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칭 사절의 이름은 오즈월이었다.
듣자 하니 내가 처음 관문지기와 시비가 붙었던 곳의 영주가 남작인데, 놈이 섬기는 백작이라는 양반이 매우 치욕스럽게 여겨서 직접 손을 썼다고 한다.
라그니스도, 엔벨데도, 심지어 켈바스트 변경백도 백작이라 백작이 정말 더럽게 흔하게 느껴지지만 결코 흔한 게 아니다. 이티스엘에서도 내가 오그웬과 수도에서만 주로 활동해서 그렇지, 오래된 백작 가문은 남작 한 둘 정도 끼고 지방에서 목에 힘 주고 다닐 정도니까.
오즈월이 섬기는 백작 역시 마찬가지의 경우였다. 유서 깊고, 권력도 깊어서 지금 내가 발 걸치고 있는 지역에서는 이름만 들어도 알아서 기어 다니는 그런 가문.
“그래서 그 멕켈린 백작이 여기... 옘병, 왕국 이름이 뭐라고?”
“...칼다르 왕국입니다.”
한순간 ‘진짜 지가 발을 딛고 있는 땅이 어딘지도 모르고 있다니.’라는 기색이 놈의 얼굴에 떠올라 한 대 때려줄 마음으로 손을 들어 올리니 바로 사라진다.
“눈치 챙겨.”
“예, 예!”
”아무튼 그 멕켈린 백작이라는 인간이 이곳 칼다르 왕국에서 알아주는 권력가라서 제 아랫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마저 자기를 향한 도전이자 모욕으로 받아들인다는 거지?”
“그, 그게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좀 더 원만하게 의사를 표현할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으로...”
이번엔 놈이 눈치 보고 시선을 내리깔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즉시 손을 휘둘러 뒤통수를 때렸다.
“지랄은 너네가 먼저 했는데 내가 왜 너희 편의를 봐줘? 꼬우면 관문지기 관리를 잘했어야지. 당장 내 뒤에 제국이 있다고 착각했을 땐 이도저도 못 하고 발만 동동 구르던 새끼가 뭐? 원만?”
놈은 뒤통수를 부여잡고 울상을 지었지만 이내 다시 엘프 사냥꾼들의 시체를 놈들의 짐마차였던 것에 싣는 작업에 착수했다.
아무리 백작에게 의뢰를 받았다고 한들 귀 사냥꾼이라는 놈이 말했던 것처럼 결국 비공식 의뢰였고, 노예의 낙인을 찍고 출처를 세탁하면 꼬투리를 잡기 힘들어서 그렇지 엘프 사냥은 엄연한 범죄였다. 내가 묵고 있던 도시가 백작의 영역이라고는 하나, 이놈들 시체를 보고도 발뺌을 하거나 내게 책임을 묻기는 힘들 것이다.
놈들의 장비와 물자 그리고 현상금으로 인해 두둑해질 주머니를 생각하니 백작이라는 문제가 남아 있어도 유쾌해지기 시작했다.
“빨리 움직여라. 그래가지고 어느 세월에 도시로 돌아갈래?”
“죄, 죄송합니다. 제가 몸 쓰는 일에는 약해서...”
아, 맞다. 이 아저씨 일반인이었지.
방금 전 싸웠던 놈들이 솔직히 만만한 놈들은 아니었던 터라 깜빡하고 말았다.
“씁, 별수 없지.”
도끼에 익숙해지려는 의도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익숙하지 않은 무기를 쓰는 만큼 평소보다 많은 마력을 사용해 신체 능력을 올린 상태였음에도 놈들의 협공은 매서웠다. 솔직히 중간중간 도끼를 내던지고 검을 뽑아 들까 고민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검술 수준과 별개로 협공으로 사람 하나 잡아족치는 실력과 팀워크만큼은 인정해야 했고, 죄다 오러 유저라서 더 했다. 개인적으로는 협공이라는 개념이 많이 약한 명예충 기사들이 좀 보고 배워야 할 수준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부하로 짐작되는 놈들을 다 죽인 다음 굳이 아까운 그림자 발의 포션을 하나 쓴 것도 귀 사냥꾼이라는 놈의 여력이 어디까지 남아 있는지 감이 안 온 탓에 만전을 기하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혼자 남으니 부족한 기술의 밑천이 드러나 예상보다는 쉽게 잡았지만, 어지간한 오러 쓰는 기사들보다 강한 놈이었다는 건 확실하니 후회는 없다.
