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밍스는 무뚝뚝하게 생긴 것과 달리 굉장히 말이 많았다. 딱히 신난 억양은 아니었지만 나와 셀레비안을 옆에 앉혀둔 채 연신 작업 준비를 하면서도 쉬지 않고 떠들 정도로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두서없이 아무 이야기나 막 던지거나 헛소리를 하는 건 아니었다. 나를 봤더니 뭐 대충 케케묵은 과거가 떠올랐다, 어린 나이에 대단하다 등등 개인적인 감상을 굉장히 자연스럽게 정리해서 말할 뿐이다.
그 뒤에 이어진 건 굳이 투구를 선정한 이유였다.
"투구는 중요하지. 아무리 잘난 영웅도 머리통을 근육으로 채울 수는 없는 법이니까. 지금 네게 가장 취약한 부위는 목 위쪽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겠지?"
얼핏 들으면 '목과 몸이 분리되면 죽는다!' 라는 시답잖은 말장난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나는 비등한 상대일 경우 검술에 한해서 어지간한 공격은 다 커버칠 수 있기에 상처가 쉬이 나지 않는다는 걸 말하는 거였다.
실제로 나보다 두어 단계 정도 더 강해서 커버가 안 되면 치명상을 피해 칼침을 맞는 차선책을 선택하고 성공 시킬 정도의 수준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엔벨데 때 했던 것처럼 말이지.
그간 몸에 익혀온 기술과 단련한 육체를 믿고 시도하는 무모한 행동이지만, 죽는 것보단 낫잖아?
하지만 그 방법을 시도할 수 없는 부위가 바로 목과 머리다. 뤼밍스의 말마따나 이건 단련으로 커버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급소 그 자체니까. 마지막에 마족의 검술을 흉내낸 그녀의 공격이 점점 머리로 편중되기 시작한 건, 그러한 빈틈을 직접 체험하게 해주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네 성미는 방어에 치중하는 것과는 맞지 않으니, 투구조차 공격에 도움이 되는 걸로 만들어야겠지."
잘 만든 방어구는 상황에 따라 상대방의 공격을 받아 흘려 빈틈을 만들어 내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그거 믿고 함부로 나대다가는 순식간에 죽기 딱 좋겠지만, 반드시 차선책을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이점을 안겨 준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적당히 튼튼하기만 해도 그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다른 부위의 방어구와 달리 투구는 그저 튼튼한 것만 믿고 공격을 받아낼 수 없다. 뇌진탕 앞에서는 오러고 나발이고 존나 평등한 법이거든. 뤼밍스는 그게 가능한 투구를 만들어 주겠다고 말함으로써 내 기대감을 잔뜩 부풀렸다.
전생의 만화나 영상 매체에서는 주인공의 잘난 얼굴을 보여 줘야 해서 안 쓰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내가 지금까지 겪어 왔고 앞으로도 겪어야 하는 건 빌어먹을 실전과 현실이니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스스로 이렇게까지 투구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음에도 지금껏 투구 없이 지낸 이유는 벌 거 없다. 굳이 방어구에 연연해야만 할 정도로 강한 적을 상대할 일이 적었던 게 가장 컸고, 정작 강적과의 교전은 대부분 준비가 미흡할 때 일어났다는 게 다음 이유였으며, 지금에 이르러서는 검에 바늘에 도끼에 건틀릿 방호벽까지 있다 보니 '공격이 최선의 방어다.' 라는 형태로 버티고 있었던 것뿐이다.
"실력 좋은 녀석들 중에서는 시야가 좁아지고 귀가 막히는 게 싫어서 안 쓰는 경우도 있긴 했지. 뭐, 그런 말을 할 정도의 실력이 되는 녀석들이었지만... 인족 친구는 아직 그 정도는 아니잖아?"
욱 할 것도 없는 정직하고 비겁한 팩트였기에 난 곱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뤼밍스의 손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금속을 두드리고, 불을 키우고, 형태를 잡는 모든 과정이 더없이 자연스럽다. 발쿤 씨의 대장간에 들릴 때마다 보이던 대장장이들보다 훨씬 능숙한 그 모습에 차이가 있다면 도면을 그리지 않는다는 점 정도였다.
"두상이 괜찮네. 이건... 이 정도 크기면 될 거 같고..."
