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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64화 (364/412)

정말 많은 고민을 했지만, 엄연히 한 종족의 신성을 앞에 두고 구라를 칠 수는 없었기에 사실대로 말한 결과는 내 예상보다 훨씬 우호적이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필멸자가 문제지 그들을 굽어 살피고자 하시는 신들께서 무슨 잘못이냐는 식이다. 마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선포한 거면 모를까 마왕이 나선 것이니 아무래도 상관없다나?

그 이야기는 얼핏 들으면 당연한 듯했지만 굉장히 이질적인 것이었기에, 나는 그 말을 꺼낸 신관에게 다급히 질문했다.

"빛의 에테께서 용사를 점지하는 것처럼 마신께서 마왕을 점지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그럼요. 신들께서 직접 점지하는 존재는 항상 용사 혹은 대전사죠. 마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마왕은 마왕, 용사는 용사죠. 왕과 용사가 별개인 것처럼."

지극히 단순한 논리이고 당연한 이야기였고, 그래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을 느껴야 했다.

전생의 기억과 현재의 상황을 토대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 용사와 마왕의 구도라고 여기고 살아왔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이야기랑 다를 바 없었으니까.

심지어 세계수의 신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닌지 그 이야기를 듣는 다른 엘프들도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럼 마왕은 그저 강한 마족에 불과하다는 말씀입니까?"

"맞습니다. 말 그대로 마족의 왕이죠. 마족이라는 종의 특성상 개인의 무력이 용에 필적하기도 하는 존재이긴 하나, 그렇다고 해서 마신의 점지나 축복을 받은 건 아닙니다. 아, 물론 그런 경우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만 무조건 그런 건 아니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용사는 왜 나타나는 것이고 마왕은 왜 인족을 향해 전쟁을 선포하는 겁니까?"

내 질문에 신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정말 의외의 질문을 들었다는 듯 천천히 대답했다.

"그야... 용사는 빛의 에테께서 인족을 긍휼이 여기시기에 그들을 위기에서 구하고자 점지하시는 것이고, 전쟁이란 건... 원래 그런 거잖습니까? 딱히 인족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마왕군이 나아갈 길목에 인족의 국가가 먼저 있었을 뿐이죠."

마치 1+1이 왜 2냐고 물어보는 사람을 본다는 듯 반응하는 신관의 모습에 난 눈이 핑 도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더 놀라운 건 그게 틀린 말이 아니라는 점이다.

맞는 말이다. 전쟁이라는 건 원래 그런 거지. 그 규모가 너무 커서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 굳게 믿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럼 그 긴 전쟁이 정말 단순한 정복 전쟁이라고? 인족과 마족이 존재하는 역사 속에서 수없이 반복된 전쟁들이 전부 다? 그래서 신탁도 '마왕을 몰아내고 인류에 안정을 찾아오리라.' 였던 건가?

세상의 존망이 걸린 사안인 줄 알았던 대전쟁이 사실 단순한 세계대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미간이 일그러지려는 찰나, 신관이 설명을 덧붙여줬다.

"물론 저희도 마왕이 무슨 의도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마족들에게는 기록이 있을 수도 있으나, 교류가 잦은 편이 아니기도 하구요. 하지만 모든 마왕들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건 알죠. 당장 이전 대의 마왕만 하더라도 모든 종족과의 교류를 굉장히 장려했고, 성과도 있었습니다. 비록 감정의 골이 완전히 해우된 채 이루어진 건 아니었지만 말이죠."

흘러간 역사가 그러했듯, 현재 역시 마찬가지다. 신관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그랬다.

어느 시대에서는 뤼비스카의 용사가, 어느 시대에서는 드워프가 섬기는 화염과 모루의 바즈칼의 대전사가, 또 어느 시대에는 세계수의 아이가 대륙의 위협에 맞서고 평화를 되찾았다.

어느 용사는 왕국을 세우고, 어느 용사는 자취를 감추었으며, 어느 용사는 마왕과 함께 평화를 이륙하고, 어느 용사는 마왕을 물리친 뒤 마족을 압박하다가 마족의 용사에게 처단되었다.

"초연하게 모든 것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자는 건 아니지만, 결국 큰 굴레에서 보자면 특별할 것 없는 필멸자의 삶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쩌면 장생종의 관점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무시할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니었기에 난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신관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 역시 모든 것을 아는 현자가 아닌 일개 신관에 불과합니다. 방금의 이야기도 단순히 제가 보아왔던 것들과 경험을 기반으로 떠든 것에 불과하죠. 마침 이것도 기회라 할 수 있으니 이번 기도를 통해 당신이 품고 있는 의문을 세계수께 여쭤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답까지는 아닐지언정 실마리 정도는 안겨 주실 수도 있으니까요."

졸지에 단순한 인사의 목적으로 올리려고 했던 기도에 목적이 생기는 꼴이었지만... 나쁘지 않은 의견이었다.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사욕이 가득한 기도로 괜찮냐는 뻔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기도에는 답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도 함께하는 법이니까. 신관 역시 내 대답에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안쪽으로 손짓 했다.

본격적으로 기도를 준비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내 대답에 주변에 있는 모든 엘프들이 호응하며 응원해주는 건 좀 어색했지만, 일단 나는 신관을 따라 신전에 있는 제단으로 향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결과였으나, 엘프들의 기도라고 해서 뭔가 고난도의 자세를 요구하거나 엄청난 고행을 요구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성직에 몸담고 있는 이들이 축복이나 계시를 받을 때와 맞먹는 수준의 집중력과 마음가짐을 요구할 뿐. 물론 그게 어려운 거지만.

굳이 단순하게 표현하면 전생의 명상과도 같다. 불교의 참선일 수도 있고.

