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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60화 (360/412)

전투가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탄을 입회인이 쏘아 올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대기하던 호위 병력들이 영지로 진입하며 이것저것 확인하기 시작했다.

피해를 파악하고 차후 세금을 걷는데 적용하기 위함이라나? 딱히 내가 신경 쓸 필요 없는 사안이었기에 귀담아듣지는 않았다. 어차피 나와 멕켈린 백작의 아들 그리고 입회인이 삼자대면중이라 내가 안 들어도 듣는 사람은 충분했다.

"...그렇기에. 이건 정당한 결투의 결과에 따라 엘드미아 에가, 그대에게 멕켈린 가문이 지불하는 배상금이오."

침통한 표정의 사용인들이 성 안에서 가져온 탁자 위에 올려진 주머니는 두둑했다. 입회인이 내용물을 확인하는 과정을 옆에서 하나하나 다 지켜봤기 때문에, 난 짧게 고개를 끄덕인 뒤 배상금이라는 이름의 보석 주머니를 품에 챙겼다. 한참을 울고 해탈한 것인지 이름도 모르는 멕켈린 백작의 아들은 한없이 덤덤한 얼굴로 그 과정을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

"이후로 멕켈린 가문과 영지는 그 어떠한 보복도 행하지 않을 것이며, 이는 칼드라 왕실의 이름으로 지켜질 것이오."

그리 말하면서 입회인이 왕실의 인장이 찍힌 문서도 건네줬다. 이빨에, 뿔 조각에, 단검도 모자라 증명서까지 주머니에 넣게 될 줄이야. 어차피 이건 쓸 일도 없을 테니 나중에 집에 돌아가면 따로 보관하는 편이 낫겠군.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소?"

적당히 접어서 품에 넣는 것까지 가만히 지켜보던 멕켈린 주니어가 생기 없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상 이 자리에 앉은 후로 처음 입을 연 거였기에 무슨 말을 할까 궁금해 고개를 끄덕이니, 한참을 주저하던 주니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약 아버지가 그대를 노리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 궁금하오."

"언젠가는 일어났겠지.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큰 형태로 말이야."

"...어째서 그리 생각하시오?"

"엘프들을 건드리는 사업에 손이 닿았잖아."

'부당한' 노예화가 불법인 거지, 이 세계에서 노예는 합법이다. 당장 저 바다 건너에 위치한 거대한 사막 왕국의 주된 상품이 노예인 것도 큰 요인이고, 노예라는 값싼 노동력이 가져다주는 이점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록 환생이라고는 하나 나는 엄연히 이 세상 사람이기에, 단순 무식하게 노예제도를 비판하며 노예 해방 운동 같은 걸 일으킬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런 건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니까.

하지만 엘프 노예 상인은 별개다. 내 삶에 아실리에가 나타난 그 순간부터 놈들은 보이는 족족 내 손에 죽어 나가야 하는 몬스터에 불과하다. 당연히 그 뒤에서 놈들로 이득을 보거나 후원하는 하는 녀석들 또한 마찬가지지.

굳이 그걸 다 설명해 줄 필요는 없었기에 적당히 이야기해주자, 내 대답을 들은 멕켈린 주니어의 생기 없던 눈동자에 묘한 빛이 돌기 시작했다.

"...그게 그릇된 일이기 때문이오?"

"아니? 그보다는 내 지인이 엘프고, 그 지인이 노예 상인한테 부당하게 붙잡혔던 적이 있어서인데."

뭔 어처구니없는 오해를 하나 싶어 심드렁하게 대답해주니 녀석의 눈이 다시 흐리멍덩해졌다. 뭔가 적잖이 당황한 기색마저 보였다.

"그, 그저 그런 이유로? 그게 정의로운 일이기 때문이라거나, 악당을 벌한다는 이유가 아니라?"

이번엔 내가 당황할 차례였다. 고작 그딴 이유로 내가 움직였을 거라 은연중에 믿고 있었던 눈치였기 때문이다. 얘가 혹시 장님인가 하는 의심도 생겼지만 지금까지 멀쩡히 혼자 잘 움직였었기에 나도 모르게 피바다가 된 주변을 돌아봐야 했다.

정의로운 놈이 이런 짓을 할까?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필터조차 거치지 않고 말이 튀어나왔다.

"이런 학살극을 저질러 놓고 정의를 외치는 새끼가 있다면 머리 한구석 어딘가에 문제가 많은 새끼일 거 같은데."

이놈도 소설을 너무 많이 보고 자란 부류인가. 이제 영지를 이어받아 운영할 놈이 저러고 있으니 좀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대답은 마저 해주기로 했다.

"난 나와 내 주변에 피해가 가는 걸 극도로 싫어해. 그냥 그게 이유야."

착하고 예의 바른 사람은 존중하고, 나 역시 되도록 그렇게 살려고 하지만 그건 그냥 전생에서부터 이어져 온 내 양심이자 학습된 습관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마음에 들지 않은 것도 아니고 사람이라면 응당 그리 살아야 한다고 믿기에 계속 실천하고자 할 뿐.

정의롭네, 악하네는 부질없는 기준이다.

