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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75화 (375/412)

내가 서부에서부터 대륙 횡단을 하는 동안 이티스엘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르미즈를 떠나 게이트가 존재하는 대도시 밀레안으로 향하는 길은 꽤나 스펙타클했다.

"죽어! 죽어 이 새끼들아!!"

"뀌이익! 주거라 잉간!!"

주로 내가 아니라 주변이 말이다.

적당한 공터에 자리 잡아 불이나 쬐며 쉬고 있었더니 갑자기 나타난 오크와 인간들이 지근거리에서 치고 박는 건 정말 색다른 구경거리였고,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행동하는 두 집단의 개싸움을 그냥 넘기기는 너무 아까워서 평소보다 빠르게 식사 준비를 마친 뒤 먹으면서 구경하는 게 지금의 내 모습이었다.

용병단을 고용하는 식의 대규모 활동이 비단 이르미즈만의 일이 아닌 것인지, 평범한 도시나 조금 규모가 있는 마을 인근에만 가면 어김없이 주변을 수색하는 모험가 내지는 용병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 볼 수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겨우내 게으름에 빠져 살고 있을 사람들이 두 눈에 불을 켜고 새하얀 벌판과 숲을 돌아다니는 모습은 꽤나 볼 만한 구경거리였지만 아무래도 지금 상황보다는 임펙트가 덜했다.

나를 인지하고 견제하며 나타난 인간들과 달리 처음부터 저들에게만 관심이 쏠려 있던 오크들은 꽤 잘 싸우고 있었다.

사실 오크들이 잘 싸운다고 해봤자 지들끼리 안 부딪치고 방해 안 되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놀랍게도 저놈들은 그게 됐다. 살기 위해 배운 것인지 아니면 카쿨라를 따라온 놈들 중에서도 나름 싸움 좀 하는 놈들이었는지까지는 알 수 없으나 참으로 보기 드문 모습이라고 할 만 했다.

그 덕에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어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고 있었더니, 제일 선두에서 싸우던 조금 더 큰 오크 놈이 자기와 맞붙던 전사를 방패 째 거세게 밀쳐 내며 비웃음과 함께 외쳤다.

"뀌이익! 잉간! 야카다!"

저들 입장에서는 참으로 쪽팔린 일이겠지만, 사실이었다.

당당하게 '내거다!' 라고 소리치며 나타난 여섯 명의... 모험가? 용병? 들은 그 호기로운 등장과 달리 열댓 마리의 오크들을 압도하지 못했다.

이르미즈 근처에서 만났던 유사 용사파티와 달리 여 마법사 하나를 제외하고는 전부 남자인 역하렘 파티라는 건 좀 인상 깊었지만 그냥 그뿐이었다. 심지어 마법사는 볼품없는 야구공만한 화염구나 깔짝 깔짝 던져대며 견제를 날리는 게 고작이었다.

마도서관에서 쫓겨난 반푼이도 저거 보다는... 아닌가? 저게 일반적인건가? 조금 더 생각해 보니 렐리에는 무려 별호까지 있는 유망주였고, 메르델라는 제대로 마법을 쓰는 꼬라지를 못 봤으니 내게는 저 마법사의 실력을 유추할 만한 비교군이 전혀 없었...

"아. 아니지. 애들도 저거보단 나은데?"

아카데미 학생들. 저 여자보다 8살은 더 어렸을 애들도 저런 조야한 수준은 아니었다. 근데 또 따지고 보면 걔들은 나름 엘리트니까...

"이 씨발! 좀 도와라!"

사내놈들의 실력은 이미 평가가 끝나서 마법사를 평가하기 위해 상념에 빠진 나를 건드린 건 방금 오크에게 밀쳐난 방패 든 떡대였다. 그들보다 살짝 언덕에 위치한 내 쪽을 바라보며 신경질을 부리는 그 모습에, 그들의 일행이 내 뒤쪽에 기척을 숨기고 있는 건가 싶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오크들을 속이기 위한 페이크에 불과했던 건가 싶어서 다시 돌아보니 한 번 더 오크의 일격을 힘겹게 막아 낸 놈이 다시 외쳤다.

"너 말이야 너! 여유롭게 뭔가 처먹고 있는 놈아!"

"...나?"

마침 조금씩 끓기 시작한 스튜를 약간 떠서 간을 보다가 어이가 없어서 손이 멈춰버렸다. 아니 갑자기? 요즘 유행하는 농담 같은 건가?

하지만 놈은 한없이 진심같았다. 이번엔 놈이 아니라 뒤에서 불타는 야구공이나 던지던 마법사가 이어서 외쳤다.

"그래 씨발! 안 도울 거면 꺼져!"

"뭐래 미친년이? 여긴 내가 먼저 와 있었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처음 뛰쳐나올 때 지들꺼라고 외치면서 날 견제했던 걸 뻔히 기억하는데 저딴 반응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원래 미친놈들은 상대하는 게 아니었기에 스튜 간이나 마저 보려는 찰나, 그들의 반응을 보고 뒤늦게 날 발견한 오크들이 기겁 했다.

"대, 대족장의 도끼가 왜 여기에 있다?!"

음, 조금 싱겁지만 나쁘지 않네.

나는 스스로의 요리 실력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뒤 얼이 빠져 있는 오크들에게 대답해줬다.

"느그 족장 하늘의 대초원 갔다."

방금 전까지 오크에게 일방적으로 처맞던 걸 방패의 힘으로 겨우 버티던 전사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싸움이 났는데 스튜나 퍼먹던 미친놈이 지금 뭐라고 한 거야? 하늘의 대초원? 그게 어딘데?

