미친놈이 추격자들과 마주하는 것을 지켜봤다.
-웃기는 놈일세 이거. 꼴을 보아하니 지가 무슨 짓을 했고, 왜 우리가 붙었는지 알고 있는 모양인데?-
-잘난 분이신가보지. 근데 이거 어쩌나? 널 지켜 주던 법의 테두리 꼭대기에 계시는 분이 이 무법지대에서 너 손 좀 봐주라고 우릴 보냈네?-
열두 명의 추격자들은 전부 각양각색의 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이런 일이 익숙한 것처럼 행동했다. 그 중 한 명은 영주가 확인을 위해 붙인 사람인지 꽁꽁 싸맨 채 제일 뒤에서 방관하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실질적인 전투 인원은 열한 명. 거기엔 아까 감시자가 확인한 마법사 둘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망토 아래에 드러난 장비를 보아하니 배틀 메이지가 분명했다.
-기사의 면전에다가 법 지키라고 들먹였다면서? 여기서도 법을 찾아보는 게 어때?-
-죽는 방법이나 찾게 되겠지.-
-쟨 멀쩡히 살아날 방법을 찾아야 하는 거 아니냐?-
-듣고 보니 그러네.-
질 낮은 비아냥이나 던지고 있지만 절반 이상은 감시자조차 이름을 알고 있는 유명한 실력자들이었다.
최근 인근 도시와 불화가 있었다고 하더니 뒷공작에 써먹기 좋은 무법자들을 곁에 두고 있었던 모양이군. 감시자는 추가로 보고할 내용이 생겼다는 사실에 순수하게 기뻐하면서도 감시 대상의 암담한 미래를 예상하며 짧게 애도했다.
그때, 감시 대상이 말 안장에 걸어두고 있던 도끼를 집어 든 채 가볍게 말에서 뛰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나는 엘드미아 에가라고 한다.-
그 한 마디에 감시자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며 의뢰주에게 들었던 '몇 가지 주의사항' 중 가장 강조하던 내용이 떠올랐다.
'나는 엘드미아 에가라고 한다.' 라는 말을 입에 담으면 이유불문 즉각 감시를 중단하고 최대한 거리를 둬서 최우선적으로 보고할 것.
-오, 자기소개? 하지만 우리가 누군지는 알 거 없단다. 낄낄낄.-
-맞는 말이다. 내가 누구인지만 너희가 알면 되니까.-
-...뭔 소리야?-
추격자들 사이로 의아함이 퍼져나가는 찰나 감시 대상의 손에 들려 있던 도끼가 사라졌다. 추격자들은 그 마법과도 같은 현상에 깜짝 놀랐다. 손도끼도 아니고 양손 도끼였는데 갑자기 어디로?
하지만 그들과 달리 하늘에 떠 있는 마법의 눈을 통해 전체적인 상황을 볼 수 있었던 감시자는 깜짝 놀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식겁하며 마법을 해제하고 도망쳤다.
제 몸집만한 양손 도끼가 공간 이동이라도 하듯 영주쪽 사람의 가슴팍으로 날아가 틀어박히는 광경을 보고 나니 왜 절대 접촉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것인지 이해됐다.
그냥 미친놈이 아니라 씨발 존나 위험한 미친놈이었다.
-미, 미친 씨발! 의뢰주가 죽었...!-
당황한 나머지 늦게 해제한 도청 마법이 꺼져가는 와중에 들려온 절박한 외침이 마치 경고처럼 느껴졌기에, 감시자는 말에게 마법까지 걸어가며 빠르게 도망쳤다.
도청 마법이 없음에도 메마른 황야에 울려 퍼지기 시작한 비명은 너무나도 잘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