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타고 물러나는 엘드미아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는 문지기들 옆으로 기사가 다가왔다. 그러자 성벽에 기대어 잔뜩 긴장한 채 무기를 치켜들고 있던 다른 경비병들과 달리 문지기는 침착한 태도를 보이며 그에게 질문했다.
"쏠까요?"
엘드미아가 다가오는 것을 보며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미리 장전을 마친 석궁이 그의 등에 걸려 있었다. 명령만 떨어진다면 바로 쏘기 위해 손을 옮겨 가는 그를 막으며 기사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백작님은 명분을 신경 쓰라 하셨다. 불필요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왕실의 입회인이 도착할 거라고 방금 막 전달 받은 상태였다. 엘드미아가 이를 노리고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와중에 굳이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건 좋지 않다는 게 백작의 판단이었고, 기사는 백작의 판단을 존중했다.
"허나... 놀랍군. 정말 미미한 오러밖에 느껴지지 않는데 귀 사냥꾼을 이겼다니."
기본기는 부족하더라도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며 얻은 경험으로 부족함을 채우는 남자였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거늘 엘드미아는 상처 하나 없어 보였다.
혹은 그런 척을 하고 있거나.
"...준비해라. 백작님은 입회인이 도착함과 동시에 놈이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고 여기셨으니."
"알겠습니다."
곧 해가 저물기 시작한다.
홀로 영지를 돌파하려면 당연히 야습을 시도할 터, 입회인의 도착 예상 시간을 보면 아주 치밀하게 노린 계획일지도 몰랐다. 한 켠으로는 제국이 말로만 연관이 없다고 하고 뒤에서 봐주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다.
"긴장은 군대를 상대하는 것처럼. 경계는 집나간 개 한 마리 찾는 것처럼 해라. 최대 인원으로 경계를 돌리도록."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을 기반으로 명령한 기사는 말로만 그치지 않고 직접 성벽에 올라 엘드미아를 예의 주시하기 시작했다. 공격이 시작되고 상황이 좋지 않을 것 같다 싶으면 즉시 막아서기 위해 외성으로 나온 이상 임무를 게을리 할 생각은 없었다.
부대의 기강 유지 면에서는 나쁘지 않은 행동이었다. 오러 익스퍼트의 경지에 도달한 기사가 솔선수범해서 경계 근무를 서는 마당에 게으름을 피울 용기 있는 자는 없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타이밍 좋게 왕실 병력이 호위를 받으며 입회인이 도착하고, 밖에서 야영을 준비하는 엘드미아와 한 차례 이야기를 나눈 뒤 영지 전체를 둘러보며 백작과 대화하기 위해 내성으로 들어가는 동안에도 기사는 엘드미아의 돌발 행동을 우려해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내성에서 나온 왕실 병력이 엘드미아와 영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위치에 숙영지를 건설했다. 그들은 밖에서 결투를 확인하고 입회인은 내성에서 확인한다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놈은 내성까지 못 갈 것이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 후로 한참 시간이 지나 해가 떨어지고 밤이 깊어졌음에도 기사는 성실히 자리를 지켰다.
군대라면 움직이는 걸 모를 수 없지만 단 한 명의 적은 이야기가 다르다. 오러 익스퍼트였던 귀 사냥꾼을 상처 하나 없이 이긴 실력자가 어둠을 틈타 몰래 들어오면 혼란이 가중되고 불필요한 피해가 발생할 게 분명했기에 기사는 영주의 허락을 받아 후방의 병력까지 끌고 와서 경계를 세웠다.
그 명령을 따르는 병사들 역시 최고조의 경계 태세를 유지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엘드미아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러 쓰는 기사가 저렇게 긴장하고 있으니 범상찮은 인물인 게 분명하다고 여기면서.
그런 긴장감 속에서 밤을 보낸 멕켈린 영지의 병력들이 사이로 뭔가 이상하다는 기류가 흐르기 시작한 건 다음날 새벽이 밝아 올 무렵이었다.
'야습을... 안 한다고?'
설마 영지의 움직임을 이대로 봉쇄하는 게 목적인가? 아니면 겨우 한 명을 상대로 영지의 병력이 출동하는 상황을 만들어 모욕을 주려는 숨은 뜻이 있었나?
가벼운 피로로 인해 살짝 핏발 선 눈으로 머리를 굴리는 기사의 시야에 느긋하게 일어나 아침 식사를 차려 먹는 엘드미아의 얄미운 모습이 포착됐다.
