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초.
엘드미아의 심장을 노리고 기사가 찌르기를 시도하는데 걸린 시간이었다.
피차 대화가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달은 기사의 행동은 재빠르면서도 숙련됐다. 철 갑옷을 입은 적조차 일격에 등판까지 뚫어 버리는 강렬한 찌르기는 거침없이 거리를 좁히며 엘드미아의 가죽 흉갑 위로 날아들었다. 기사가 보기에 엘드미아는 미처 제대로 된 반응조차 못한 것으로 여겨졌고, 뒤늦게 반응하더라도 중상을 면치 못할 거라 확신했다.
기사는 인지하지 못했으나, 자신의 확신이 단순한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데 0.2초가 걸렸다.
그리고 그 시간은 기사의 찌르기에 맞춰 엘드미아가 도끼를 휘둘러 종이 베어내듯 검을 반 토막 내는데 걸린 시간이기도 했다.
반응을 못한 건 오히려 기사였다. 그만한 힘과 속도로 움직였으면 동작이 커질 법도 하거늘, 검을 토막 내자마자 정확하게 멈춰 선 도끼를 돌격용 랜스처럼 똑바로 치켜들며 엘드미아가 돌진했다.
도끼창이 아니었기에 베이거나 찔릴 걱정은 없었지만 워낙 육중한 크기를 자랑하는 무기인터라 가슴팍에 느껴지는 충격은 마치 공성추에 맞은 것만 같았다. 그 짧은 거리에서 대체 어떻게 이런 가속을 냈는지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와중에 엄청난 충격과 함께 기사의 몸이 붕 떴다.
정확하게 명치로 전해지는 충격에 숨이 턱 막히며 반응이 또 늦어졌다. 대체 얼마나 강하게 찌른 것인지 잠깐 밀쳐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떠오르는 자신의 몸을 느끼며 기사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오러를 숨기는 기술이라도 있는 건가. 괴물이 따로 없군.'
무조건 떨어진다. 뒤에 건물이 있던가? 성벽에서 떨어져 죽는 건 조금 볼썽사나운데.
첫 대면에 전력을 다한 공격을 시도했음에도 압도적으로 역공을 당한 터라 억울함을 느낄 수 없었던 기사의 시야로 점점 멀어져 가는 성벽과 엘드미아의 모습, 그리고 기사가 순식간에 당하는 걸 보고도 용맹하게 달려드는 병사들의 모습이 같이 비춰졌다.
하지만 그건 용기가 아니라 만용 혹은 자포자기에 가까운 판단이었다. 엘드미아의 뒤에 떠 있던 바늘들이 뱀처럼 휘몰아치며 날아가 순식간에 병사들의 몸에 바람구멍을 냈다.
'망했네.'
평범한 사람이면 몰라도 저 정도 오러 유저가 침입한 이상 내성까지 일방적으로 달려 나가기만 해도 막을 수 있는 이가 손에 꼽는다. 기사는 부디 다른 이들이 엘드미아를 막을 수 있길 바라며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검에서 손을 놓고 낙하의 충격에 대비했다.
다행히 충격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다가왔다. 민가의 굴뚝을 박살 내며 떨어진 기사는 목이 부러져 죽지 않았음에 짧게 안도하며 졸도했다.
◈
놀래라 씨발. 찌르기 한 번 더럽게 빠르네.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워대는 놈들 사이에서 기사 노릇을 하고 있는 녀석답다고 해야 할지 기본기가 남달랐다. 벽을 타고 오를 때 보여줬던 투창 실력도 그렇고, 대뜸 저렇게 깔끔한 찌르기를 시도한 걸 보면 사실 놈의 주 무기는 창이 아니었을까?
간만에 기사다운 놈을 만났다는 사실에 참신함을 느끼긴 했으나, 그 여운을 오래 유지할 틈은 없었다. 일반 병사들이야 바늘 선에서 싹 다 정리가 가능한 수준이지만 방금 전의 기사 정도 되는 놈들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는 이상 최대한 서둘러 목적을 달성하는 편이 안전했다.
