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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62화 (362/412)

나에게 있어서 사칭범이라는 건 숙원 성취 최악의 방해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방금 죽은 짭드미아부터가 그렇다. 이 새끼가 무슨 목적으로 날 사칭했는지는 알 수 없어도 경비들의 정당한 요구를 무시하고 갑질을 시도하는 짓거리로 사방팔방 민폐를 뿌리지 않았는가? 심지어 도시 경비들은 그냥 이름을 댄 것만으로도 제대로 된 판단도 못한 채 우왕좌왕하기까지 했다. 이게 그나마 규모가 있는 도시여서 이 정도지, 작은 도시였으면 영락없이 쫄아서 문을 열어줬을 수도 있다는 소리다.

이게 점점 퍼져서 나중에 내 이름을 팔아 물품을 갈취하고 귀족들을 등처먹는 새끼들이 나온다면? 모험가 길드에서 만났던 그 어벙이처럼 없는 살림에 돈까지 뜯기고 날 원망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는 건데 그걸 참아?

"만나는 족족 대가리를 쪼개버려야지 진짜."

비록 나에게 피해가 전무하다 하더라도 방해다. 악마들 만큼이나 죄질이 나쁜 새끼들이니 단 한 명도 살려둘 이유가 없었다.

"어, 저, 지, 진짜 엘드미아 에가입니까?"

졸지에 사람 하나가 죽어 나가 적막이 흐르는 와중에 기사 한 명이 용기를 내서 물었기에 난 대충 품에 있던 켈바스트 변경백의 신원보증서와 멕켈린 영지의 결투 증명서를 꺼내 내밀었다. 그러자 우물쭈물 다가와서 그것들을 받아 확인한 기사의 단추구멍만하던 눈이 크게 떠졌다.

"서, 설마 저희 도시도?!"

"개소... 후, 지나가는 길입니다."

그래, 소문이 곱게 났을 리 없으니 저런 반응이 정상이겠지.

그래도 마냥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대충 눈으로만 보고 나중에 제대로 확인할 줄 알고 다시 줄을 서려는데,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경비들이 우리를 하이패스로 통과시켜줬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새치기는 조금..."

"새치기라뇨. 도시에 혼란과 위협을 주려던 사기꾼을 처리해 업무를 수월하게 해주셨으니 이 정도는 당연한 일입니다."

즉석으로 짭드미아의 주머니를 털어 나온 돈되는 금품들까지 싹 다 챙겨 내 손에 올려주며 웃어 보이는 기사의 얼굴은 굉장히 경직되어 있었지만, 나야 빨리 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돈도 생겼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심지어 뒤에 있던 다른 사람들조차 그의 의견에 동조하여 고개를 주억거렸으니 더 거절하는 것도 실례같았다.

결국 짭드미아의 숭고한 희생으로 쾌속 진입을 하게 된 우리는 주변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도시 내부로 진입할 수 있었다. 뒤로 조금씩 멀어져가는 관문을 한 번 돌아본 셀레비안이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무리 인간들 사이에서 소문이라는 게 빨리 돈다고는 하지만... 자네와 관련된 이야기는 좀 많이 빠른 것 같군."

"저도 방금 전까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켈바스트 쪽에서 손을 좀 쓴 것 같습니다."

약식이라 하더라도 검문은 검문이었기에 그 틈을 타 기사에게 이것저것 물어본 바, 멕켈린 영지의 일은 어떨지 몰라도 이미 켈바스트에서 있었던 기사 반갈죽 사건은 사방팔방 퍼질대로 퍼졌을 거라고 한다. 기사인 그조차 상당히 미화된 형태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니 켈바스트 변경백이 말했던 소문 작업이 굉장히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대초원에서 떨어졌으니 켈바스트를 지나쳤겠... 설마 거기서도 백작을 베었나?"

"아뇨, 거기 백작은 아주 말이 잘 통하는 지성인이라서."

사실 멕켈린 백작도 대화의 기회가 있었다면 말은 통했을 거 같지만... 제 권력을 너무 과신했지. 그런 면에서보면 켈바스트 변경백은 백작으로서의 힘도 출중한 주제에 굉장히 신사적인 사람이었다. 아마 나이 먹고 늙을 때까지 살아 있으면 레스롬 영감님같은 인물이 되지 않을까?

"...마치 말이 통하지 않았으면 베었을 거라는 말로 들리는데."

"이거 내놓으라고 자꾸 건드렸으면 그러지 않았을까 싶긴 하네요."

내 등에 걸린 도끼를 툭툭 건드리며 대답하자 셀레비안이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카쿨라의 도끼라고 했던가? 분명 꽤 오래 전에 인간 기사 한 명이 쓰던 무구를 놈이 빼앗고 주력으로 쓰기 시작했다고 들었는데 아직도 쓰고 있었을 줄이야."

자기 입으로 숲밖에 나오질 않았다는 엘프치고 굉장히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에 난 조금 놀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정확하십니다. 북부하고는 거리가 꽤 있는데 의외로군요."

"그때는 그 근처에도 숲이 좀 있었거든. 한 70년 정도 전 일이던가?"

...뭐? 70?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움찔거리는 사이 옆에 있던 엘프가 조용히 셀레비안의 말을 정정했다.

"61년 전 입니다 조장."