이런 건 괜히 아꼈다가 엔벨데 꼴 나는 거라고.
이대로 밖에서 밤을 지샐 생각은 없었기에 이제는 내 돈주머니를 채울 수단이 된 놈들의 시체는 오즈월에게 맡겨둔 채 나는 주변에서 되팔만한 물자들을 모으는 데 집중했다. 백작의 지원을 받아서 그런가 생각보다 쓸 만한 게 많았고, 귀 사냥꾼의 천막으로 짐작되는 곳에서는 내 암살 의뢰와 관련된 계약 문서 뿐만 아니라 엘프를 거래하고 남긴 증빙서류 같은 것들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래, 불법적인 일을 하려면 제 보신을 위해 이런 것 정도는 잘 챙겨놔야지. 오래 장사한데에는 이유가 있구나.”
덕분에 백작한테 시비걸기 편한 구도가 나오겠군.
그렇게 한참을 뒤적이고나니 예상보다 물건들이 많아져 결국 마차 한 대에는 시체를, 다른 한 대에는 물자를 실은 뒤 오즈월에게 한 대를 맡기고 앞장서서 도시로 향하게 해야 했다.
“미리 말해 두는데 나 여기까지 두 발로 뛰어왔다. 마차 타고 튀는 놈 쫓아가는 거 일도 아니야.”
“저, 절대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바늘을 썼다간 마차가 박살나거나 말이 죽거나 마부로 써야 하는 오즈월이 죽을 게 분명해서 미리 으름장을 놓았더니 녀석은 올곧게 마차를 몰아 제대로 도시에 입성했다. 물론 오는 동안 따로 죽여 놓았던 별동대 여섯의 시체를 싣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말단 관문지기에게까지 나에 대한 이야기가 퍼진 건 아닌지 관문지기들은 별말없이 우리를 통과시켜줬고, 물자를 실어 놓은 마차는 숙소에 맡긴 뒤 우선 시체들부터 처리하기 위해 모험가 길드로 향했다.
이티스엘이었으면 경비대 본관에 문의해야 했을 텐데 이곳은 현상범과 관련된 업무와 결제를 모험가 길드에 맡겼더라고. 다행히 놈들의 목에는 상당한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 워낙 악명 높은 녀석인지라 모험가인 엘프들도 사비로 현상금을 추가할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런 것치고는 여러모로 허무한 최후였다.
결국 전사라기보단 사냥꾼이었던 놈들이니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기습없이 숲속에서 싸웠다면 굉장히 까다로웠겠지.
놈들의 얼굴을 알아본 모험가 조합 직원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넘겨주는 현상금을 받아 그대로 숙소에 머물고 있던 셀레비안에게 넘겨 주니, 나와 오즈월 그리고 돈주머니를 한참 번갈아 보던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설마... 정말로 죽인 거요?”
“예.”
뭔 말이 더 필요할까. 셀레비안과 엘프들은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포션을 마셨어도 피곤한 건 피곤한 거라서 일단 자고 일어난 뒤 정리하기로 말을 맞췄다.
간만에 몸을 움직인 덕인지 숙면을 취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일반인에 불과한 오즈월이 내가 열심히 묶어 놓은 매듭을 풀고 도망칠 방법도 없었으니 그에 대한 걱정도 필요 없었다.
개운하게 아침을 맞이하며 혹시라도 내가 잠든 사이 쌀 거 같으면 알아서 처리하라고 화장실에 묶어 둔 녀석을 발로 차 깨운 뒤, 아침부터 여전히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엘프들에게 한 번 더 양해를 구한 다음 물자가 담긴 마차를 처분하기 위해 움직였다.
