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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63화 (363/412)

북부까지는 게이트를 타더라도 몇 번을 갈아 타야하는 거리인지라 숲에 들어섰음에도 우리는 계속 걸어야 했다.

그리고 점점 하얗게 변해가는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셀레비안에게 귀걸이가 지닌 상징이 무엇인지 아주 상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요약하자면, 원래는 정말 소중한 사람의 안전을 기원하는 수호부는 맞는데... 거의 ‘이 전투에서 살아 돌아가면 그녀에게 고백할 거야.’ 급 클리셰에 가까운 물건이라고 한다.

반드시 죽는 게 아니라 반드시 결혼하는 수준으로 말이지. 대충 다음에 당신을 만났을 때 사랑을 고백하겠습니다, 라는 의미로 쓰인다고. 덕분에 듣는 내내 입꼬리와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해야했다. 누군가 자신을 그렇게까지 소중하게 대하려고 한다는 데 싫을 수가 있나.

하지만 그런 것과 별개로 내 눈치를 보는 엘프들 때문에 태연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해야 했다.

왜냐고?

“그, 혹시 우리가 괜한 소리를 한 게 아닌지...”

마치 자기들이 말실수해서 남의 결혼 파토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인 엘프들의 시선을 받으면 그렇게 된다. 그들은 내가 아직 어린 인간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고, 혹여 아실리에의 급발진 사랑에 부담과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까 매우 심각하게 걱정하는 듯했다.

다행히 그 안에 들어 있는 인간은 정신연령 30대를 바라보는 아저씨입니다 여러분.

“전혀요. 귀걸이를 소중히 여길 이유가 하나 더 생겼군요.”

“하하! 그렇지! 그렇고말고! 하하하!”

특히 셀레비안이 정말 보기 드물게 당황하다가 내 대답을 듣고 나서야 안도의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속으로 아실리에를 놀려 먹을 생각이나 하며 그 웃음에 동조했고, 결과적으로 우리는 굉장히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세계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그 분위기는 정확히 세계수 앞에 당도한 순간까지만 이어졌다.

“이곳이 바로 모든 엘프들의 성지, 세계수의 영토라네.”

다른 엘프가 시비를 걸어서도 아니고, 그들이 갑자기 분위기를 잡아서도 아닌, 그저 내가 세계수라는 거대한 신목에 압도당해 입을 다물 수 없었기 때문에.

하얗기만 하던 주변에 뭔가 묘한 연분홍빛이 섞이기 시작한다고 느낄 무렵, 엄청난 속도로 흘러가던 풍경이 정상적으로 멈추며 셀레비안이 자랑스럽게 두 팔을 벌리며 소개했다. 그의 뒤로 보이는 은은하게 빛나는 새하얀 거목巨木은 하늘까지 치솟아 있었다.

정말 나무가 맞긴 한지 의구심밖에 들지 않는 새하얀 나무의 빽빽한 가지는 사방팔방으로 뻗어 있고, 이곳이 북부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화사한 봉오리와 잎사귀들이 맺혀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잎사귀와 봉오리들이 계속 피고 지고를 반복한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세계수에서 떨어지는 꽃잎과 잎사귀들로 인해 세계수의 영역 안에는 눈이 내리지 않음에도 눈이 내리는 것만 같았다.

굉장히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관광지로 만든다면 발길이 끊이지 않을 게 확실할 정도로.

“...세상에.”

너무 아름다워서 욕이 나올뻔 한 걸 가까스로 참았다.

주변에 다른 엘프들의 모습이나 거처가 있긴 했으나 조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거라고는 섬기는 신목이 이리 아름다우니 엘프라는 종족도 치사할 정도로 아름다운가보다. 라는 시답잖은 감상과, 어쩌면 살면서 처음으로 직접 마주하는 진짜 신성을 향한 경외심뿐.

저건 세상에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 그 자체였다.

“개인적으로 나름 만신전에 예배도 드리면서 신실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불경한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음? 어째서 그리 생각하나?”

“만신전에 세계수는 없었거든요.”

전생에는 무신론자였다.

딱히 지금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다르진 않을 것이다. 나는 신의 존재를 느낄 수 없었고, 신앙인들을 무시하고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나에겐 없는 존재와 다름없었다.