이렇게 말하면 그게 뭐가 어렵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생각을 비우고 잡념을 밀어낸 채 신께서 원하신다면 즉각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집중을 유지하며 끝없이 신경을 쓴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극한까지 집중하여 모든 감각이 사라지고 내면의 상태만 인지하게 되는 지경까지 도달하는 것이 바로 엘프들이 말하는 '기도'는 그게 가장 기본인데,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생사의 기로에서 시간이 느려지게 만드는 것이 더 쉬운 것 같았다.

그렇게 수 차례에 걸쳐 왕을 알현하기 전에 예법을 시험받는 것과 비슷한 과정을 거친 뒤, 스스로도 나름 괜찮다고 여길만큼 자세가 나올 무렵이 되자 자신을 히아스라 소개한 신관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기도를 올려 보죠."

한켠에 장비를 내려 두고 최대한 가벼운 차림을 한 채 무릎 꿇고 앉아 두 손을 모으는 가장 단순한 자세. 태초부터 시작된 기도 방법에서 자잘한 살을 붙이는 일 없이 이어진 엘프들의 기도.

히아스가 안내해 준 제단 앞에 앉아 자세를 취하고 눈을 감자 그가 엘프들의 언어로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로 노래하듯 이어지는 기도문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을 졸리게 만들었지만... 자진해서 기도하겠다고 한 주제에 잘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최대한 정신을 집중했다.

사실 말이 쉬워서 수 차례지, 이미 연습만 네 시간 이상 한 상태였기에 자세를 바로잡는 것만으로도 피곤하고 지치는 일이었다. 기도하는데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하는 것도 꼴이 우스워서 쌩 체력을 써가며 버틴 결과였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기운이 빠져서 혼이 나간' 상태였지만 그와 별개로 집중은 훨씬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감고 있음에도 눈앞이 하얘지는 현상을 겪게 되었다.

동시에 느껴지는 것은 강렬한 눈부심과,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부유감. 다른 건 몰라도 내가 비룡에서 자주 뛰어내린 탓에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럼에도 내가 자세를 풀지 않고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내가 잘났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꼼짝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음, 느낌상 신을 영접하는 게 분명한데 귀신이랑 비교하는 건 좀 심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떠오르는 비유가 딱 그거라서 어쩔 수 없...

[...의 아이야.]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강렬한 충격과 함께 의식이 날아갔다.

"흐어억?!"

나도 모르게 감겨 있던 눈이 번쩍 떠지고 팔다리를 휘저으며 벌떡 일어나 버렸다.

아니, 일어났다고 착각했다. 난 그저 기도하던 자세 그대로 눈을 부릅 뜨며 고개만 치켜든 상태였다.

의식이... 날아갔던 게 맞기는 한 건가? 분명 방금 전까지 모든 게 또렷하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뭐가 뭔지 모르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괘, 괜찮으십니까?"

그런 내 곁으로 황급히 다가온 히아스가 내 안색을 살폈다. 정신을 차려보니 주변엔 그뿐만 아니라 다른 엘프들도 놀란 기색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한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어느 정도까지는 기도를 잘 유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 죄송합니다. 잠깐 집중이 흐트러졌던 것 같습니다."

보는 이가 많아 조금 멋쩍긴 했지만 애써 웃으며 대답하자, 히아스뿐만 아니라 다른 엘프들 모두가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경악했다.

"잠깐이라구요? 이틀이 지났습니다!"

"...예?"

"당신의 몸을 보세요!"

이게 대체 무슨 질 나쁜 농담인가 싶어 고개를 내려보니...

"뿌리...?"

자잘한 나무뿌리가 내 몸에 얽혀 나를 단단히 고정시키고 있었다. 색을 보아하니 세계수의 것이 분명했다. 그제서야 난 내가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자세를 풀지 않고 고개만 치켜든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냥 뿌리 때문에 못 움직인 거다. 지금도 힘을 주고 있지만 조금도 움직일 기미가 안 보였다.

"이거 어떻게 풀어야 하죠?"

곱게 모아 쥔 두 손까지 단단히 고정하고 있는 새하얀 뿌리를 넋 놓고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질문하자, 히아스가 벅찬 표정을 지으며 한참을 더듬거리다가 대답했다.

"당신이 눈을 뜨기 전보다 뿌리가 많이 내려간 상태입니다. 원래는 얼굴까지 올라갔었거든요. 이대로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 같습니다."

어안이 벙벙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몇 분도 아니고 수십초밖에 안 지났다고 여겼는데 이틀이라고? 요정의 나라는 시간이 다르게 흘러간다는 전설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히아스가 말한 대로 뿌리가 빠른 속도로 바닥으로 꺼져간다는 점이었다.

"...혹시 이게 뭔지 아십니까?"

그렇게 두 손이 자유로워진 뒤에야 나는 내 손아귀에 무언가 쥐어져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정말 이틀이 지난 게 맞긴 한 건지 살짝 뻐근한 손을 움직여 손바닥을 확인하자, 거기엔 아주 약한 연분홍빛을 띤 새하얀 씨앗같은 게 놓여져 있었다.

"이건... 세계수의 봉오리에서 떨어지는 씨앗입니다."

"...세계수의 씨앗이요?"

"아, 조금 다릅니다. 이걸 심는다고 세계수가 자라진 않거든요. 보통은 이렇게 형태가 남지도 않습니다. 바닥에 떨어질 무렵엔 마치 꽃가루가 흩날리는 것처럼 사라지니까요."

"그 말씀은..."

가벼운 현기증마저 느껴지는 와중에, 히아스가 세상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확답해주었다.

"세계수께서 직접 쥐어 주신 물건이라는 뜻이죠. 무슨 의도로 그러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옘병.

아무래도 그 의도가 가장 중요한 거 같은데 알 수 없다니, 큰일났네요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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