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감각이었다.
질량보존의 법칙을 무시하는 것처럼 아무런 무게감도 느껴지지 않던 귀걸이에서 튀어나온 금속이 쇳물처럼 빠르게 흐르며 형태를 갖춘다. 대체 어떤 구조로 이루어진 것인지 알 수 없는 마법을 통해 가죽으로 된 턱 끈이, 머리를 푹신하게 감싸는 안감이, 눈앞을 가로막는 바이저와 면갑이 만들어진다.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춘 투구는 코까지 완전히 가리되, 가로로 길게 눈구멍이 난 형태를 취하고 있는 듯했다. 투구의 두께 때문에 시야각이 확실히 줄어든 게 느껴졌지만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많이 보였다.
이내 승모근을 누르는 묵직한 감각까지 더해지고 나서야 뤼밍스의 작품은 변형을 멈췄다. 뭔가 싶어서 만져 보니 목을 보호하는 갑옷도 함께 만들어져 있었다.
이곳에 온 뒤로는 직접 보고 겪으면서도 믿을 수 없는 일 투성이로군.
갑작스럽게 나타난 투구에 순간 빨래집게로 뒷목을 잡힌 고양이처럼 뻣뻣하게 굳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사이 내게 다가온 뤼밍스가 이리저리 투구를 만지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얼굴을 보호할 필요가 없을 때라도 목 정도는 보호하도록 다운 바이저 형식을 참고 했어. 쓰다보면 알겠지만 이음매를 가죽 끈으로 지탱하는 구조가 아니야. 최근 들어 비약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드워프들의 기계공학을 참고했거든. 철판들 하나하나가 체인 메일처럼 엮여 지탱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바이저의 위치도 확실하게 고정시킬 수 있지. 여기, 바이저를 연 상태에서 이 아래턱 부근을 꾹 누르면 고정이 되고..."
어지간히 만족했는지 연신 설명을 쏟아 냈지만 내가 알아들 수 있는 건 얼마 없었다.
바이저는 아래로 내리고 그 상태로 고정해서 목 전면 보호대로 쓸 수 있다, 면갑은 목 보호대와 연결되어있다, 투구의 구조는 내 건틀릿과 비슷한 형태로 디자인했기에 고개를 돌리고 움직이는데에 불편함이 없을 것이다 등등의 기초적인 설명을 알아듣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어찌어찌 기본적인 사용법을 숙지한 나는 뒤늦게 거울을 들어내 모습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스파르타 투구를 얻게 될 거라 생각했는데 아이언맨 헬멧을 받게 된 수준의 격차라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감탄 뿐이었다.
"...굉장히 멋지군요."
"기능성을 추구하면서도 심미성을 잃지 않으려고 항상 노력하고 있지."
아, 뭐, 그래. 물론 외형도 나름 멋들어지긴 했지만 지금의 감탄사는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내 귀걸이에 달려 있던 작은 쇳덩이였다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투구와 목 보호대의 존재에 놀라는 것만으로도 바빠서 사실 미적인 부분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뤼밍스가 던진 망치를 아무런 반동없이 막아 낸 것부터 가볍기 그지없는 무게, 그리고 투구를 착용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유연한 가동 영역.
방금 전까지 날 우울하게 만들었던 절취선은 사실 아주 사소한 단점에 불과한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게 될 정도로 뛰어난 물건이었다.
"투구의 무게는 목 보호대를 통해 어느 정도 분산되도록 만들어서 느껴지는 피로감도 적을 거야. 물론 그만큼 어깨는 좀 피곤해지겠지만, 그 정도는 네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겠지."
"안 그래도 엄청 놀라는 중입니다. 무게감이 거의 안 느껴지는데, 어느 정도의 충격까지 버틸 수 있는 거죠?"
"네가 그대로 오우거랑 박치기 한다 해도 오우거 머리가 먼저 깨질 정도? 머리가 좀 울리긴 하겠지만 반동도 그리 심하진 않을 거야."
왜 반동이 적은지에 대한 설명이 또 이어졌지만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기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러면서 일단 뤼밍스가 말한 대로 바이저를 아래로 내리자 남자의 심금을 울리는 절그럭 소리와 함께 거대한 안면 보호대처럼 자리 잡았다.
"그런데 이거 문신하고는 무슨 연관인 겁니까?"
"금속이 벗어나면 안 되는 좌표를 지정해주는 거지. 그거 없으면 형태도 제대로 유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 들러붙어서 갑옷이 되려고 한다고 보면 돼. 갑옷보다는 단순한 쇳덩이로 굳어 버리게 된다고 해야 하나?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건 아니지만 긴급할 땐 매우 심각한 애로사항을 야기하겠지."
이번에도 어김없이 디테일한 설명이 이어졌지만 역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나마 주워 들은 거라고는 시간이 흐를수록 문신이 점점 옅어져서 나중엔 발동할 때 희미하게 빛나는 거 외엔 티가 나지 않을 거라는 것뿐이었다.
"너무 눈에 띄면 어떤 구조인지 적이 알아차릴 위험이 있으니까."
실로 지당하고 합당한 말씀 덕분에 난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내가 문신에 딱히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지니고 있는 건 아니지만... 절취선은 너무 관종같아서 견디기 힘들더라고. 그렇게 기본적인 설명이 끝난 뒤 자의적으로 투구를 수납하고 꺼내는 방법을 배우고 나니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떠오르는 시간이 되어 있었다.
그 사이 잠깐 이야기를 나눠본 바, 뤼밍스는 아무래도 내가 마력을 사용한다는 걸 어느 정도 눈치챈 모양이었다. 일단 옆에 있는 셀레비안이 그 사실을 모르는 듯해서 두리뭉실하게 표현했으나 알게 모르게 그런 뉘앙스는 풀풀 풍겼다.