오히려 결투를 건 엘드미아 본인보다 포로로 잡혀 있는 오즈월과 엘프들이 더 불안해보였다. 아주 본격적으로 요리를 만들어 먹는 모습은 정말 도시에 시비를 건 놈이 맞나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런 불편한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식사를 다 마치고 가볍게 몸을 푼 엘드미아가 마치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영지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지레 겁을 먹고 활과 석궁을 준비하는 병사들을 저지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겨우 한 명을 상대로 먼저 싸움을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퍼지면 웃음거리조차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한 조장들이 서둘러 움직이는 걸 보며 기사는 잠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잠깐.
"아, 아, 아! 흠흠. 실례. 아침이라 목이 잠겨서."
묘하게 절도 있는 동작으로 자리를 잡고 목을 푸는 모습에 어이를 상실한 눈초리가 쏟아졌지만, 엘드미아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깊게 숨을 들이 쉬더니 우렁차게 외쳤다.
"나, 라단 에가와 에비셔 루이나의 아들 엘드미아 에가는! 도시 관문지기의 그릇된 행실을 바로잡기 위해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만으로 암살 위협을 받은 것과! 그로 인해 나 자신의 명예와 믿음을 모욕한 파스탈리아 반 멕켈린 백작에게 결투를 신청하여! 칼드라의 정당한 지도자 칼드라 16세의 인가를 받은 입회인과! 신들이 보는 앞에서! 정정 당당하게 승부에 임하여 실추된 명예를 되찾을 것을! 이 자리에서 선포한다!"
"...저거 지금 뭐 하는 거야?"
"...선전포고?"
이를 지켜보고 있던 이들 사이로 얼떨떨한 반응이 퍼져나갔지만 기사는 그런 혼란을 잠재울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당장 본인부터 저게 대체 뭔 짓인지 이해하는데 한참 걸렸기 때문이다.
그의 의문이 커지거나 말거나 엘드미아의 선언은 계속 이어졌다.
"파스탈리아 반 멕켈린 백작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나와 대적할 자! 검을 들어라! 그리고 신념의 대가로 죽음을 받아들여라! 허나 그럴 의사가 없는 자! 무기를 내려 놓아라! 이는 정당한 결투가 치러지는 과정에서 불필요하고 무고한 희생자를 내지 않기 위함이니!"
병사 하나가 헛웃음과 함께 내뱉었던 말이 진짜였다. 저건 선전포고였다. 어안이 벙벙한 와중에 엘드미아가 제 입에 손을 넣고는 목소리만큼이나 큰 소리로 휘파람을 불렀다.
-피이익! 피이이이익!
저건 또 뭔 짓거리야...?
그 묘하게 익숙한 음을 되새기는 사이, 엘드미아가 달리는 자세를 잡기 시작한 걸 본 기사가 놀라 황급히 외쳤다.
"나, 나팔! 저건 전쟁 개시 나팔을 대신한 거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평소라면 겨우 한 명이 미친 짓을 한다고 비웃었을 텐데, 미친 짓도 과도한 자신감과 함께하면 뭔가 있어 보이는 법이라고 했던가.
긴박한 기사의 명령과 이 믿기 힘든 상황이 겹쳐지자 병사들도 누구 하나 이를 가볍게 여기지 않고 바짝 긴장하며 빠르게 움직였다. 문제는 그런 병사들의 움직임보다 등에 거대한 도끼를 짊어진 엘드미아의 달리기가 더 빨랐다는 점이었다.
오러가 얼마 안 느껴졌던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움직임에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땅에 박히는 걸 본 기사가 이를 갈며 외쳤다.
"빌어먹을! 활은 됐다! 석궁병! 사격! 장창병은 성문을 지켜라!"
든든한 철문? 서부에는 이미 공성추 예카트리나라는 전설아닌 전설이 있었다.
개인의 무력을 무기가 뒷받침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서부 전체가 알게 된 사건을 기억하기에, 외벽을 지키는 그 누구도 엘드미아가 정문을 돌파하지 못하면서 일단 달려오고 보는 거라는 헛된 희망을 품지 않았다.
이미 관문을 향해 달려오는 속도부터 정상적인 범주를 아득히 넘어섰다. 저놈이면 저대로 성문을 몸으로 부딪쳐 뜯어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마저 맴돌았다. 개중에는 달려오다가 석궁을 맞고 쓰러지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은 이도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그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엘드미아가 성문에 아무런 문제없이 도달하기 직전, 석궁병을 제외한 모든 병력이 제발 철문이 무사하길 빌며 발에 불이 나도록 계단을 타고 뛰어내려갔다.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달렸으니 분명 뭔가 있을 거라는 확고한 믿음의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엘드미아는 그 믿음을 교묘하게 배신했다. 마지막까지 성문에 달라붙은 엘드미아를 쏘기 위해 조준하던 석궁병들이 기겁을 하며 외치기 시작했다.