스무 명에 달하는 엘프 사냥꾼들의 물자는 가치가 상당했다. 주머니가 빵빵해지는 정도를 넘어 금화가 무거워 방해가 되는 수준이었기에 보석상에 들려 작고 비싼 보석 몇 개를 사야 했을 정도로.
멀쩡한 갑옷와 무기 그리고 마도구로 보이는 신호탄과 상비약으로 짐작되는 포션까지 싹 다 팔고 나니 절로 마음이 풍요로워졌다.
“이 정도면 게이트 비용은 걱정 없겠군.”
게이트가 안 보여서 문제지.
안타까운 현실이 안겨준 상처를 보석 주머니로 치유하며 셀레비안 일행에게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숙소로 돌아가니, 셀레비안은 거두절미하고 내가 줬던 돈 주머니를 그대로 되돌려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이 돈은 받을 수 없다네.”
“종족의 원수를 잡아 준 것도 고마운데 놈들의 목에 걸려 있던 현상금까지 받을 수는 없다는 뻔한 이야기할 거면 그냥 챙겨서 좋은데 쓰시죠. 어차피 놈들 물자를 다 처분한 덕에 제 주머니는 빵빵합니다.”
정말 그런 뻔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인지 셀레비안은 울상을 지으며 다시 돈주머니를 챙겼다.
“...대체 어떻게 놈들을 처단했는지는 지금 이야기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 그 자를 데려온 것을 보아하니 아직 뭔가 더 할 일이 남은 겐가?”
“네. 의뢰한 놈 찾아가야죠.”
“...그 의뢰한 놈이라는 게 귀족 아닌가?”
“백작이라더군요.”
내 덤덤한 대답에 셀레비안 일행의 미간에 주름이 하나씩 늘어났다. 그렇게 주름이 늘어났는데도 죄다 아름답고 잘생긴 걸 보니 역시 엘프는 엘프였다. 저절로 꼬움 지수가 상승하는 모습이었지만 다 나를 배려하고 걱정하는 분위기였기에 그들을 안심시키고자 한 마디 덧붙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백작은 이미 한 번 죽여 봤습니다. 의외로 할 만 하더군요.”
그러자 엘프들의 미간에 내 천 자가 생겨났다. 옆에 있던 오즈월만이 벌벌 떨며 경악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 이티스엘 수도에 있는 엔벨데 백작의 저택에 단독으로 처들어가 모조리 몰살 시켰다는 소문이 진짜였습니까?”
“씨발 그 소문을 듣고도 이 지랄을 쳤다고?”
“세, 세상 누가 그런 소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겠습니까. 과장됐다고 여기지.”
이 새끼 좀 봐라. 기가 죽은 주제에 맞는 말을 하니 두 배로 꼴뵈기 싫어지네. 눈치 챙기라는 의미에서 도끼눈을 떠줬더니 그제서야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인다. 그러자 이번에는 셀레비안이 힘겹게 표정을 풀며 말을 걸었다.
“...자네의 실력을 재단하는 건 이미 의미가 없는 것 같으니 뭐라 하고 싶진 않네만, 정말 괜찮은 겐가? 이티스엘에 돌아가더라도 후환이 남을 거 같은데?”
“후환이요?”
“다른 나라의 백작을 공격하는 것이잖나. 아무 문제없이 지나갈 수 있는 사안은 아니라고 생각하네만.”
지극히 타당한 의견이었다. 내가 설령 백작 놈의 모가지를 따버릴 수 있다고 한들 여기서부터는 대부분 범죄로 넘어가기 좋은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죽어서 착해진 귀 사냥꾼이 남기고 간 선물 덕에 굳이 법적 문제로 골머리를 썩히며 간을 볼 필요가 없어졌다.
“원래는 그랬을텐데...”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품에서 귀 사냥꾼과 백작의 계약서를 꺼내보이며 말했다.
“이젠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