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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72화 (372/412)

뭔가 의미심장한 말을 마지막으로 대화를 마친 뒤, 나는 넌지시 기대감을 담아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아, 그럼 이 문신은 언제쯤 사라질까요?"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영구적으로 신체에 새겨지는 것치고는 정말 얼마 안 걸려. 한 5년?"

차라리 몰랐다면 금방 사라질 거라 믿으며 한동안은 행복 회로를 돌렸을 테니 말이다.

굉장하지? 라며 자신감 넘치는 뤼밍스를 앞에 두고, 아무리 그녀가 장님이라 하더라도 인상을 구기며 오열할 수는 없었기에 난 억지 미소와 함께 '그렇군요.' 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앞으로 살면서 장생종의 '금방'을 믿으면 사람이 아니다 개다 씨발.

그렇게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기분의 상승과 하락을 반복하게 만든 뤼밍스의 배웅을 뒤로한 채 셀레비안과 함께 마을로 돌아온 나는 서둘러 귀갓길에 오를 준비에 들어갔다. 우선 아무 데나 똥을 싸질러 놓을 게 뻔해서 마을 밖에 묶어두었던 말에게 줄 만한 풀과 약초들을 얻어다가 녀석에게 던져 준 뒤 방문한 엔데리니아 집안의 사람들은 내가 떠난다는 말에 심히 아쉽다는 반응을 보였다.

"여행의 피로도 다 풀리지 않았을 텐데 좀 더 쉬다가지 그러나."

"예정에 있던 걸음이 아니었던 터라 이래저래 할 일이 많아서요. 아실리에도 걱정하고 있을 테니 서두르려고 합니다."

꼭 나중에 아실리에와 함께 방문하겠다는 말도 잊지 않고 덧붙이자 엔데리니아 가문 사람들이 매우 감격하며 이것저것 챙겨 준 덕에 준비는 순식간에 끝났다.

솔직히 더 있다간 나이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할 것 같아 도망치는 거에 가까웠기에 아주 조금 양심에 찔리긴 했지만 입 다물기로 했다. 이건 나 혼자서 감당하기엔 힘든 문제야.

어쨌든 겨우 하루 머물렀음에도 날 배웅해주는 인원은 꽤 많았다. 덕분에 나는 엔데리니아 집안사람들과 셀레비안 일행 그리고 유독 술자리에서 열심히 먹이고 먹은 엘프 몇 명과 촌장 라베리까지 일일이 인사를 건네고 받은 뒤에야 숲으로 향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셀레비안이 자진해서 내 길잡이 역할을 맡아주었기에 가는 길이 어색하진 않았다. 그렇게 세계수의 영토에 한 번 더 들려 길을 정하는 사이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주는 다른 엘프들에게 일일이 화답하느라 잠깐 지체되는 소소한 사건이 있었지만... 뭐, 도적놈들에게 칼 박아 넣는 것에 비하면 일도 아니지.

"자네에게 이런 질문은 참 부질없을 거 같지만, 정말 혼자 가도 괜찮겠나?"

말하고도 우스웠는지 헛웃음을 터트리는 셀레비안을 마주 보며 나도 웃었다.

"말씀하신 숲 아래로는 겨울이 내리기 시작해서 이동에 제약이 많다고 하셨잖습니까. 굳이 그런 수고를 끼칠 필요까진 없죠."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이동 끝에 도착한 곳은 저 멀리 깔끔한 방벽이 보이는, 이곳에 온 뒤로 한 번도 맡아보지 못했던 바다내음이 나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숲이었다. 이에 놀라 고개를 돌려 보니 왼쪽으로 끝을 모르는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이세계에서 처음으로 보게 된 바다는 시리도록 푸르렀고, 해안가를 따라 줄을 잇고 있는 항구의 배들은 참으로 웅장하기 그지없었다. 서부 지대 남단에도 바다는 있다고 들었지만 정황상 저 바다가 의미하는바는 하나뿐이었다.

"동부인 겁니까?"