"어어어?! 저, 저 새끼 벽 잡고 달린다!!"
"기사니이임!! 기사니이이임!!"
들려오는 절박한 외침에 스스로의 귀를 의심했음에도 몸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은, 뭐든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기사의 성격 덕분이었다. 벽을 잡고 달린다고? 그건 대체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손만 닿으면 돌벽이 무너지는 마법이라도 있나?
"저 새끼 위로 달려오고 있습니다아악!"
한둘이 외치는 게 아닌 걸 보면 저들이 보고 있는 게 다른 거 같진 않은데 왜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걸까. 갑갑한 마음에 오러까지 두르고 속도를 낸 기사는 성벽 밖으로 고개를 내민 뒤에야 그들의 외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무슨..."
엘드미아가 정말 성벽을 한 손으로 짚은 채 위로 오르고 있었다.
마치 땅 위를 달리는 것처럼 조금의 감속도 없이, 계단이라도 오르는 것처럼.
'계단?'
오러로 강화된 기사의 육안에 엘드미아가 딛고 서 있는 무언가가 포착됐다.
그의 덩치에 비하면 한없이 얇아 보이는 못 같은 것 두 개가 벽에 박히면, 엘드미아가 그 위를 계단처럼 밟으며 달린다. 그가 달리는 것만큼이나 빠르게 뽑히고 박히고를 반복하는 정체불명의 도구에 치를 떨며 기사는 옆에 있던 병사의 장창을 뺏어 들었다.
"내성에 알려라! 적은 최소 오러 익스퍼트! 마도구 사용자다!"
쩌렁쩌렁한 외침과 함께, 온 힘을 다한 기사의 투창이 벌써 성벽을 반 이상 뛰어오른 엘드미아를 향해 꽂혔다.
대체 무슨 마술을 부린 것인지는 몰라도 겨우 발 하나 올릴 정도의 지지대였다. 상체를 거의 벽에 붙이다시피하는 불안정한 자세로 오르는 것을 보면 저 이상으로 받침대를 늘릴 방법이 없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떨어트려 시간만 벌어도 좋았다. 그런 심정을 담아 던진 창을 향해 엘드미아가 밟고 있는 못보다 좀 더 굵어 보이는 못 하나가 어디선가 튀어나오더니 갑자기 날아들었다.
그건 못이라고 하기엔 너무 컸다. 크고, 굵고, 그리고 섬세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대바늘이었다.
"저건 또 뭔?!"
정체불명의 대바늘 끝과 창의 첨단이 맞물리는 순간, 창날이 박살 나고 창대가 터져 나가며 비산한다.
그 파편들이 튀기고 흩날리는 게 느리게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치솟은 대바늘이 그대로 자신의 미간을 노리며 날아든다는 것을 깨달은 기사가 온몸을 비틀다시피 하며 성벽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쐐애액!
종이 한 장 차이로 스쳐 지나간 뒤틀린 대바늘의 위력은 기사가 휘두른 창과도 같았다. 그 일격을 피했다는 것에 안도하며 다시 엘드미아를 향해 창을 던지려고 하는 기사의 귓가에, 무언가가 성벽을 뚫으며 박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직접 봤기 때문에 그게 뭘 의미하는지 이해한 기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기랄."
빠르고 일정하게 점점 커지는 소리와 함께 성벽을 짚으며 엘드미아가 넘어왔다.
마치 낮은 담벼락을 넘듯 가볍게 움직이는 그의 모습에 인지부조화를 일으킨 병사들이 제대로 된 반응도 못 하는 사이, 기사를 똑바로 바라보며 엘드미아가 웃었다.
"반응 좋은데?"
-피이익!
등에 메고 있던 양손 도끼를 마치 장난감처럼 휘둘러 고쳐 쥔 그의 입에서 작은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하늘로 끝없이 날아간 줄 알았던 뒤틀린 대바늘과 그가 성벽을 타고 올라오는 데 사용한 것이 분명한 바늘 아홉 개가 그의 뒤편으로 날아들었다.
그저 허공에 뜬 채 첨단을 겨누고 있을 뿐인데도 마치 열 자루의 창에 겨눠진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기사는 검을 뽑아 들었다.
후에 살아남은 이들이 말하길.
멕켈린의 악몽은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