중요한 건 좆같냐 좆같지 않냐지.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보는 멕켈린 주니어의 입에서 더 이상 질문이 이어지지 않았기에, 난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딱히 멕켈린 주니어를 협박하거나 경고할 생각은 없다. 이 사달을 낸 것만으로 이미 충분했다. 여기서 놈이 눈이 돌아가 왕실마저 무시하고 날 노린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한 번 더 얹어 주면 된다.

이제는 다시 셀레비안 일행과 함께 여행길에 오를 시간이다.

엘드미아가 영지의 성벽으로 달려들었을 때, 셀레비안은 제정신인 줄 알았던 인간이 사실 엄청난 정신병자가 아니었을까 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했다.

아실리에가 홀로 엘프 사냥꾼 삼 형제의 숙영지에 처들어갔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가 보여 준 무용은 분명 대단했으나,  아무리 그래도 한 명과 영지의 결투라는 건 허풍쟁이 이야기꾼조차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내저을 법한 조합이다.

그랬기에 그가 대뜸 성벽을 타고 순식간에 기어올라 벽 너머로 사라졌을 땐 자신의 눈이 잘못되거나 뭔가 세상이 이상해졌다고 생각했다. 곁에 있던 동료들과 포로 오즈월 역시 같은 반응을 보였다.

상상도 못 한 방식으로 영지 최대의 이점을 일방적으로 돌파해 버린 엘드미아가 멀쩡한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제 잠깐 지나친 칼드라 왕국의 입회인이 말했던 결투 종료의 신호탄이 쏘아지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살아 있는 건 확실했다. 그때부터 셀레비안은 깊은 한숨과 함께 아실리에를 재평가했다.

비록 직접 보지는 못했어도 그 성격이 어디 가지는 않은 게 분명했다. 저리도 무모한 자를 반려로 삼은 걸 보면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옛 격언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저는 숲에서 맨손인 에가 씨를 만나도 이기지 못할 것 같습니다 조장."

그런 사적인 감정까지는 공유할 수 없었던 조원들은 순수하게 엘드미아의 무력에 감탄하며 혀를 내두를 뿐이다. 그들 역시 엘프 사냥꾼들과의 전투에서 선봉에 설 정도로 실력 좋은 습격대원들이었지만 아무래도 도시를 상대로 싸움을 거는 인간과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간 얼마 되지 않은 시간 동안 동행하며 그가 보여준 모습이 있기 때문일까, 놀랍게도 그의 죽음을 걱정하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셀레비안은 자기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엘드미아가 좀 많이 다쳐서 돌아올 수는 있어도 죽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동시에 저 멀리서 한줄기 빛이 하늘로 쏘아졌다. 입회인이 말했던 신호탄이었다.

"...끝난 건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왕실의 인간들이 영지로 향하는 것을 보아하니 확실했다. 개중 일부는 셀레비안에게로 다가와 오즈월의 인계를 요청했고, 그는 엘드미아에게 들었던 대로 오즈월에게 약간의 돈을 얹어 준 뒤 왕실의 인간들에게 넘겼다.

목숨을 위협받았다가 포로가 되고, 협박 속에서 문서까지 작성한 뒤 그 노동에 대한 수고비를 받게 된 오즈월은 세상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왕실의 인간들과 함께 영지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리고 머지않아 도시에서 엘드미아 에가가 걸어 나왔다.

"...멀쩡하네요."

"...멀쩡하군."

도시에 들어가기 전과 비교하면 피와 먼지로 지저분해지긴 했다. 얼굴도 살짝 피로한 기색이 있었고, 실제로 피곤한지 길게 하품까지 했지만 걷는 데 아무런 불편도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긴 도끼 자루를 빨랫대처럼 목에 걸치고 그 위에 양손을 올린 자세로 털레 털레 걸어 오는 엘드미아의 모습은, 영지와 싸운 자라기보다 나무하러 갔다가 돌아온 나무꾼에 가까웠다.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정말 영지를 상대로 한 결투에서 이기고 사지 멀쩡하게 살아 돌아온 것이다.

"정말 아실리에는... 엄청난 인간과 다니고 있군."

서부 왕국 역사에 큰 획으로 남을 대사건을 간접적으로나마 목격했다는 사실에 엘프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저런 인간이 나중에 아실리에와 결혼을 한다 이 말이지?

"아실리에 씨가 저 친구에게 부탁만 하면 북부에 있는 사냥꾼 놈들 씨가 말라버리는 거 아닐까요."

"그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현실성 있게 느껴진다는 사실이 놀랍군."

저 멀리서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엘드미아의 대수롭지 않은 태도에, 셀레비안은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실리에에게 네 미래의 반려가 영지와 결투를 벌였다가 죽어 버렸다고 말 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마음 놓고 웃을 수 있었다.

"피곤해 보이는군. 멕켈린 영지는 어땠나?"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져서 가볍게 질문하자, 엘드미아는 잠깐 걸음을 멈추더니 눈을 굴리며 고민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셀레비안과 엘프들은 그가 과연 저 도시를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했다. 강했다고 말하며 존중할까? 아니면 형편없었다며 비웃을까?

잠깐의 고민 끝에 엘드미아는 살짝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자존심은 강한 동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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