졸지에 대륙 횡단을 한 번 더 해 버린 내 뻔한 질문에 셀레비안이 성실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네. 제국과 이티스엘 동부 인근이지. 저기 보이는 성벽이 이티스엘의 도시라네."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니 정면 저 끝에 우뚝 선 장벽이 눈에 들어왔다. 주위의 시선이 있을 것을 염두한 것인지 아직 숲속이라 거리감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지만 저 정도면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 도착할 것만 같았다.

"사실 수도와 가까운 건 제국과 이티스엘 사이에 끼어 있는 곳이었지만, 아무래도 통행증같은 걸로 문제가 생길 거 같아서 이곳으로 왔다네."

솔직히 생각도 못 하고 있었던 문제였는데 셀레비안 덕에 번거로움이 줄었다. 서부 대륙에서나 통용되는 켈바스트 변경백의 신원 보증서랑 이티스엘 모험가 패만 덜렁 들고 있는 인간이 뜬금없이 엉뚱한 나라의 도시에 나타나면 밀입국으로 오해 받기 딱 좋았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나를 배려해 주는 그에게 웃으며 악수를 건네자, 그 역시 웃는 얼굴로 화답했다.

"아실리에에게 안부 전해주게."

"덕분에 쉽게 돌아왔습니다. 다음엔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인사드리겠습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셀레비안은 짧은 손 인사를 마지막으로 그대로 숲속으로 사라졌다. 어차피 '금방' 볼 수 있으니 미련을 가지지 않는 건지 그냥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깔끔한 작별이었다.

"그럼... 이제 여기가 어딘지부터 구체적으로 알아볼 시간이로군."

미래의 장인 장모님께서 챙겨 준 덕에 두둑한 배낭과 도끼가 안장에 잘 묶인 것을 확인하며, 나는 도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분명 여기도 추운 건 매한가지였으나, 북부 언저리보다는 훨씬 포근한 탓에 내 어깨와 안장에 살짝 맺혀 있던 살얼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바닷바람을 맞는데도 이 정도라니 새삼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숲을 다 벗어날 때까지 마주치는 사람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엘프들이 기도비닉을 유지하기 위해 적절한 웨이포인트를 찍어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흔하디흔한 몬스터 한 마리 마주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숲을 벗어나자마자 보이는 광경은 살짝 어색하기까지 했다.

"항구가 있는 도시니까 큰 곳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건 좀 심한데?"

도시는 말을 달리면 30분도 안되어서 도착할 정도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숲이 끝나자마자 모습을 드러낸 평원은 좀 휑하긴 했지만, 그와 별개로 도시 인근으로 다가갈수록 잘 닦여진 도로 위에는 다양하게 생겨 먹은 마차와 행인들이 오고 가고 있다.

대충 보면 지극히 평범한 항구도시의 전경이었으나 실상은 조금 달랐다. 도로 위를 오고 가는 이들 대부분이 멀리서도 알 수 있을 만큼 뚜렷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던 탓이다.

"뭔 용병들이 저렇게 많이..."

수많은 깃발, 무장한 병사와 마차, 그 뒤를 따라 이동하는 상인들.

대규모 용병단이 움직일 때 흔히 볼 수 있는 행렬이 항구도시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만델리 항이 마족의 기습에 제대로 털렸었다고 했었지. 그 여파가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건가?"

꽤 오래된 기억인데다가 한동안은 그 근처로 갈 일이 없을 거라 여겨 더더욱 무관심했던 내용이었는데 이렇게 겪게 될 줄이야. 이티스엘 바깥에서부터 용병 행렬이 늘어서고 있으니 최소한 인근 국가와의 불화로 전쟁 준비에 들어간 것은 아닐 것이다.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어떤 결론이 나더라도 결국 도시엔 들려야 했기에 무의미한 고민을 떨쳐 내고 박차를 가했다.

바닷바람을 맡았으니 오늘은 장비 정비 좀 빡세게 해야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하염없이 말을 몰자 꽤 빨리 도로 위로 이어진 행렬 끝자락에 설 수 있었다. 요 몇 주간 엘프들과 다니느라 걸어만 다녀서 그런가, 쾌적한 건 좋은데 괜히 어색했다.

