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65화 (365/412)

신성神聖은 아무나 영접할 수 없다.

단순히 기도를 올리는 과정에서 신의 존재를 어렴풋이 느끼는 것과, 신탁을 받는 것처럼 신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자와 성녀가 특별한 것이고, 그런 그들조차 신성을 온전히 견디는 건 쉽지 않은 일이기에 신탁이 드문 것이다.

내가 경험한 게 바로 그런 부류였다.

체감상 잠깐이라고 여겼던 그 순간의 내용을 말했더니,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던 히아스는 내가 어렴풋이나마 세계수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강한 충격과 함께 의식이 날아간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설명해주었다.

"제대로 듣지 못한 말씀에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을 거라 여기긴 힘들다고 봅니다. 그런 내용이 있었다면 저희를 통해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으셨을 테니까요. 일종의 시험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시험이요?"

"예, 신성과 대면할 준비가 되었는지에 대한 시험. 그렇게 생각하면 당신에게 씨앗을 쥐어주신 이유도 얼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무 능력도 없고 심는다고 나무가 자라는 것도 아니지만 엄연히 신물神物.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점점 신성에 익숙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특정 조건이 맞았을 때 목소리 정도는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게 히아스의 추측이었다.

"이런 일이 종종 있습니까?"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단칼에 확답하는 히아스는 이 상황이 꽤 유쾌한 듯했다. 그건 다른 엘프들도 마찬가지였으나,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었다.

단순히 자신들이 섬기는 신이 행한 일을 직접 목도했다는 것만으로도 즐겁다는데... 인간이었으면 신실하게 섬겨 온 자신들이 아니라 뜬금없이 굴러들어 온 돌에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눈이 뒤집히지 않았을까. 나였으면 조금은 불만스러웠을 거 같은데 말이지.

"어찌 됐든 건강에도 이상이 없고, 당장은 이해할 수 없으나 의문의 실마리도 얻으신 것 같군요. 잘된 일입니다."

뭐, 당사자들이 좋다고 하고 나도 좋았으니 윈윈이었다.

그렇게 히아스의 도움을 받아 다시 장비를 챙기고 신전을 벗어나니 저 멀리서 소식을 전해 듣고 황급히 달려오던 셀레비안이 나를 맞이해주었다.

"자네는 참 여러모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나도 이럴 줄은 몰랐지.

뭔가 할 말이 참 많아 보였음에도 셀레비안은 그저 무탈해서 다행이라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다른 분들이 안 보이시는군요. 먼저 돌아가신겁니까?"

"그렇다네. 여기서 죽치고 있는 것보다 미리 마을로 돌아가 자네와 관련된 이야기를 전달해서 우호적인 분위기를 이끌어내는 편이 나을 거라 여겼거든."

"오..."

실로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악질 엘프 사냥꾼 하나 족치고 그 후원자도 터트리고 세계수에 기도를 올린 뒤 신물까지 받았으니, 이 소식을 들으면 셀레비안의 말마따나 내 방문을 고깝게 여기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대놓고 불쾌감을 내비치지는 못할 것이다.

"아실리에의 가족들이 며칠째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기다리고 있다네. 지금 바로 가도 괜찮겠는가?"

"예, 뭐. 용무는 끝났으니까요. 그런데... 아실리에의 가족들이라구요?"

정말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지만.

난 아실리에에게 그녀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듣지 못했다. 그래서 대충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거나 했을 줄 알았는데 '들'이라고?

더 어이가 없는 건, 그런 내 반응을 본 셀레비안인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의문을 제대로 캐치했다는 점이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야기를 못 들은 모양이군? 양친 모두 정정하고 형제 자매만 넷이라네."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요."

심지어 5남매? 한 집에 자식 둘 있는 것도 진귀한 엘프들 사이에서는 결코 흔히 볼 수 없는 대가족이다.

"으으음, 이거 참 뭐라고 해야 할지."

내가 아실리에의 가족애에 대해 고민하고 당황하는 동안 난감해하면서도 어떻게든 단어를 고르고 고른 셀레비안의 설명에 의하면, 이 미묘한 가족애는 엘프의 종족 특성 중 하나에 가깝다고 한다.

대의를 위해서든, 단순히 흥미본위로 세상을 겪고 싶어서든 부족의 영역을 벗어난 순간부터 그 엘프는 출가외인과 비슷한 취급을 받는다. 인간들처럼 사방팔방 마을과 도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연락을 주고받을 원활한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는 것도 아닌 게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한다.

정령에게 부탁해서 어떻게든 의사를 전달하는 거? 그거 아실리에가 하이 엘프라서 가능한 일이라고 하더라고. 일반 엘프들은 할 수 없는 특권같은 거였다. 아실리에의 집안에서도 하이 엘프는 그녀 혼자라고 하니 말 다 했지.

"그런 환경이다보니 보니 딱히 가족을 싫어하거나 관심이 없는 게 아니어도 연락에 연연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네. 인족의 관점에서보면 좀 묘한 곳에서 어긋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거기엔 장생종이라는 특징도 한몫 한다.

당장 아실리에가 그랬다. 노예가 될 뻔한 위기에서 무사히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에게 연락 한 번을 안한 거니까. 그나마 나랑 같이 지내며 인족의 시간 관념에 익숙해진 그녀였으나, 결국 가족들은 엘프니까 10년, 20년 정도 지나서 연락해도 별 문제없다는 인식이 은연중에 깔려 있었던 모양이다.

별생각 없었던 마을 방문인데 아실리에 없이 그녀의 가족들을 만나게 될 줄이야. 조금 부담되기 시작하는군.