"아, 그랬지.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자꾸 요즘 일은 잘 기억이 안 난다니까."

하하하 웃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엘프들과 달리 난 억지로 따라 웃으며 열심히 머리를 굴려야 했다. 60년이 넘는 세월을 요즘 일로 치부하는 장생종의 정신나간 시간관념도 문제였지만 카쿨라가 그렇게 오래 살았다는 게 굉장히 신선한 충격이었다.

오크가 그렇게 장수할 수 있는 몬스터였나? 어차피 몬스터라 평균 수명에 딱히 관심을 두지 않은 탓에 내 지식에는 없는 정보였다.

흠? 다시 생각해 보니 역시 오크는 오크였던 건가...?

오크가 성체가 되는 시간은 인간보다 빨라서 확실치는 않아도 켈바스트의 기사였던 뒤베르트를 죽여 전리품으로 획득한 게 갓 태어났을 때일리는 없다. 못해도 부족 전쟁을 통해 구르고 굴렀을 시기겠지. 그게 내 나이쯤이라고 쳐도 나와 싸웠을 땐 이미 놈의 나이가 80에 육박한다는 말이 된다.

전생이었다면 노인공격 그 자체였을 상황이지만 수인을 비롯한 일부 장생종과 오크같은 몬스터들은 노화로 인한 육체 능력의 감소가 현저히 낮다. 결국 카쿨라는 평생을 전투와 함께 하며 살아왔음에도 오러 익스퍼트에 머무는 실력이었다는 말이 된다.

"카쿨라의 주술은 엘프들 사이에서도 정평이 나 있었지. 놈이 죽었으니 한동안 초원도 잠잠하겠어."

아, 맞다. 걔 주술전사였지. 그러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지. 과연 오크들의 특이점이라 칭하기에 손색이 없는 놈이었다.

그리고 그건 이 도끼도 마찬가지지. 61년이나 오크가 썼는데 이렇게 깔끔하다고? 이 정도면 뭐가 걸려 있어도 단단히 걸려 있는 아티팩트임이 분명하다.

"어쨌든 이번엔 도시도 호의적이니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출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음, 자네와 함께 다니면서 잠잠할 날이 없었다 보니 솔직히 확신은 안서는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다들 농담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익숙해졌는지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셀레비안의 우려와 달리 도시에서 하룻밤 묵는 동안 우리는 아무런 트러블에도 휘말리지 않았다. 도시는 치안 유지를 위해 꽤 준수한 노력을 들이는 편이었고, 술집에서 흔히 보이는 주먹 다툼이 고작일 정도로 괜찮은 곳이었다.

범법자들에게서 뜯어낸 돈으로 시설 좋은 여관을 잡은 것도 한몫했겠다만, 어쨌든 새벽부터 개운하게 일어난 우리는 주방장에게 추가금을 지불해 조금 이른 식사와 점심용 도시락을 얻어낸 뒤 도시를 떠났다.

이번에는 정말 겨울 바캉... 에이 씨, 말을 말자.

지금까지 이래 놓고 좋은 꼴을 못 봤다.

그냥 최대한 아무 생각 없이 걸음을 옮기며 뒤늦게 떠오르는 아침 해를 구경할 무렵,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한 숲을 가리키며 셀레비안이 평소보다 활기 넘치는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예상보다 겨울이 늦게 찾아왔군. 좀 더 깊이 들어가야 할 거라 여겼는데 바로 이동할 수 있겠네."

"다 온 건가요?"

"세계수로 가기 위한 입구에 다 왔냐고 물어본 거라면, 그렇다네."

드디어 집에 간다는 느낌으로 분위기가 풀어지는 다른 엘프들을 보아하니 정말인가 보다. 당장 내가 보기엔 아무런 차이점도 알아낼 수 없었기에 그냥 적당히 기뻐하며 그들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도 말했네만, 모든 엘프가 자네를 반겨 주지는 않을 거라네. 허나 우리가 최대한 자네 옆에 있을 것이니 너무 괘념치 말게나."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짜는 아니야. 아실리에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이들이 참 많거든."

나랑 여행하면서 많이 힘들었던 것인지, 아니면 정말 순수하게 집에 돌아간다는 게 기쁜 것인지 셀레비안도 들뜬 감정을 감추지 않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 그들의 반응을 보고 있자 하니 여기까지 오면서 정말 별생각없었던 나의 심경에도 뒤늦은 변화가 찾아왔다.

생각해 보면 판타지 소설의 정석 중 하나인 세계수잖아?

"갑자기 궁금해졌는데, 인간이 세계수가 있는 곳에 함부로 발을 내디뎌도 괜찮습니까?"

"당연히 함부로는 안 되지. 자네는 그 귀걸이를 통해... 자네들이 말하는 것처럼 신원을 보증받은 거야."

"이 귀걸이가 그런 역할도 하는 거였습니까?"

그래서 지크프리트 파티의 엘프가 보고 기겁했던 건가? 새삼 놀라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해진 귀걸이를 쓰다듬었더니, 셀레비안과 다른 엘프들의 표정이 더 놀라고 기괴한 것을 봤다는 듯 묘해지기 시작했다.

"...자네 그 귀걸이가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받았나?"

"수호부? 같은 거라고 알고 있었는데요."

그리고 그 표정은 내 대답에 더욱 이상하게 바뀌었다.

다른 의미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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