그랬기에 내 마지막 숨이 넘어가는 그 순간에도 내가 내뱉은 건 내 삶의 종지부를 그따위로 찍게 만든 빌어먹을 강도 새끼와 좆같은 인생에 대한 쌍욕이었지, 신에 대한 원망이 아니었다. 없는 이를 어찌 욕하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내 존재 자체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증거다. 지크프리트 역시 마찬가지고, 눈앞의 세계수 역시 그렇다. 이는 결국 완벽하진 않을 지언정 이 세계가 신들의 비호 아래 이어지고 있다는 말이었고, 내게 있어서 그런 존재에게 감사를 표하며 기도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 되어 버렸다.

그랬기에 난 셀레비안에게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기도 올리는 법을 알 수 있을까요?”

엘드미아의 말을 들은 셀레비안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건 비단 그뿐만 아니라 여정을 함께한 엘프들 역시 마찬가지였고, 주변에서 그들의 등장에 관심을 기울이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엘프에게 세계수는 단순한 신앙이 아니라 모든 것의 시초이자 자랑이었으니까.

장생종 중에서조차 그냥 좀 큰 나무 취급하는 몹쓸 것들이 있는 마당에 인족이 자진해서 세계수를 경배하고자 하다니? 긴 세월 속에서 이 땅에 직접 발을 들인 이들이 많지는 않더라도 적은 것도 아니었거늘,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심지어 그의 조심스러운 자세와 태도를 보아하니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도 아닌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쉬이 알려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셀레비안은 애써 웃음을 누그러뜨리며 엘드미아에게 설명하려고 했다.

“자네가 신께 경배드리는 올바른 자세를 지녔다는 점에 대해서는 내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그 마음이 결코 가벼운 게 아니라는 것도 알겠네만...”

신 앞에 자신을 내보이고 경배하는 걸 어찌 쉬이 할 수 있겠는가. 엘프들에게 있어 ‘기도’ 라는 행위는 단명종이 식탁에 둘러앉아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것과는 궤를 달리한다. 교단의 고위 성직자들이 기도를 올리는 것과 같은 수준의 엄격함 속에서 이루어지는 게 가장 일반적인 기도였으니까.

세계수를 향한 감사의 마음을 항상 품고 살아가는 그들조차 기도는 자주 하지 않는다. 그만큼 엄숙하고, 엄격하며, 가벼이 여길 수 없고, 가벼이 여겨서도 안 되는 신성한 의식이었기에.

그 사실을 엘드미아에게 조곤조곤 설명하려 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더 놀라웠다.

“기도의 의미가 저희 단명종과 다르다는 이야기는 아실리에에게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부탁드리고자 하는 건 신의 존재를 직접 목도했음에도 경배하지 않는 건 불경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결코 가볍게 배우지 않을 테니...”

“당장 가세!”

이건 참을 수 없다. 셀레비안은 혹여 신관이 거절하면 자기가 알려주고 말겠다는 굳은 결의 속에서 엘드미아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동행했던 엘프들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아실리에가 사람을 잘 봤다고 연신 칭찬하기 시작했고, 주변에서 귀만 기울이고 있던 다른 엘프들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이방인에 불과한 엘드미아를 마치 오랫동안 알아 온 친한 동네 꼬마처럼 격하게 칭찬하며 다가왔다.

아무리 다양한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섬긴다고 한들 이종족의 신에게마저 그러기란 쉽지 않은 것이었다. 장생종들끼리도 마치 편 가르기 하듯 자신들의 종족이 섬기는 신을 더 우월하게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단명종은 말할 것도 없다.

긴 삶을 살아가는 엘프 중에서도 극단적 세계수 예찬론자가 있는 마당에, 150년도 못 살고 가기 일쑤인 인족의 솜털도 다 안 빠진 것 같은 아이가 신이기에 경배하는 게 마땅하다는 기특한 소리를 하다니!

“무슨 일인데 이렇게 갑자기 몰려 움직이나?”

“글쎄 갑자기 나타난 인간이 세계수께 기도를 올리고 싶다는군!”

“...인간이 여길 어떻게 왔는데?”

“지금 그게 중요한가!”

“아, 아니, 그건 아니지. 근데... 정말 자발적으로?”

"그렇다고 하는데?"

어련히 뭔가 방법이 있어서 왔겠지. 적의가 없고 문제가 없으니 올 수 있었겠지. 그런 전제가 기본으로 깔린 상태인지라 엘프들의 관심은 오직 ‘인간이 정말 진심으로 세계수께 기도를 올리려고 하는가?’ 로 집중되었다.

“듣자 하니 아실리에의 반려라는데?”

“그 엘프 사냥꾼 삼형제를 처단한 아실리에? 살아 있었단 말인가?”

