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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53화 (353/412)

내 계획을 들은 셀레비안 일행은 세 번이나 내가 제정신인지 확인했다.

사실 그 정도는 양반이었다. 양식에 맞게 문서를 작성하는 역할을 떠맡게 된 오즈월은 내 말을 받아 적으면서 몇 번이나 되물어보고 확인했으니까.

"정말 이대로 씁니까?"

그 확인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었다. 슬슬 짜증이 났지만 녀석의 걱정이 무엇인지 확실해졌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줬다.

"어차피 내가 나중에 다시 읽어보고 확인할 거다. 그냥 보내서 네 탓할 일 없으니 닥치고 받아 적어라 좀."

다른 건 다 몰라도 양식 맞춰 적는 건 집사 일 배우면서 손에 꼽을 정도만 해봤기에 솔직히 긴가민가 했었는데, 오즈월의 존재가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받아 적는 놈은 죽상이었지만 나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느긋하게 방에서 견과류나 주워 먹고 있는 나를 보며 셀레비안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 이런 정...체모를 문서를 백작과 왕에게 보내는 것만으로 효력이 생기는 게 맞나?"

묘한 딜레이를 보아하니 딱 봐도 '정신 나간' 이라고 말하려던 거 같은데, 이해했다. 내가 실행에 옮기는 입장이긴 해도 어처구니가 없으니. 하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별거 없었다.

"생깁니다."

비록 받는 입장에서는 미친놈이 헛소리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런 태도는 사건이 터지고 소문이 퍼지면 순식간에 뒤집힐 게 뻔하니 굳이 신경 쓸 필요 없다.

"문서를 빠르게 보내는 데 돈이 좀 드는 게 문제지만, 돈은 이번에 많이 벌었으니까요."

날 노리는 놈들이 하나같이 돈 많은 놈들이라 참 다행이야. 두둑한 돈주머니와 보석주머니를 떠올리며 난 열심히 오즈월을 쪼았고, 덕분에 양식을 갖춘 문서는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급하게 써서 필체가 좀 아쉽긴 했지만 오히려 너무 정갈한 것보다 나아 보여서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내 만족스러운 반응에 활짝 표정을 핀 오즈월을 보며, 나도 미소로 화답했다.

"이제 니가 알고 있는 서부에서 가장 빠른 우편 배달 수단을 말해 봐."

이제 자기가 할 일이 끝났다고 여겨 안도하던 오즈월의 얼굴이 다시 죽상으로 바뀌었다.

엘드미아가 오즈월을 갈구고 쥐어 짜내서 마련한 서신은 서부에서 가장 빠른 수단을 통해 사흘 만에 칼다르의 왕 칼다르 16세에게 전달 되었다.

원래대로라면 일개 여행자가 쓴 서신따위가 왕에게 전달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겨우 문서 몇 개 보내는 것치고 너무나도 많은 비용을 요구해 어지간하면 쓰이지 않는 마도서관의 공간 도약 마법으로 배달된 서신은 이야기가 달랐다.

누가 보냈는지보다 대체 무슨 내용인지부터 확인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 비싼 배송 수단은 왕과 그의 측근들로 하여금 시간을 할애하도록 만들었고, 내용을 살핀 이들로 하여금 심각한 얼굴로 회의를 하게끔 만들었다.

하지만 정작 회의가 시작되었음에도 내용이 워낙 특이하여 먼저 의견을 내놓기 힘든 분위기가 이어지는 와중에, 칼다르 16세가 먼저 회의의 물꼬를 텄다.

"제국이 분명 자기들과 연관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미쳐 날뛰는 이들이 넘치는 서부에서 무려 16대를 이어온 유서 깊은 왕국의 왕답게 칼다르 16세는 섵부른 판단으로 신하를 힐책할 생각이 없었다. 심지어 그가 방금 입에 담은 사안은 벨혼드라 왕국에서 직접 사절을 보내 전달한 내용이라 칼다르 16세 본인이 직접 들었던 내용이다.