다들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인지 느닷없이 말을 달리며 접근한 나에게 잠깐 시선이 쏠렸지만 어디까지나 잠깐에 불과했다. 그나마 일부 용병들이 내 장비와 말을 흥미롭다는 듯 훑어 보다가 시선을 돌리는 게 관심의 전부였다.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다. 숲을 통해 소문보다 빠르게 대륙을 횡단 해 버렸으니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덕분에 나는 정말 오랜만에 주변의 무관심을 만끽하며 점점 줄어드는 행렬을 즐겁게 구경할 수 있었다.

그렇게 대충 십여 분을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을까, 저 앞에서 무리를 지어 움직이던 용병단에서 사람 한 명이 슬금슬금 움직이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 사이에 있던 이들은 그들을 따라다니며 물건을 파는 행상인이었던 것인지 그가 역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아서 척척 길을 비켜 주며 다양하게 인사를 건넨다.

인맥이 좋은 건지 용병단 간부인지는 알 수 없으나 딱히 겉치레는 아닌지 다들 인사를 하고 난 뒤에도 표정이 좋았다. 단순히 자신들의 돈벌이이기에 잘 보인다는 느낌보다는 정말 친하다는 느낌이 강해서 조금 신기했다.

그런 내 시선이 계속 이어지자 용병으로 짐작되는 남자는 조금 거리가 있는데도 손을 흔들며 큰 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쇼 도끼 형씨! 기골이 장대한데 혹시 용병이신가?"

어디 다른 종족과의 혼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남들 두 배는 큰 귀와 동그란 눈을 지닌 남자는 묘하게 초라해 보이는 이목구비와 삐쩍 마른 몸과 달리 꽤 잘 정비된 장비를 차고 있었다. 살갑게 웃는 것 같지만 타고난 인상 때문인지 묘하게 얍삽하고 비열하게 느껴지고, 말투마저 그랬지만 걸음과 행동에서는 대충이라도 배운 예절이 느껴졌다.

한 번 보면 절대 잊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모습이었다. 일부러 저렇게 행동해서 인상을 남기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뇨, 그냥 지나가는 모험가입니다."

그가 성큼성큼 빠르게 다가온 덕에 나까지 목소리를 높일 필요는 없었다. 적당히 고개 숙여 인사하며 대답하니 그가 과장된 동작으로 놀라움을 표하며 말을 이었다.

"세상에 내 이렇게 예절바른 화답을 해주는 형씨는 간만에 보는군. 용병이 아니라는 건 아쉽지만... 모험가가 용병 하지 말라는 법은 없잖나? 이번 토벌에 참가하려는 거 같은데, 이번 기회에 맛보기로 용병 일 좀 같이 해볼 생각 없나?"

"...무슨 토벌 말입니까?"

아무리 이티스엘이 긴 전쟁 탓에 정신이 없다한들 용병단을 끌어다 토벌해야 하는 일이 있다고? 쉬이 상상이 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봤더니 오히려 남자가 더 당황하며 말했다.

그리고 그 대답을 들은 나는 더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자네 어디 대륙 반대편에서 왔나? 당연히 오크 토벌이지!"

씨발 또 오크라고? 그것도 용병단 규모로 움직여야 할 정도로?

나도 모르게 인상이  구겨지려는 찰나 남자가 과장된 몸짓과 함께 설명을 이어 나갔다.

"무려 이티스엘 수도 인근에서 정체불명의 게이트가 발동해 저 머나먼 서부 대초원의 오크들이 대량으로 넘어왔다지 뭔가! 나도 처음엔 무슨 개소린가 했는데 이게 웬걸? 소문을 들어 보니 진짜인 거 같네? 왕실에서 직접 귀족들과 비룡기사까지 동원해서 대대적인 토벌에 나섰다더군! 게이트를 파괴해서 추가 피해는 막았지만 워낙 수가 많아 잔당이 사방팔방 퍼졌다는 모양이야!"

아, 뭐야. 이미 알고 있던 오크들이었군.

심각한 남자의 설명과 달리 난 꽉 막히려던 속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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