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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54화 (354/412)

멕켈린 백작은 불편한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내며 탁자를 검지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무의식중에 나오는 습관에 불과한 행동이었지만 아랫사람들은 그 습관의 끝이 대부분 좋지 않은 형태로 끝난다는 것을 몸으로 기억하고 있었고, 손가락이 탁자에 부딪칠 때마다 최측근을 제외한 이들의 안색은 빠른 속도로 파리해졌다.

평소라면 그런 반응을 보고 한층 더 심기가 불편해지는 게 멕켈린 백작이라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권위만큼 부하들 역시 품격과 권위에 걸맞게 행동하길 바란다. 소인배처럼 눈치나 보는 건 그 자신뿐만 아니라 윗 사람의 품격조차 떨어트린다고 여기는 자였으니까. 그랬기에 쓸데없는 텃세를 부리다가 체면을 깎아 먹은 부하를 책망하고자 직접 손을 썼다. 똑바로 안 하면 너도 이렇게 치워 버릴 거라는 의도를 담아서.

그런데 정작 치워진 건 자신이 보낸 용병이었고, 그로 인해 체면은 배로 구겨졌다고 여기고 있었다.

눈앞의 결투장을 받고 사태를 파악하기 전까지는.

"믿는 구석이 있을 것이다."

처음엔 어디 잘못 읽었나 싶어서 한 번 더 읽었다. 눈에도, 결투장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걸 이해하기까지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혹시나 싶어 측근에게도 보여줬더니 역시 그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고, 그제서야 멕켈린 백작은 확신했다.

문제가 있는 건 결투장을 보낸 엘드미아 에가의 머리였다. 그리고 이런 이들은 영웅의 자질을 타고 났거나 둘도 없는 머저리였다.

"귀 사냥꾼을 이기고 살아남은 건 예상 밖이긴 하나... 아닌가, 오히려 그렇기에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 뛰는 것에 가깝나."

멕켈린 백작은 적을 우습게 여기는 실수를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건 실수가 아니라 무능이라 여겼다. 그랬기에 결투장을 받자마자 그의 내면에서 엘드미아에 대한 평가가 급속도로 수정되기 시작했다.

귀 사냥꾼의 실력은 직접 본 적이 있어서 잘 알고 있었다. 당장 인근 영지로 보내 약탈을 하라고 의뢰했다면 아주 훌륭하게 완수하고 기사까지 죽인 뒤 돌아왔을 것이다. 그는 전쟁과 결투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싸움과 사냥이라는 것에는 이골이 난 아주 괜찮은 사냥개였고, 십수년간 엘프 사냥을 이어 나가며 악명을 떨친 만큼 실력과 경험 모두 최상급에 속했다.

아무리 엘드미아라는 인물이 출중한 실력을 지녔다고 한들 아직 경험이 부족한 15살에 불과하니 귀 사냥꾼의 악랄함으로 충분히 상회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지금도 그 판단에 문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상대가 상식이라는 규격에 맞지 않았을 뿐. 정황상 귀 사냥꾼의 부하들까지 싹 다 죽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 정도 실력이면 오만할 만하지."

귀 사냥꾼은 엄연히 한 종족의 골칫거리 중 하나였으니, 엘프들이 도왔어도 대단한 거고 홀로 일궈냈으면 분명 큰 업적이다. 그로 인해 설령 자신에게 뼈 아픈 타격을 주었다고 한들, 오히려 여기까지 움직일 실력과 강단이 있는 상대라면 존중할 만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모험가보다 재야의 인재를 적으로 두는 게 훨씬 더 체면이 살았으니까.

"문서를 보면 오즈월을 인질로 잡은 게 분명하니, 저희 측의 병력과 영지의 상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는 게 맞다고 여깁니다."

"그럼에도 이런 글을 보냈다라. 뭘 노리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한다."

무의미한 탁상공론으로 시간을 빼앗길 생각이 없었던 멕켈린 백작의 단호한 한 마디에, 조금씩 말문을 트려던 측근들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군대가 적이라 생각하고 대비해라. 가문을 상대한다고 직접 언급한 이상 영지를 상대로 싸움을 걸었다는 걸 녀석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으니 이런 무모한 짓을 저질렀을 게 분명해."

무엇보다 이렇게 양식에 맞춘 문서를 이쪽에만 보냈을리 없다. 분명 왕실에도 보내 정당성을 확보했을 것이고, 그쪽은 입회를 빌미로 어느 정도 개입하려 들겠지.

멕켈린 백작 역시 상대의 의중에 대한 많은 의문이 치솟았지만 조용히 억누르며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명목상으로는 내 죄에 책임을 묻는 결투지만 영지와 가문을 상대로 일을 벌린 이상 왕실에서도 이를 위해 입회인을 보낼 터, 이렇게 꼼꼼히 명분을 쌓을 정도로 치밀한 놈이 그 입회인이 오기 전에 멋대로 움직여 괜한 부스럼을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 영지전과 결투의 경계에 위치한 무언가가 시작되는 건 수도에서 입회인이 온 뒤다. 비룡을 타고 서두른다면 이틀밖에 걸리지 않을 거리니 최대한 빠르게 준비를 마치도록."

지금은 평생 겪어보지 못했던 이변에 냉정하게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왕국에서 살아남았고, 가문을 지켜왔다.

