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카트리나의 청동상이 안겨 준 유쾌함이 버프라도 된 것인지 도시를 떠나 두 번째 도시에 입성할 때까지 우리의 여행은 참으로 순조로웠다.
솔직히 첫 도시의 영주가 추가적으로 뭔가 더 할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동쪽으로 간다는 걸 블러핑이라 여기고 다른 곳에 병력을 보낸 건지 그냥 가만히 있기로 마음먹은 것인지 아무런 반응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일주일이 여유롭게 흘러가고나니 이번에야말로 정말 겨울 피크닉에 나선 것만 같아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그런 기분을 느끼지 말았어야 했다는 소리다. 클리셰였다.
"엘드미아 에가."
두 번째 도시에서 숙소를 잡고 저녁 식사를 하는 사이 다가와 내 이름을 부른 것은 중년남성이었다.
추운 겨울에도 두껍게 입어 보온성을 챙긴 게 아니라 품위 유지를 염두해서 챙겨 입은 적잖이 비싸 보이는 옷과 깔끔하게 다듬어진 수염 그리고 머리카락은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전투와는 연이 먼 행색이었다. 엄격하고 진지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한 그의 뒤엔 정반대의 행색을 한 장정 하나가 실실 웃으며 서 있다.
중년과 달리 책상 업무와는 거리가 먼 행색과 근육을 지닌 놈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고개를 까딱거리며 인사하는 여유까지 보여줬다.
"...내 인간들의 삶을 이해하려고 해도 이런 무례는 도저히 참기 힘들군."
근데 놀랍게도 그들의 등장에 반응한 건 셀레비안이었다.
어금니를 즈려물고 내뱉은 그의 중얼거림에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그뿐만 아니라 다른 엘프들조차 남자를 보고 삼백안을 치켜뜬 채 이를 악물고 있었다. 하지만 덩치는 여전히 실실 거리며 어깨만 으쓱였고, 그를 대동한 중년은 엘프들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은 채 멋대로 의자를 빼내 내 옆에 앉더니 제멋대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들었다.
"그대의 행동은 선을 넘었네. 서부가 우습게 보였나?"
나를 바라보는 눈에 적의는 없다. 위협이라고 할 것도 없이 그저 통보에 가까운 태도를 취하고 있다.
동시에 지금 자기가 안전하다고 믿는 요상한 새끼였다.
"네 행동도 선을 넘었는데? 내가 우습지?"
순간 중년의 미간이 확 일그러졌지만 놈의 행동으로 인해 내가 얻은 마음의 상처만큼 구겨지지는 않았기에, 나는 그대로 놈의 뒤통수를 부여잡고 식탁에 냅다 꽂아버렸다.
-콰앙!
"크악!"
영문을 알 틈도 없이 면상을 박은 남성이 급하게 고개를 들면 코피가 음식에 뿌져질 수 있으니 그대로 잠깐 누르는 틈을 타 주변의 반응을 훑는다. 큰 소리가 났으니 주변이 잠깐 조용해진 건 당연한 거였지만, 지금 식탁에 코가 문질러지고 있는 남자의 뒤에 서 있는 녀석은 예상과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내가 손을 뻗어 뒷머리를 쥐는 순간까지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이지 못한 중년은 예상대로 전투 능력이 쥐뿔도 없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러니 지금 아파 죽으려고 하며 발버둥 치는 것도 연기는 아닐 것이다. 문제는 뒤에 서 있던 녀석이 분명 내 행동을 제대로 보고 따라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제재없이 그저 웃고만 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이놈의 안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나는 시선을 자연스럽게 남자에게로 돌리며 물었다.
"저 새끼가 누군지는 몰라도 엘프 사냥꾼이라는 건 장님이 와도 분위기만 읽고 때려 맞추겠다. 너 뭐 하는 새끼인데 시비냐?"
"아악! 나, 나는 사절로서 이 자리에 온 것이다! 이런 무식한 일을 저지르고도 무사할 거라 여기는 거냐!!"
"엘프들 면전에 엘프 사냥꾼 끌고 오는 건 유식한 일이고? 게다가 뭔 놈의 사절?"
경비병들이 무례를 저질러도 웃거나 한숨으로 넘기는 이들이었다. 저 정도까지 적의를 불태우는 건 가문의 원수가 아니면 엘프 사냥꾼이겠지.
하지만 엘프들이 명백한 적의를 내비칠 정도로 유명한 엘프 사냥꾼과 옷 좀 챙겨 입는 사절이라. 내 경험으로는 이게 무슨 조합인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인데?