"너무 부담가지지 말게. 평생을 노예로 살 수도 있었는데 자네가 구해 준 것이잖나."

나를 발견한 엘프들이 건네오는 인사에 열심히 화답하는 동안 작게 웃으며 어깨를 두드려 주는 셀레비안과 함께 숲 외곽으로 진입하자 주변의 풍경이 빠른 속도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계수로 향할 때와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살짝 위화감을 느끼기가 무섭게 엘프의 마을로 짐작되는 곳 앞에 도착했다. 좀 당황스러울 정도로 순식간에 끝난 이동에 나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뭔가... 엄청 빨리 온 것 같은데요?"

"맞네. 세계수의 영토에 머물고 있는 정령들은 강력하거든. 세계수의 힘이 작용하는 것도 있고 말이야. 우리가 세계수까지 이동했던 거리의 절반을 방금 넘어왔다는 게 믿겨지나?"

미쳤다 미쳤어. 신비가 없는 세상에서도 내가 아는 게 얼마 없었는데, 신비가 있는 세상은 더 심하군.

그의 설명에 감탄하는 사이 마을에서 다가온 두 엘프가 살짝 경계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셀레비안에게 물었다.

"이 자가 그...?"

"엘드미아 에가, 아실리에의 은인이자 귀 사냥꾼을 사냥한 자라네."

마치 자기 일처럼 기쁘게 말하는 셀레비안과 나를 한 차례 번갈아 본 엘프들이 조금은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예를 취했다.

"반갑습니다 엘드미아 에가. 세계수를 넘어 이곳에 당도한 것을 푸른 넝쿨 부족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세계수의 영토에서 있었던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그에 관해 촌장님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셨지만, 아직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다 끝나지 않아 잠시 양해를 부탁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다짜고짜 반말이 튀어나와도 그러려니 하려고 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정중한 반응이라 살짝 놀랐다. 그래도 대놓고 티를 낼 수는 없었기에 적당히 반응하자 셀레비안이 나서서 이야기를 주도했다.

"그럼 준비가 끝날 때까지 엔데리니아 댁으로 가 있지."

"아르웰 씨가 기뻐하겠군. 그럼 준비를 너무 서두르지는 말라고 언질을 넣어 두겠네.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테니..."

액면가로는 도무지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이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잠깐 주의를 돌려 살펴본 엘프들의 마을은 여러모로 신기했다.

화려하지도, 수수하지도 않은 건물들은 이세계에서 살아오며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양식으로 지어져 있었고 일부는 정말 사람 손으로 지은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신묘하게 생겼다.

자연친화적인 인공 건축물이라고 해야하나? 유독 눈에 밟히는 게 있긴 한데.

마법 혹은 정령의 도움으로 지어진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은 예상보다 금방 해소되었다. 셀레비안과 함께 마을로 들어서며 정확하게 그 유독 신묘한 구조물을 지나치게 된 것이다.

마치 나무 껍질을 벗겨 내고 속알맹이만 그대로 녹여 늘린 것처럼 깔끔한 목재들이 고풍스러운 새장의 창살처럼 얽혀, 은은한 하얀빛을 내고 있는 나무 파편을 감싸고 있는 형태의 구조물은 나로 인해 주변에서 일어난 작은 소란은 신경도 안 쓰일만큼 아름다웠다.

"세계수의 파편을 모셔놓은 작은 신전이라고 보면 된다네. 반드시 엘프들의 마을 중심에 위치해 있지."

정신없이 바라보는 사이 웃음기 띤 목소리로 설명해주는 셀레비안과 5분 정도를 더 걷자, 세계수의 영토에서 겪었던 것처럼 점차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호의와 호기심이었지만 셀레비안의 말대로 묘한 거리감과 적의가 섞인 시선도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 잘못한 게 있을 리는 없었으니, 엘프 사냥꾼에게 시달린 게 많아 아무래도 인족을 곱게 보기 힘든 부류인 것 같았다.

편협한 귀쟁이들 같으니.

나이를 똥구멍으로 먹었음이 분명한 시선의 주인들을 향해 속으로 혀를 차는 사이 도착한 곳은 주변의 다른 민가보다 조금 더 큰 집이었다.

과연 저 집은 자식을 다섯이나 낳은 부부를 위해 부족에서 선물해준 것일까, 아니면 가족이 많으니 자연스럽게 증축하게 된 것일까 고민하게 만드는 집의 정원으로 서스럼없이 걸어 들어간 셀레비안이 입을 열었다.

"아르웰! 안에 있나!"

어떻게든 태연함을 가장하기 위해 잡생각을 하는 사이 셀레비안이 나무 문을 두드리며 아까도 들었던 아르웰이라는 이름을 언급했다. 그러자 집안에서 우당탕 거리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황급히 달려와 벌컥 문을 열었다.

아, 이 사람 아실리에의 아버지가 분명하다. 눈이 완전 닮았다.

딱딱한 인상 속에 아실리에의 살짝 처진 눈매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미중년은 셀레비안의 말대로 정말 밤잠을 자주 설쳤는지 다크서클까지 내려온 상태였다.

처음엔 문을 두드린 셀레비안에게 꽂혔던 시선이 빠르게 움직이며 살짝 뒤에 있던 나에게로 옮겨졌다.

그리고 내 귀걸이를 향해 한 번, 얼굴 한 번. 다시 귀걸이를 한 번 더 본 끝에 성큼성큼 다가온 미중년이 나를 와락 껴안으며 외쳤다.

"장인어른이라 부르게!"

덕분에 나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