그저... 눈앞의 닥친 상황을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는 과정에서 떠오르는 의문에 불과한 것을 그대로 입에 담았을 뿐이다. 허나 아랫사람들의 마음이라는 건 어쩔 수 없는지 마치 죄라도 지은 것처럼 움찔거리는 이들이 나타났다.

켈바스트 변경백의 이름으로 이티스엘까지 긴급 서신이 발송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왕국은 없었다. 물리적으로는 건드리지는 않아도 거기서 움직이는 돈과 정보까지 포기할 수는 없었던 이들이 열심히 첩자를 운용한 결과였다.

칼다르 16세 역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곳에 심어둔 눈과 귀가 있었고, 오크들이 고대의 게이트를 타고 저 먼 이티스엘까지 날아가 난리를 쳤다는 이야기에 적잖이 놀라면서 홀로 대초원을 횡단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엘드미아의 이야기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측근에게 명령해 유능한 감시자까지 붙여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서부에서 이름난 실력자답게 그는 의뢰 내용을 아주 철저하게 이행했고, 덕분에 칼다르 16세는 켈바스트에서부터 움직이고 있는 엘드미아가 '소문의' 그 엘드미아라는 것을 꽤 빨리 파악했다.

들려오는 소문과 정보의 반만 사실이어도 역사에 이름을 남길만한 영웅의 자질이 있는 소년이었다.

제국과 연루된 사건이었다고는 하나, 다름 아닌 철혈 황녀가 직접 이티스엘로 발품까지 팔아가며 눈독을 들이는 인물이니 미리 그의 신변을 확보해 안전하게 제국의 영토까지만 보내더라도 외교적으로 이득이라 여긴 그는 제국이 명확한 의사를 밝히길 기다리면서 병력을 움직일 준비까지 모두 마친 상태였다.

그랬기 때문에, 제국에서 모르쇠로 일관한다는 답변이 왔을 땐 내심 당황했다.

그랬는데도, 엘드미아가 미쳐 날뛰는 현재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뭘 믿고 이렇게 움직이는 거지?'

서신의 글귀는 장황했으나 핵심은 단순했다. 아무런 죄도 없는 자신을 기분 나쁘다는 이유로 암살하려한 멕켈린 백작의 활동에 대한 정황과 확실한 증거를 발견했으니, 이를 통해 멕켈린 백작에게 직접 죄를 묻겠다는 내용.

거기엔 일개 모험가인 자신의 목숨과 한 가문을 이끄는 귀족인 멕켈린 백작의 무게가 같지 않기에 결투가 아닌 백작 가문을 상대로 싸움을 걸어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겠다는 터무니없는 주장과 더불어 자신은 명예를 지키는 게 목적일 뿐이니 멕켈린 백작 사후 그의 사유 재산은 오롯이 이 땅의 주인인 칼다르 16세가 환수할 수 있도록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게 영지전이었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는 서신이다. 귀족과 귀족 혹은 기사와 기사 간의 명예를 위한 결투에 참관해 달라는 서신이었어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왕실을 견제하는 세력 하나를 손 하나 대지 않고 꿀꺽할 수 있는 상황이니 쌍수를 들고 환영했을 것이다.

문제는 이게 한 영지의 주인이자 파벌을 이끄는 백작과 '한 명'의 싸움이라는 점이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귀족을 암살할 테니 가만히 있으라는 것과 하나도 다를 게 없는 주장입니다. 당장 군대를 파견해 이 자를 잡아들이고 죄를 물어야 한다고 봅니다!"

분기탱천한 귀족 한 명이 이를 갈며 주장했다. 딱히 멕켈린 백작의 파벌은 아니었으나 아무래도 귀족으로서의 자부심이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듯했다.