장님이니까 당연했다. 대신이라고 해야 할지, 뤼밍스는 작업하는 중간중간 꾸준히 내 머리 이곳저곳을 만졌다.
그 작업에 내 취향이나 의견은 들어가지 않는다. 나도 굳이 부탁하지 않고, 뤼밍스도 물어보지 않았다.
1300년 넘게 망치를 두드려온 사람이 직접 하는 작업에 내가 뭔 사족을 덧붙이겠어? 외형적인 취향을 곁들이는 것조차 모욕이지. 물론 그녀가 그걸 모욕으로 받아들일 거 같진 않았지만 감히 시도조차 못하겠다.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작업을 보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넋을 놓고 있는 동안에도 뤼밍스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군대의 병사들에게 투구는 당연한 거지만, 모험가 혹은 여행자에겐 여러 단점이 있는 물건이기도 하지. 항상 쓰고 다니자니 시각과 청각에 제약이 생겨 볼 것도 못 보고 들을 것도 못 들을 수 있으니까."
실제로 그런 이유로 투구는 꺼려하면서도 필요하다는 건 알기에 적당히 고리를 만들어 줄에 매달아 허리춤에 차고 다니다가 필요할 때 쓰는 모험가들도 적지 않다. 아예 그러기 편한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물건들도 자주 보인다.
그러한 물건들이 점점 세상에 퍼지고 있다는 것까지는 모르는 듯 했으나, 단점들 만큼은 명확하게 언급하며 뤼밍스가 손을 움직이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모루 위에서 원석에 가까운 형태로 놓여 있던 금속이 점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필요할 때 직접 쓰고 벗는 게 실상 유일한 해결책에 가깝지만 그래서는 '보호한다.' 는 목적을 반밖에 충족시키지 못하고 타협한 것과 다름없잖아? 그게 좀 마음에 안 들어서 머리를 좀 썼지. 그리고 좀 더 휴대하기 편한 형태로 있다가, 머리로 향하는 공격에 반응해서 자체적으로 원래의 형상을 갖추는 방어구를 만들었어."
...방금 뭔가 엄청 많은 것을 건너뛴 이야기를 들은 거 같은데? 만들었다고? '만들려고 했어.' 가 아니라?
나도 최근 아카데미에서 마법 책 좀 읽으며 스승님과 세네란에게 속성으로 교육을 받아 알게 된 내용이지만, 방금 뤼밍스가 말한 게 가능하려면 방어구에 자아가 있거나 주인의 사념에 반응할 수 있는 마법식이 내장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거기엔 참으로 많은 문제가 있다.
우선 전자의 경우 살아 있는 생명체인 주인을 향한 위협의 정도를 정확하게 구분 지어 변형을 결정할 수 있는 자아를 지닌 인공 혼이 필요하다는 것이 일차적인 문제였고, 이차적인 문제로는 그 정도 인공 혼을 담으려면 아무리 소형화를 시켜도 풀 플레이트 메일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점이 있었다. 당연히 그쯤 되면 이미 투구를 쓰고 벗는 게 문제가 아니게 된다.
마법식을 내장하는 후자의 방법? 이 역시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으나, 한번 형태를 바꾸면 안에 새겨진 마법식까지 같이 틀어져서 재활용이 불가능하다는 가장 심각하고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뤼밍스는 지금 그 모든 문제점을 개선하고 보완해서 완성된 결과물을 얻어냈다고 말한 것이다.
"지금 아티팩트를 완성했다는 말씀이십니까?"
"당연히 마법이 들어가긴 했지."
뭔가... 의미가 어긋나버렸지만 뤼밍스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 주먹 세 개는 합쳐 놓은 것 같은 크기였던 금속이 점점 작아졌다.
"편법을 쓰는 것도 감안하며 방법을 강구했었지만 쉽진 않더라고. 드워프들에게 물어봐도 그 치들은 워낙 자신들의 철학이 확고해서 편법을 용인하지 않아 별로 유익하진 않았어. 뭐, 자질구레한 거 다 떠나서 간단하게 결론만 말해주자면 답은 귀걸이와 문신에 있었지."
"과도한 비약이라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굳이 이해할 필요가 있을까? 성능만 확실하면 되는 거지. 안 그래?"
아니야? 라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뤼밍스는 명백하게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기에, 난 떨떠름한 기분 속에서 잠깐 고민한 끝에 대답했다.