혹시나 싶어 고개를 돌려봤지만 그런 반응을 보인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일행들도 하나같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오크들은 달랐다. 그들은 신나게 싸우다 말고 경악하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았으면 전사 일행들이 여유롭게 인상이나 쓰고 있을 시간따위 없었을 것이다.

태연한 건 오직 스튜 퍼먹고 있는 저 미친놈뿐이었다. 놈은 오크와 자신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기는커녕 코나 찡그리며 마치 날파리를 내쫓듯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뭘 봐? 난 너희들의 좆밥 대전엔 아무런 관심도 없으니 마저 싸우세요들."

"뀌, 뀌익?"

전사는 깨달았다. 뭐가 뭔지 알 수는 없어도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는 걸. 그는 자신에게 시선을 둘 생각조차 못 하고 있는 오크의 심장을 향해 냅다 검을 찔러 넣으며 외쳤다.

"지금이야! 죽여!"

"뀌, 뀌이익! 비거판 잉간! 더러운 잉간들! 뀌이이악!"

다행히 동료들도 그의 외침에 빠르게 반응하며 기습에 성공했다. 방금까지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던 상황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무너진 오크들 중 일부가 기어이 등을 돌리고 도망치자, 지금까지는 일행이 휘말릴까봐 제대로 마법을 쓰지 못했던 여 마법사가 큼직한 화염구를 만들어 던졌다.

"허, 이젠 피구공이네."

스튜 퍼 먹는 미친놈이 뭐라 중얼거렸지만 지금은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전사는 등에 불이 붙은 채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구르는 오크에게 달려들어 확실하게 숨통을 끊은 다음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안도감 뒤에 찾아온 건 짜증과 분노였다. 정확히는 저 스튜 먹는 미친놈을 향한 분노.

"이 씨발 미친 새끼야!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어?!"

성큼성큼 다가가며 소리치는데도 미친놈은 여전히 여유롭게 스튜나 불어 마실 뿐이었다. 심지어 시선조차 주지 않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당연하지. 처음 들이닥치자마자 나 견제하면서 니들거라고 외쳤던 거 기억 안 나?"

"그렇다고 같은 인간이 당하고 있는데 방관해? 우리가 뒈지면 그다음은 너라는 계산이 안 나와?!"

푸흡! 어디에서 웃을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갑자기 미친놈이 스튜를 뿜으며 웃었다.

"켁, 켁! 아주 지랄을 하세요. 식사 방해하지 말고 가라. 예로부터 식사 중엔 개도 안 건드린다고 했다."

마치 같잖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한 반응에 전사의 관자놀이에 위치한 혈관이 불거졌다. 이 새끼가 우리를 비웃어?

마음같아서는 당장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아직은 알아낼 게 있었기에 인내심을 발휘했다.

"...후, 그래. 다 좋다 이거야. 저거 뭐냐? 하늘의 대초원은 뭐고?"

아직 오크의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으로 미친놈의 옆에 있는 큼직한 양손 도끼를 겨누며 물었다.

오크들은 분명 저 도끼를 알아보고 엄청 겁먹고 당황하는 반응을 보였다. 대족장의 도끼라고 했던가? 오크 놈들에게 뭔가 상징적인 물건인 거 같은데, 저거만 보여줘도 방금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면 이번 오크 토벌에 엄청 유용할 것이 분명했다.

"니가 관심 가지면 뒈지는 물건과, 방금 니가 오크들을 보내준 곳."

하지만 미친놈은 딱히 협조적으로 나오지 않았다. 전사의 동료들이 그의 뒤를 따라 언덕을 올라왔음에도 놈은 여전히 스튜나 먹을 뿐이었다.

어쩌면 정말 제대로 미친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전사는 칼끝을 놈에게로 옮겼다.

"암만 그래도 목숨보다 귀할까?"

스튜 건더기를 우물우물 씹어먹는 놈의 시선이 검으로 향한다. 하지만 겁먹거나 긴장한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저 아주 약간 미간을 찡그리며 불쾌감을 나타낼 뿐.

"검 치워라. 스튜에 피 떨어진다."

"개소리 집어 치우고. 저거 내놔. 그럼 이번 건은 봐주지."

뒤에서 동료들이 검을 고쳐 쥐고, 마법사가 주문을 영창해 화염구를 만드는걸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미친놈은 여전히 불쾌하다는 듯 검 끝만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내가 간만에 고향 돌아와서 기분이 좋아. 식사하다 말고 피 보는 취미도 없고. 근데 니 검 끝에 맺힌 저 돼지 새끼들 피가 내 스튜에 들어가는 그 순간 날 협박한 것까지 계산해서 넌 무조건 죽어. 세 번 말 안 한다. 스튜에 피 떨어지기 전에 검 치워라."

"하, 미친 새끼. 그렇게 스튜가 중요하냐?"

역시 미친놈은 이해할 수 없는 법이었다. 남자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그대로 검을 스튜에 찔러넣었다.

"그렇게 중요하면 그냥 대충 처먹..."

"이 씹새가."

다음 순간 남자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미친놈이 갑자기 흐릿해지더니, 자신이 하늘을 날았다.

의지와는 별개로 빙글빙글 도는 시야의 끝자락에 숲이 들어오고, 방금 자신이 서 있던 곳과 미친놈이 들어왔다.

분명 스튜 그릇과 숟가락을 쥐고 있던 놈은 어느새 옆에 놓여 있던 도끼를 쥐고 있었다.

"..,는 엘드...아 에가라... 한..."

깔끔했던 도끼날이 붉은 선혈로 물들어 있다는 걸 눈치챘을 땐, 전사는 이미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제멋대로 언덕을 굴러내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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