"나, 날 죽이면 이 아티팩트를 통해 바로 신호가 간다!!"
갑자기 번쩍 손을 들어 올리며 반지를 들이밀어서 더욱 마음에 안 들었다.
루드라의 개새끼 생각나게 만드네. 그거 믿고 이리 나댔나 싶어 마력시를 통해 살펴보니 확실히 뭔가 작동하고는 있었다.
"그거 참으로 흥미로운 정보지만 딱히 지금 필요한 정보는 아니야."
한 두 번 정도 더 찍으면 본론이 튀어나올까 싶어 손아귀에 힘을 줬더니 남자가 기를 쓰며 외쳤다.
"네놈이 먼저 시작했다! 엘드미아 에가! 명예에 금이 간 귀족들이 가만히 있을 거라 여겼더냐! 이미 네 뒷조사를 마쳤다! 더 이상 제국은 네 뒤를 봐주고 있지 않아!"
"...뭐?"
이게 뭔 개소리야? 제국이 내 뒤를 봐줘?
언제부터? 또 나만 몰라?
처음 듣는 이야기라 손아귀에 힘을 풀고 똑바로 말할 기회를 줬는데, 놈은 그게 지가 한 말을 듣고 내가 고개를 숙인 거라 여겼는지 코피와 눈물을 질질 흘리면서도 득의양양하게 웃어 보였다.
"하! 모르고 있었나보군! 벨혼드라 왕국에 위치한 제국 영사관에서 나흘 전에 공표했다! 네놈은 제국와 아무런 연관도 없으며,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제국은 개입하지 않는다고! 넌 이제..."
"뭐래 미친놈이, 당연한 소리 작작해."
진짜 미친놈인가? 누가 보면 내 약점이라도 잡은 줄 알겠네.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다시 뒤통수를 쥐고 식탁에 찍었더니 먹먹한 비명소리와 함께 뒤에 서 있던 엘프 사냥꾼이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푸하하! 이거 완전 미친놈일세! 아닌가? 내가 들은 정보가 틀린 건가?"
"넌 또 어디서 뭔 좆 같은 헛소리를 주워들었길래?"
엘프 사냥꾼이라는 내 말에 부정하지 않았으니 놈의 직업은 그게 맞을 것이다. 노예 사냥꾼들조차 아니꼬운 마당에 이종족 사냥꾼을 멀쩡히 둘 이유는 없었지만, 대면한 순간 살생부에 올라간 놈이었지만 자칭 사절이라는 미친놈이 워낙 얼토당토않은 개소리를 하니 쟨 또 무슨 헛소리를 할까 궁금해졌다.
내 질문에 엘프 사냥꾼은 턱짓으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셀레비안 일행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네 이름. 그리고 네 뒤에 제국이 있었으나 이젠 아니라는 의뢰주의 설명. 그리고 널 처분하면 저 엘프들은 내가 가져가 팔아도 된다는 확답."
"의뢰주라는 새끼 면상도 못 봤는데 뭘 멋대로 남의 목숨을 계산대에 올려?"
"글쎄? 그 의뢰주라는 게 한 왕국에서 나름 힘 좀 쓴다는 돼지들이면 멋대로 올려도 되지 않을까?"
아마 내가 서 있었다면 눈높이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은 덩치의 녀석은 실실 웃으며 허리를 살짝 숙이더니 여전히 내 손에 머리통이 눌려 있는 자칭 사절의 등을 탁탁 누드리고는 말을 이었다.
"이건 정중한 경고였어. 나야 내키지 않았지만 의뢰주가 기습은 비겁한 거라며 얼굴을 까라는데 별수 있나?"
"내 씨발 살다 살다 별 병신같은 이야기를 다 듣게 되네. 뭔 소리야 그게?"
내 진심이 느껴진 건지 놈은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리며 계속 설명해줬다.
"이 친구를 통해 네 녀석에게 통보한 뒤 도시를 벗어나면 그 즉시 습격할 거였다. 아쉽게도 일단은 '비공식' 활동이라서 말이지. 네가 두려워하며 도시를 떠나지 않으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다행히 그럴 일은 없을 거 같군."
"...그러니까, 내 뒷배를 다 자른 뒤 천천히 고립 시켜 말라 죽기 직전의 상황이라는 걸 자각시키려는 계획이었다?"
"똑똑한 친구로군."
똑바로 두 눈을 마주 한 채 웃는 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자칭 사절의 뒤통수에서 손을 뗐다.
"크헉! 야만인 같으니! 어찌 이리도 무식할 수 있단 말인가!"