상대를 비웃는 건 모든 사건이 다 정리된 뒤에도 가능하기에, 그는 준비에 집중하기로 했다.

살아 있는 생명체에게 시도했다간 사지가 찢겨 죽는 거로 끝나지 않아 물건 배송만 가능하다는 마도서관의 특급 서비스를 통해 칼드라 왕실과 멕켈린 백작에게 문서를 보내고 서둘러 멕켈린 백작의 영지로 향하는 닷새 동안에는 정말 놀라우리만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그 배송 서비스가 이티스엘까지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에 큰 아쉬움을 느껴 오즈월을 갈구는 소소한 해프닝이 있었지만, 습격이 없었다는 뜻이다. 우리가 말을 타고 빠르게 이동한 것도 아니고 엘프들에 맞춰 도보로 이동했음에도 말이다.

원래는 셀레비안 일행과 떨어져서 그들은 먼저 목적지인 숲 인근의 도시로 향하길 바랐으나, 한사코 거절하는 통에 결국 함께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거절하는 이유는 굳이 듣지 않았다. 어떤 이유가 있든 간에 결국 그들은 나 하나 찾겠다고 북부 언저리에서 서부까지 이동한 사람들이었으니까. 어떤 이유가 됐든 그들의 결정을 거부하기 힘드니 그냥 안 듣기로 했다.

그렇게 예상보다는 긴 시간에 걸쳐 도착한 멕켈린 백작의 영지는 생각보다 정상적이었다.

전투 준비를 마친 상태였거든.

"허어... 흔한 투구걸이인 줄 알았는데 뭐지? 대가리는 멀쩡히 돌아가는 나르시시스트였던 것인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 혼잣말에 태클을 걸면 좋은 소리를 못 듣는다는 것을 몸으로 깨우친 오즈월이 뭐라 말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 현명한 선택에 아쉬워하며 셀레비안 일행에게 잠시 기다려달라 부탁한 나는 그대로 말에 올라타 영지를 둘러싼 방벽으로 향했다.

그래도 백작은 백작이라는 것일까. 영지의 관문으로 다가가니 굳게 닫힌 철문 뒤에서 문지기들이 나를 맞이했다. 멀리서 봤을 땐 단순한 문지기인 줄 알았는데 녀석들의 움직임이나 제식을 보아하니 원래 여기서 문이나 지키고 있었을 놈들은 절대 아니었다.

"엘드미아 에가. 그대는 영지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말하는 걸 보니 더욱 확실해지는군. 어떻게 보자마자 알아차렸는지 매우 궁금했지만 이 정도까지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반응하고 있으니 정찰병을 보냈을 가능성이 높았다.

비록 머지 않아 내 욕을 달고 살 가능성이 높은 친구지만 정중한 태도를 보인 만큼 나 역시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출입을 막는 게 목적입니까, 아니면 결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신 겁니까."

"...왕실에서 입회인이 찾아올 때 그대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백작님께서 말씀하셨소."

받아들였다는 말이로군.

이렇게나 본격적으로 준비할 거라고는 생각 안 했지만 어디까지나 상정 내였기에 난 문지기의 답변에 만족하며 몸을 돌렸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마력을 끌어올리고 신경을 최대한 세웠지만 등 뒤를 노리고 날아오는 화살은 없었다.

덕분에 멕켈린 백작은 영리하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오만한 놈들이었다면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쓸 수는 없다며 사람 한 둘 보내 해결하려다가 싹 다 말아먹었을 상황인데 녀석은 마치 대등한 군대라도 상대하는 것처럼 만전을 기하고 있다.

"마치 전쟁이라도 할 기세로군. 정말 저기로 달려들 생각인가?"

"물론입니다. 좀 귀찮을 뿐이죠."

질린 표정으로 영지를 바라던 셀레비안이 그 표정 그대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으나, 나는 어깨를 으쓱이는 것 외에 달리 해 줄 게 없었다.

방심한 상대냐, 방심하지 않은 상대냐일 뿐 나머지는 어차피 부질없다는 걸 말해봤자 납득할 것 같지도 않고 말이지.

"저들을 다 물리치고 백작을 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는 건가?"

"저걸 어떻게 다 물리칩니까. 제가 마법을 배우고는 있는데 아직 그런 대마법을 쓸 수는 없습니다."

"...그럼 대체 뭘 어떻게 하려고?"

질린 표정이 미친놈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바뀌었지만 그 역시 정상적인 반응이였기에 난 작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올려 영지의 관문부터 영주 성까지 주욱 가리키며 대답했다.

"돌파해야죠. 최대한 빠르게 벨 것만 베면서, 영주 성까지."

주먹 한 번 뻗는 것만으로 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10명, 20명 베어 넘긴다고 상황이 종료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암살을 했다간 온갖 문제로 지랄을 할 게 뻔할 뿐만 아니라 나 건드리지 말라는 목적에도 부합하지 않다.

그러니 결투라는 형태로 구색을 맞춘 뒤 강행 돌파할 뿐이다.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영지 전체를 혼자 쓸어 버리겠다는 생각을 할 리 없잖습니까."

스스로 말해 놓고도 헛웃음이 나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동의를 구할 겸 셀레비안을 바라보자...

"왜 그렇게 보십니까? 미친놈이라도 보는 것처럼."

...어째서인지 몰라도 그뿐만 아니라 다른 엘프들과 오즈월마저 여전히 나를 미친놈처럼 여기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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