그렇다고 날 경계하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되려 측은하다는 듯 어깨를 두드리며 열심히 발버둥 치라는 기묘한 덕담을 던진 그녀는 헤어지기 전에 뭐 더 물어볼 거 없냐는 매우 쿨한 반응을 보여 주었다.
"뤼밍스 씨 정도면 엘프 사냥꾼 정도는 무리 없이 처리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나도 쿨하게 물어봤다.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럴 수 있지 정도로 여기고 있었지만, 그녀를 상대함과 동시에 산산이 박살 나버린 이상한 현실에 대해서.
엘프 노예가 비싼 건 단순히 심미적인 요인과 수명 때문만이 아니다. 내가 귀 사냥꾼의 물건들을 긁어다 팔아서 굉장히 많은 돈을 챙기다 못해 보석으로 환전까지 해야 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은 정말 만반의 준비를 다 한 상태로 사냥에 돌입한다. 거기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이 합리적인 선 안에서 '상품 가격'에 영향을 준다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엘프를 무력화시키거나 치명적인 피해를 주되 생포할 수 있게끔 고안된 그 마도구들은 정말 종류가 다양했다. 음폭탄부터 시작해서 마나의 응집을 방해하는 요상한 마도구에, 마법으로 제작된 신호탄, 그 옛날 아실리에가 차고 있었던 봉인 족쇄와 비슷한 효과를 일시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쇠그물 등등.
이 정도면 용도 잡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말 다양한 도구들을 동원해 사냥한다는 것을 놈들의 야영지를 털며 알게 되었다. 그랬기에 뤼밍스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 정도면 엘프를 잡는 것도 어느 정도 납득이 된다고 여기고 있었다.
근데 이 천 년 묵은 외길 인생 엘프를 보고 나니 이제는 의문밖에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대놓고 물었더니 뤼밍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셀레비안이 몇 살인 거 같아?"
"...뤼밍스 씨와 평범하게 말을 놓고 대화하니 비슷한 연배인 거 아닙니까?"
"내가 아마...1700년 정도 살았던가? 셀레비안은 이제 500살 언저리일 걸. 맞나?"
"대충 비슷하지."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었던 셀레비안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에 내 표정이 기이하게 바뀌자 그가 부연 설명을 덧붙여줬다.
"하이 엘프는 서로를 동격同格으로 여긴다네."
짧은 설명이었지만 한 방에 이해되는 설명이기도 했다. 뤼밍스가 그 설명을 듣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수의 시험을 통과했다는 건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거니까. 나이 따위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거든. 아무튼, 이 마을이나 다른 마을에도 나만큼 산 엘프는 별로 없어. 각 마을의 촌장들과 세계수의 영토에 머무는 순례자들 정도? 대륙의 엘프를 다 합쳐도 백 명이 안 되지 않을까 싶네."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의 요점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종족의 평균이 아니다. 자신과 비슷한 이들이 있긴 하나, 그들은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다.
"과거 악신들의 위세가 대륙의 반절은 먹고 들어갔을 때엔... 나 정도 산 엘프들을 보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 하지만 그들 대다수는 그 절망의 시대를 끝내기 위해 목숨을 바쳤어. 그만큼 힘든 시기였고, 그러다 보니 살아남으려면 강해져야 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이라며 잠깐 말을 삼킨 뤼밍스가 보이지 않는 눈으로 화로를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라. 악신들은 죽거나 봉인 되었고, 악의 군세는 힘을 잃었으며, 거기에 맞춰 세상을 조율하는 천칭도 움직였다. 너희들은 동의하지 못하겠지만 당시를 살아온 나와 내 또래에게 이 시대는 평화의 시대다. 이렇게 평화로운 시대에 과거만큼 강해지길 강요하고 압박하는 건, 새로운 시대의 아이들에게 평화를 선물하고자 죽음도 마다하지 않았던 이들의 의지에 부합하는 행동이 아니다."
"...그로 인해 엘프들을 사냥하는 이들이 나타나도 말입니까?"
"하하하, 악신의 시대에도 엘프 사냥꾼은 있었어 이 친구야. 오히려 지금 놈들보다 더 했지. 도구에 의존하지 않았으니까."
씨발. 대체 어떤 세상을 살아오신 겁니까...?
도저히 상상도 되지 않는 아득히 머나먼 과거를 회상하면서도 뤼밍스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신들이 정한 균형이라는 게 그렇더라고. 선악의 기준을 떠나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끔 조율하는 무언가가 있나 봐. 그래서 나를 비롯한 그 시대의 사람들은 '우리'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고 보고 최대한 침묵하지. 정말 움직여야만 하는 때가 오면... 뭐, 움직이겠지만."
현 시대의 일은 현재를 살아가는 아이들이 스스로 극복하도록 한다.
적어도 그녀만큼 살아온 엘프들은 그렇게 합의를 본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뒷짐 진 채 아무것도 안 하는 건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니 이래저래 움직이는 것 같긴 하지만, 적어도 엘프 사냥꾼과 관련된 사안은 그 행동반경 안에 들어가지 않는 듯했다.
그로 인해 아실리에가 노예가 될 뻔한 상황에 놓인 것과 다름없음에도 뭔가 따지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무려 2000년에 육박한 삶을 이어온 이들이 뜻을 모아 내린 결정이 그렇다면, 내가 쉽게 이해하거나 추측할 수 없는 이유가 있을 거라는 묘한 확신이 들었다.
"그러니 인족 친구도 많이 고민해 보는 게 좋을 거야. 신들의 추는 절대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법이 없거든."
분명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눈이 이번만큼은 정확하게 나를 바라보는 것만 같은 기분 속에서 우리의 대화를 끝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