"그거야... 그렇죠."
하긴 1350년 경력의 장인이 말한다고 내가 이해나 하겠나. 그런 마음으로 한 대답이었는데...
"좋아, 동의했으니 잠깐 실례."
느닷없이 뤼밍스의 오른손이 현란하게 움직이며 정체불명의 마법을 발동시키더니 냅다 내 목을 움켜쥐었다.
"크악?!"
그 손아귀의 힘이 억세서 아프거나 그런 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내 목에 손을 가져다 댔을 뿐인데... 피부가 살짝 익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바늘로 찌르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정체불명의 고통이 내 목을 휘감아 절로 짧은 비명이 튀어나왔다.
"살짝 따끔했지? 그래도 이런 건 순식간에 해야 덜 아픈 법이라서 실례 좀 했어. 이빨 뽑는 것도 그렇잖아?"
씨발. 역시 수천 년을 살아온 자답게 어디 한 두 군데 정도 정상이 아닌 게 분명했다. 이게 살짝 따끔이라고? 억지로 뗄 필요도 없이 멀어지는 손을 피해 내 목을 만져 봤지만 무언가가 달라진 것 같지는 않았다.
"제기랄, 말이라도 해 줘야죠. 뭡니까 대체?"
"방금 말했잖아. 해답은 귀걸이랑 문신에 있었다고."
여전히 혼자 따로 노는 것처럼 움직이는 뤼밍스의 왼손에는 점점 작아지다못해 쌀알만한 크기까지 줄어든 금속이 들려 있었다. 처음엔 분명 검은색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군청색으로 빛나는 금속은 얼핏 보면 보석처럼 보였다.
"각인 마법과 주술을 변형해 만든 문신이 형태와 경계를 잡게 만들었고, 귀걸이에는 계약식 혈마법과 마법식을 주입해 귀를 뚫는 것만으로도 착용자와 연동이 가능하게 만들었지. 마지막으로 문신과 귀걸이가 연동되면? 귀걸이에 보석처럼 붙어 있던 금속은 마법식이 내장되어 있지 않아도 얼마든지 주인의 반응에 따라 형태를 갖출 수 있게 되는 거야."
"귀걸...악?!"
작은 고리 형태의 은빛 귀걸이 끝자락에 군청색 쌀알을 박아넣은 뤼밍스가 성큼성큼 다시 다가오더니 이번엔 대뜸 아실리에의 귀걸이가 있는 내 오른쪽 귀에 새로운 귀걸이를 찔러넣었다.
반응하고 저항할 틈조차 없는 완벽한 기습이었다. 괜히 주둥이를 열어 의문을 표하려고 했다가 그녀에게 정확한 위치만 알려 준 꼴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 어처구니없을 뿐이다.
너무나도 빠르게 진행되는 이야기에 마음속에서부터 그게 뭔데 씹덕아라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정말 억지로 꾸역꾸역 참는 사이, 대충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손거울 하나를 들어 내게 던져 준 뤼밍스가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설명을 마쳤다.
"어디 가서 자랑해도 좋아. 세상에 단 하나뿐인 투구를 지니게 되었으니까."
그녀의 실력과 설명과 상황을 놓고 보면 정말 엄청난 특혜를 받은 게 분명했지만 난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미치겠네."
투구의 대가로 목에 예정에도 없던 절취선이 그려졌는데 어떻게 기뻐하냐고.
실상은 무슨 켈틱 문양 비슷하게 생긴 문신이 둘러진 거였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거라고는 절취선 뿐이었다. 하지만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인지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뤼밍스는 그런 내 반응에는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탁자 위에 있던 작은 손망치를 냅다 내 머리를 향해 집어던졌다. 투척술에도 조예가 있는 것인지 손망치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날아들었다.
그게 뜬금없이 시작된 공격이 아니라 성능을 증명하기 위한 테스트라는 것 정도는 눈치챘기에, 나는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그냥 가만히 있었다.
-텅!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망치에 얻어맞고 이마에서 피를 흘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눈 한 번 깜빡이기도 전에 귀걸이에서부터 퍼져나온 금속이 내 머리를 감싸며 망치를 튕겨 내자 뤼밍스는 만족스러움을 넘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 개 쩌는 성능이었지만, 자꾸만 목의 절취선이 생각나서 이번에도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