“노예가 될 뻔한 걸 구한 인연으로 같이 지내게 되었다는 것 같아!”

“좋은 사람이네?”

“귀 사냥꾼도 죽였대!”

“엄청 강하고 좋은 사람이네?”

본디 세계수는 엘프들이 거주하는 곳이 아니다. 모든 부족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통로임과 동시에 신전이고, 이를 관리하고 유지하기 위해 모든 부족에서 모인 이들이 각자 임시 거처를 세운 채 의무를 다할 뿐.

그렇기에 신관의 부름 아래 부족의 대표들이 모이는 경우가 아니면 인파가 몰릴 일도 거의 없고, 이곳에서 의무를 다하는 이들 역시 엘프 중에서 굉장히 신실한 편에 속하기에 평소에는 엄숙함을 유지하는 걸 미덕으로 여기는 편이다.

그런데 지금은 너나 할 것 없이 소문과 이야기를 전해 듣고 진귀한 광경을 보기 위해 모여 들었다.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엘드미아가 매우 멋쩍은 태도로 셀레비안에게 물었다.

“그, 굉장히 부담스러운데 원래 이렇습니까?”

“그럴 리가 있나. 자네가 기특한 말을 해서 다들 관심이 동한 것 같네. 그럴 만도 하지!”

‘시골 마을 유일한 막내 귀염둥이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이라는 엘드미아의 아주 작은 중얼거림이 있었지만, 그걸 들은 이들은 없었다.

비록 수많은 엘프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거기에 적의는 없었기에 엘드미아는 일단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적당히 넘기기로 했다. 호기심과 호의가 적의보다 백만 배는 나았다. 비록 신께 기도드린다는 게 과연 그 정도 호의를 받을 일인가는 제쳐 두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엘드미아와 셀레비안 일행이 엘프들로 이루어진 인파와 함께 세계수의 코앞까지 당도했을 때, 크기는 크지 않지만 세계수처럼 하얗게 빛나는 작은 신전에서 신관복을 차려입은 엘프가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푸른 넝쿨 부족의 셀레비안. 내 평생 인족의 기도를 도울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엘드미아는 혹여 ‘어디 감히 짧은 귀가 우월한 세계수 님 앞에서!’ 같은 말을 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가 걱정하는 귀쟁이는 이곳에 없었다. 이름 모를 신관은 오히려 엘드미아를 굉장히 반기는 눈치였다.

“비록 그대가 우리와 같은 세계수의 자식이 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이곳에 방문하자 마자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신을 경배하는 일이라고 하니 어찌 반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쪽으로 오시지요. 혹시 다른 신께 기도드리는 법을 배운 적이 있으십니까?”

“어...예. 있긴 하죠.”

“어느 신이시죠? 태고의 신들이시라면 의외로 기도에 공통점이 많거든요. 좀 더 이해를 쉽게 도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신전에 이르렀음에도 빠지지 않은 인파들과 셀레비안 일행은 서로 섞여 엘드미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떤 신일까? 인간들의 나라인 이티스엘 출신이라는데? 거긴 만신전을 모시는 몇 안 되는 나라 아닌가? 가장 득세하고 있는 건 천칭의 뤼비스카를 모시는 종교라고 들었던 거 같긴 한데. 제국과 가까우니 에테를 섬길지도 모르지. 마족하고 전쟁 중인 그 나라 맞지? 힘들었겠는걸 등등.

그런데 어째서인지 엘드미아가 굉장히 진땀을 빼기 시작했다. 빈말이 아니라 진짜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해서 웃는 낯으로 그를 반긴 신관마저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였다.

뭐지? 고대 악신을 섬길 일도 없는데 저런 반응을 보일 이유가 있나? 그때 엘드미아가 열심히 눈을 굴리다 말고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신 에파가 님이요.”

순간 정적이 흘렀다. 당황한 신관이 그나마 빠르게 표정 관리에 들었지만 다른 이들은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엘드미아가 걱정 끝에 입을 연 것과 달리 그 반응은 경악이 아니라 순수한 감탄이었다.

와, 마족이랑 피 터지게 싸우는 나라에 살면서 마신께 기도드린다고? 이건 좀 많이 굉장한데?

대부분 웃음까지 터트리며 신을 경배할 줄 아는 인족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 와중에, 모처럼 소란스러워져 잠깐 구경왔다가 엘드미아의 대답을 들은 한 엘프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저리 신실할 수 있다니. 신들의 대전사가 따로 없군."

워낙 작은 중얼거림이었기에, 그의 말은 금방 파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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