분명 엔벨데 저택에서 허세를 부렸던 기쉬가 마족과 붙을 정도의 실력을 지녔다고 했었는데, 방금 그 일격은 기쉬한테서도 못 느껴본 세련됨이 있었다. 그렇다는 건 이놈들도 전선에 던져 놓으면 한 큐에 죽어 나가지 않을 정도의 실력은 된다는 말이다.
귀 사냥꾼 패거리가 보여줬던 협공을 떠올린다면 이런 놈들의 협공은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다.
그래도 여기가 켈바스트만큼 대 도시인 것도 아닌데다가 토너먼트를 열어서 방랑하는 기사들을 모아 놓은 것도 아니었으니, 많아봤자 다섯 정도일 것이다. 오러 쓰는 기사의 봉급이 땅 파서 나오는 건 아닐 테니까.
그 정도면 충분히 할 만하다고 판단한 나는 링아웃 당한 기사와 바늘에 당해 비명을 지르는 병사들이라는 콤보에 정신을 못 차리고 전의를 상실한 이들을 무시한 채 내성까지의 거리를 가늠하며 빠르게 영지를 살폈다.
멕켈린 영지는 적당히 규모가 있으면서 모험가 길드같은 건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귀족의 영지라는 느낌이 팍팍 풍기는 곳이었다. 여행자가 오지 않는 자급자족의 전원생활이라는 느낌?
오그웬이 원래 이런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거의 상업도시처럼 되어 버려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게 된 터라 여러모로 감회가 새로운 풍경이다.
"자, 잡아! 절대 내성으로 보내면 안 돼!"
기사보다는 병사에 가깝게 입은 이의 외침이 잠깐 딴길로 빠질 뻔했던 내 정신을 바로잡아줬다.
그러나 이미 내게 창칼을 겨눴던 친구들의 어깨나 허벅지에 구멍을 내준 효과가 너무 큰 탓에 그 외침은 공허하게 흩어졌지고, 나는 명령을 내린 친구의 어깨에도 똑같이 바람을 구멍을 내준 뒤 가장 가까운 건물의 옥상으로 뛰어내렸다.
뒤늦게 화살이 빗발쳤지만 의미 있는 공격은 아니었다. 그대로 적당한 옥상을 타고 달리니 성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우르르 달리며 따라오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움과 다급함이 섞인 표정들을 보아하니 일이 이렇게 굴러갈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나도 바늘이 없었으면 예카트리나 흉내를 내는 것 외엔 뾰족한 수가 없었을 테니 충분히 납득이 가는 모습이다. 솔직히 조금 긴가민가 했었는데, 최근 들어 바늘 사용에 익숙해진 것이 크게 한몫했다.
어쨌거나 오러도 없는 병사들이 내 움직임을 따라올 수는 없다. 열심히 달음박질하더라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 속에서 좌절하는 친구들과 점점 거리를 벌리며 건너뛰기 좋은 옥상이 없어질 때까지 열심히 내달렸더니 내성으로 이어지는 다리 앞에 위치한 광장 같은 곳까지 단번에 올 수 있었다.
"허, 그래도 대비는 했네."
삼류 악당은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내성으로 이어지는 도개교는 올라가 있고 그 앞엔 목책과 함께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지금도 내 뒤를 따라 열심히 달려오고 있을 외성 경비들과는 장비부터 남다른 놈들은 훈련도 다르게 받는 것인지 내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당황하지 않고 매우 침착하게 석궁을 겨눴다.
아무리 오러로 날고 기는 기사라 한들 몸에 칼 안 들어가지 않는 것처럼, 지근거리에서의 일제 사격은 충분히 위협적이니 매우 현명한 판단이었다.
저 중 한 발이라도 맞는 순간 기사가 뛰쳐나와 목을 칠 생각인지 2열로 선 서른 명의 석궁병들이 오와 열을 맞춰 자세를 잡는 모습은 좀 멋있었다. 혹시 저 틈바구니에 섞여 마법사 같은 게 있을지도 몰라 마력시를 사용하자, 마법사는 없어도 놈들이 겨누고 있는 석궁의 볼트에 빛이 일렁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뭔지 몰라도 저건 맞으면 매우 위험할 거 같은데... 저것도 건틀릿에 달린 부가 기능으로 막아지려나?
흠, 애매하면 실험해 봐야지.
"발사!"