"지랄 말고. 지금 이거 선전포고라는 소리잖아? 이게 기습이 아니려면 날 노리는 네놈들의 윗대가리가 누군지 이름은 알아야 하지 않겠냐?"
"하! 네놈이 감히..."
"대가리 또 박고 싶지 않으면 단어 선택 잘 좀 하지? 저 친구는 여기서 날 막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데?"
빠르게 말을 자르고 현실을 직시시키자 뭔가 말하려던 자칭 사절이 '흡!'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었다. 다시 입을 열지 않는 걸 보면 이름을 알려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름을 밝히지는 않으면서 기습은 안 된다라... 지가 직접 군대를 움직여야 했다면 대놓고 기습했을 새끼로군. 절로 헛웃음이 나왔지만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 어찌 보면 잘한 선택이다."
"...뭐?"
"니 새끼가 사절이랍시고 여기 미리 온 게 잘한 선택이라구요. 밖이었으면 너희 둘 다 그 자리에서 뒈졌을 테니까."
하도 꼴같잖아서 놈이 앉아 있던 의자 째로 걷어차 버리니 자칭 사절은 어버버 거리다가 그대로 뒤로 나자빠졌다. 뒤에 서 있던 엘프 사냥꾼 놈은 그 모습을 한번 흘겨 본 뒤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둘 다 뒈졌다고? 네가 날 죽일 수 있다고 보는 건가?"
"멍청한 친구로군. "
그걸 굳이 물어 봐야만 이해가 되냐는 의미를 담아 아까 놈이 했던 말을 되돌려주자, 놈의 미간이 아주 잠깐 평정을 잃고 꿈틀거렸다. 자존심은 더럽게 센 모양이군.
"...하. 미리 말해 두는데, 네 엘프 친구들이 날 보고 이를 가는데에는 다 이유가 있거든?"
"말 안 해 줘도 안다. 처음 보는 나도 네 면상 보면 이가 갈리니까 좀 꺼져라. 식사하는데 그딴 거 들이밀면 소화 안 된다."
물론 진짜로 이가 갈리진 않는다. 별것 아닌 도발일 뿐. 놈의 미간이 이번엔 대놓고 일그러졌다.
"넌 곱게는 못 죽을 거 같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의뢰는 성실하게 이행하는 타입인지 녀석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자칭 사절을 일으켜 세운 뒤 식당을 나섰고, 나는 식사를 마치기 위해 빠르게 음식을 욱여넣었다.
"...어쩔 셈인가?"
주변 사람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다시 목소리를 내는 동안 말없이 날 바라보고 있던 셀레비안이 물었다. 세상 심각한 표정이었지만 날 질타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정말 어떻게 행동할지를 물어보는 것에 가까웠다.
"죽일 건데요."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더니 그가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저놈이 누구인지 알고 하는 말인가?"
"알아야 합니까? 어차피 죽을 놈인데."
"......저놈은 귀 사냥꾼이라네."
마치 이름을 불러선 안 될 자라도 되는 것처럼 엄숙하게 이야기하는 셀레비안이었지만, 아쉽게도 내 뇌에는 엘프 사냥꾼 따위에게 배분된 여유 공간따위 없었다.
"그리 말하셔도 모릅니다."
그러자 다른 엘프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셀레비안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10년간 엘프 사냥꾼으로 이름을 날린 놈일세. 서부 인근에 있던 부족 하나를 거의 초토화 시켰고, 집단의 규모와 실력도 결코 무시할 수 없어. 놈만 하더라도 어지간한 오러 익스퍼트보다 강한데 혼자 움직이는 것도 아니란 말일세."
"흠, 잘됐네요. 오늘부로 장사 접게 될 테니까."
"그...잠깐, 오늘?"
빵을 찢어 마지막 남은 스튜를 깔끔하게 긁어 먹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여전히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셀레비안과 그의 일행들을 둘러본 뒤 짧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오늘."
마력시를 사용하자 자칭 사절이 끼고 있던 반지의 흔적이 눈에 들어온다. 흐릿했지만 숲속에서 발자국 찾기 같은 느낌에 가까워서 예상보다 할만 했다.
도시 밖에서 날 치려고 했다는 건 결국 놈들이 이대로 도시 밖으로 나간다는 거잖아? 적이 어디 있을지 뻔히 알고 있는데 가만히 내버려 둘 이유 따위, 내게는 없다.
"뭐 예쁘다고 내일까지 기다려줍니까? 따라가서 죄다 족쳐야지."
기습은 언제나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