"그게 무슨 얼토당토않은 주장이오? 전부 다 읽은 게 맞소? 세 번째 장은 엄연히 명예를 건 결투 신청서요."

그에 대답한 것은 친제국주의적 성향을 지닌 다른 귀족이었고,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멕켈린 백작에게도 전달되었을 게 분명한 결투장의 사본 역시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읽은 뒤였다.

"이게 어떻게 결투란 말입니까!"

"증거가 있고, 당사자가 원하면 그게 결투 아니겠소? 심지어 그 증거가 진짜이니 멕켈린 백작에게 선택권이 있을 리 없지. 혹여 가짜라고 주장하지 마시오. 이미 문장관이 다 확인했으니."

"아무런 지위도 없는 일개 부랑자와 다를 바 없는 외지인과 대귀족의 결투가 말이 됩니까!"

"정당한 권리가 그 부랑자에게 있고, 자신의 무고함을 신들 앞에서 증명하겠다고 직접 말하는데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이오? 오히려 지나치게 압도적으로 멕켈린 백작에게 좋은 형태라서 황당하기 그지없을 지경인데."

그 역시 자신이 본 내용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는지 미간에 주름을 만들고 있었으나, 그 이유가 달랐다. 수도까지 가져 왔으면 정치적으로 공격할 빌미가 제공되었을 사안이다. 그런 빌미를 질 게 뻔한 결투에 써먹겠다고 일방 통보 받았으니. 좋은 기회를 놓쳤다는 생각에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그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그 외에도 파벌이 나뉜 이들의 얼굴에 희비가 교차하고 있었으니.

"반스 경의 말대로 입니다. 실로 불경한 태도이긴 하나 양식도 갖추었고, 증거가 확실하지만 본인이 직접 결투를 원했으니 이를 막으면 오히려 왕가의 위신이 떨어지고 국법이 흔들리겠죠."

멕켈린 백작 쪽에 붙은 반제국파들은 골치 아픈 사건이 알아서 정리되고 있음을 확신하며 결투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친제국파 귀족들은 그들의 속내를 뻔히 알면서도 반박할 방법을 찾지 못해 침음만 흘리는 상황 속에서, 점점 언성이 높아지는 것을 깨달은 칼다르 16세가 손을 들어 올려 모두의 입을 다물게 했다.

"그만. 비록 유례없는 사태이긴 하나, 경들의 의견은 이미 엘드미아 에가라는 이가 주장하는 결투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쪽으로 기울어진 것 같군."

처음에 목소리를 내었던 이만 불만스러워할 뿐, 열 명이 넘는 다른 귀족들은 모두 제각각의 심정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친제국파 쪽에서 뭔가 뾰족한 수가 나오길 바랐던 칼드라 16세는 아쉬움이 담긴 한숨을 내쉬며 통보했다.

"멕켈린 백작의 죄목은 명백하다. 불법적인 엘프 사냥 지원 및 불법 노예 거래 후원, 부당한 암살 모의. 본디 이를 두고 법정에 세우는 것이 옳은 일이나... 이를 밝혀내고 부당하게 목숨의 위협을 받은 이티스엘의 모험가 엘드미아 에가의 요청으로 인해 명예를 건 결투를 먼저 진행한다."

결투에서 멕켈린 백작이 진다면 모든 죄목이 인정되고 법의 처벌은 가문이 함께 받게 될 것이다. 이긴다면 최소한 암살 모의에 대해서는 무죄가 되겠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이는 반제국파와 떨떠름한 표정을 지우지 못 하는 친제국파를 훑어보며 칼드라 16세는 말을 맺었다.

"이는 왕국법과 왕명 아래 지켜질 것이며, 합법적인 절차를 위해 왕실의 입회자가 보는 앞에서 치러질 것이다. 결투는 엘드미아 에가의 요청에 따라... 멕켈린 백작 '가문'을 대상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반제국파에 속한 귀족들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참으로 만족스러워 보이는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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