혼자 기사처럼 차려입은 놈이 명령을 내리자 1열에 선 열다섯 개의 석궁들이 볼트를 쏟아 낸다.
물론 난 놈의 입에서 '발'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마자 옆으로 몸을 날리기 시작한 뒤였다. 확실치 않은 방어구 성능 확인하다가 벌집이 될 생각은 없었기에 저 수많은 볼트 중 적당히 몇 발에만 건틀릿을 가져다 댈 생각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화망 구축이라는 개념이 없는 터라 정면에서 한 사람을 표적 삼아 쏟아진 일제 사격을 피하는 건 상대적으로 할 만했으나, 어디까지나 '할 만하다.' 는 거지 반응이 늦거나 마력의 출력이 부족했으면 다리 한쪽에 구멍 여러 개 생겼을 상황이긴 했다.
두 번 할 짓은 못된다는 감상과 함께 건틀릿에 마력을 주입하고, 딱 좋게 날아온 볼트에 장벽을 대는 찰나의 순간 볼트에 둘러진 마나가 흩어지며 볼트도 같이 튕겨 날아갔다.
솔직히 마법이 파훼 되며 충격을 받아 날아간 건지, 아니면 투사체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마력 장벽이 실체화된 건지 감이 안 왔다. 이건 나중에 제대로 실험해 봐야겠군.
일단은 눈앞의 결과에 만족하며 놈들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아직 석궁을 쏘지 않은 2열이 나를 겨눈 뒤였다. 방금 보여 준 내 움직임에 놀란 기색이 있었지만 그래도 침착하게 조준하는 놈들 사이로 검을 뽑고 방패를 치켜 든 채 뛰어오르는 기사의 모습이 들어왔다.
"발사!"
어차피 두 번째 사격도 피할 것 같으니 차라리 그 짧은 틈을 노리고 달려들 생각인 것 같았다.
미안해서 어쩌나, 이번엔 닥치고 돌격인데.
혹시 몰라 건틀릿에 좀 더 마력을 주입한 채 이번에는 최대한 몸을 웅크리며 앞으로 돌진했다.
방금 눈으로 성능을 확인했어도 코앞에 날아오는 투사체와 직면한다는 건 좀 많이 쫄리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팔을 과도하게 앞으로 쭉 뻗어 마력 방벽과 거리를 두면 균형이 흐트러져 기사의 공격에 대응하는 게 늦어질 수 있다.
덕분에 눈앞에 방탄 유리 하나 세워두고 날아오는 총알을 직면하는 꼴로 뛰어야 했다. 그나마 적나라하게 당황하는 기사와 병사들의 얼굴도 볼 수 있었기에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던 거지, 좋은 경험은 아니다.
그들의 판단은 나쁘지 않았다. 상대가 나빴을 뿐이지. 다 합쳐봤자 십여 초도 되지 않는 짧은 접전 끝에 공수가 역전됐다.
석궁병들이 비싼 석궁을 내던지다시피 하며 목책과 함께 세워두었던 방패를 들어 뒤로 물러난다.
내가 볼트를 튕겨 내며 앞으로 달려든 탓에 자신이 예상한 것과 거리가 달라져 주춤한 기사가 검이 아닌 방패를 앞으로 뻗는다. 놈의 방패는 녹여서 재활용할 경우 갑옷 한 벌은 족히 나올 것처럼 두꺼워 보이는 타워 실드였다.
저런 걸 저리 가볍게 들고 움직이는 걸 보아하니 이놈도 오러 유저로군.
"나는!"
하지만 놈의 손에 존나게 두꺼운 방패가 있듯이 내 손엔 존나게 잘 드는 도끼가 쥐어져 있지.
방패를 피해 어떻게 공격할지 고민하기보다 내 도끼가 어디까지 박힐지 확인해 볼 요량으로 도끼 자루를 고쳐 쥔 나는, 주인 잘못 만난 불쌍한 친구를 향해 아래에서부터 위를 향해 있는 힘껏 도끼를 휘두르며 외쳤다.
"엘드미아 에가다!"
기사의 타워 실드가 땅바닥에 꽂히기 직전, 흙바닥을 가르며 도끼날이 날아들었고.
도끼와 방패가 부딪치며 자아낸 굉음이 광장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