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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76화 (376/412)

문명인들은 예의 없는 말을 해도 대가리가 쪼개지지 않기에 야만인보다 더 무례하다고 했던가.

그 말을 역으로 뒤집으면, 예의 없는 말과 행동을 서스럼없이 쏟아 내는 이들은 문명화된 사회의 일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리 가정하면 이티스엘은 굉장히 문명화된 국가이며, 이들은 그 혜택을 너무나도 온전히 받고 자랐기에 눈에 뵈는 게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침 목적지인 대도시 밀레안 인근인 만큼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 이 근처의 오크는 거의 다 씨가 마른 거네?"

"예, 예. 그렇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경쟁이라고 할까. 그게 좀 심해졌죠. 지금은 오크들 값이 좀 나가거든요."

사실 싸움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도끼에 명치를 처맞고 날아간 전사놈의 시체가 언덕을 다 굴러 내려가기도 전에 마법을 쏘려는 마법사년에게 오크 선지국이 되어 버린 스튜를 냄비 째 던져서 주문이 아닌 비명이 튀어나오게 만들고, 그대로 도끼를 던져 전사의 뒤를 따라가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나머지 것들은 전의를 상실했으니까.

정확히는 두 명이 나를 알고 있어서 이야기가 빠르게 진행됐다.

용병 하나와 모험가 하나. 전자는 오크 게이트 사건에 관련된 이야기를 푸른 올빼미 용병단을 통해 귀동냥으로 들었고, 후자는 수도에 자자한 내 악명을 알고 있는 쪽이었다.

겨우 두 놈이 대가리를 박는다고 해서 나머지도 동의할 거라 생각하진 않았는데, 다행히 내가 움직인 걸 제대로 좇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빠르게 무기를 던져 버렸다.

덕분에 지금은 놈들의 식량과 수통을 뺏어 냄비를 닦고 스튜를 다시 끓이며 이런저런 정황을 듣는 중이었다.

놈들은 인근 도시에 머물다가 잠깐 파티를 맺고 돈벌이에 나선 것에 불과했다고 한다. 어차피 오크들도 거의 다 사라져가고 있으니 여섯이 뭉쳐 다니면 할 만할 거라는 계산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빠르게 사태를 안정화시키기 위해 왕실뿐만 아니라 상인 길드에서도 돈을 풀었다는데, 그러다 보니 실력도 어중간한 것들이 득달같이 달려드는 사태도 같이 일어나버린 듯하다.

"그거 말고는 조용하다는 소리군."

"그...렇죠?"

"정말로?"

"...어..."

뭐라도 하나 더 나올 이야기가 없을까 싶어서 찔러보자 살아남은 네 놈의 눈동자가 필사적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이미 살려주겠다고 말했음에도 마치 정보를 더 짜내지 못하면 죽을 것처럼 노력하는 놈들을 보며 다시 끓인 스튜를 맛보고 있었더니, 남의 여자 잘 후리고 다닐 것처럼 생긴 구릿빛 피부의 금발 용병이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다급히 말했다.

"만델라 항 인근에서 마족들과 관련된 소문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요즘 들어 유독 소문이 늘었어요!"

"...만델라 항? 거기 피해 본 건 벌써 몇 개월 전 아닌가?"

"마, 맞습니다! 그래서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죠! 몇 주 전까지는 잠잠했었거든요!"

"새끼... 합격."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쥐어짜니 뭔가 나오긴 하는군.

그 이상의 디테일한 내용을 들을 수 없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스러웠기에, 시체가 되어 버린 전사와 마법사에게서 쓸만한 물건을 회수한 뒤 적정 수준의 정보료를 제공해주고는 놈들을 떠나보냈다.

마족들이 바다를 건너 온 것인지 아니면 또 어딘가에 게이트를 세운 것인지를 두고 잠깐 고민에 빠졌지만, 그런다고 결론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기에 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움직이는데에 집중하기로 했다. 어차피 정말 마족과 관련된 일이라면 정보를 구할 방법은 많으니 지금은 빨리 집으로 돌아갈 때였다.

애먼 놈들 때문에 시간을 좀 빼앗기긴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해가 질 무렵 문이 닫히기 전에 밀레안에 도착한 나는 지극히 평범한 모험가 취급을 받으며 도시에 입성할 수 있었다. 비록 게이트를 이용하려면 아침 9시부터 오후 4시까지라는 은행같은 영업 시간이 존재했기에 바로 날아갈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적반하장의 화신과도 같던 전사와 마법사의 유품이 생각보다 돈이 됐기에, 무사히 귀환하고 있음을 자축하는 의미로 욕탕이 있는 고급 여관에 방을 잡은 나는 푸짐하고 완성도 높은 저녁 식사와 따뜻한 벽난로의 온기를 만끽하며 잠들었다.

과연 비싼 여관답게 잠자리는 무척이나 쾌적했다.

개운하게 아침을 맞이하고 일어나 여관에 딸린 식당에서 제대로 된 식사까지 마치고 나니 드디어 이 여정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진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다 끝났다고.

플래그를 세워 사건 사고에 엮인다던가 할 껀덕지조차 없다. 오늘 게이트만 타면 바로 수도에 도착하니까. 끽 해봤자 게이트 이용 전과 후에 간단한 소지품 및 신체 검사 정도가 있을 뿐이다.

"진짜 돌아가고 나면 며칠은 꼼짝도 안 하고 잠만 자야지."

짐을 챙기고 장비를 점검한 뒤 여관을 벗어나는 발걸음은 더할 나위없이 가벼웠다. 시간에 맞추기 위해 티 타임까지 가진 다음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게이트로 향하니, 아침부터 게이트를 이용하기 위해 미리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었다.

그들이 대부분 모험가라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귀족들은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움직이는 게 드물고, 게이트를 아무렇지도 않게 이용할 정도로 잘나가는 상인들은 줄을 설 것도 없이 그냥 통과였으니까. 수도에서도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서 있는 사람들은 실력과 돈이 있는 적급 이상의 모험가들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거기까지는 이상할 게 없었지만, 겨울에 저렇게 많은 모험가들이 게이트에 모여 있다는 건 좀 많이 이상했다. 도시에 모험가가 포화 상태라서 일이 없는 게 아닌 이상 어떻게든 비상 인력으로 잡아두려고 할 텐데 말이지.

심지어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묘하게 소란스러운 것이, 그다지 좋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여러분. 제발 부탁드립니다. 앞장서서 수색에 나서달라고도 하지 않아요. 금전적인 지원도 드릴 테니 그냥 머물기만 해주세요."

의아함을 가득 품고 줄 맨 뒤에 섰을 때 들려온 건 누군가의 하소연이었다. 이에 슬쩍 앞을 보니 참으로 추워 보이는 민둥머리 남성이 게이트 줄 맨 앞에 서서 모험가들을 향해 무언가를 간절히 호소하고 있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잖습니까 길드장. 우리 실력으로는 마족을 상대할 수 없다니까. 있어 봤자 개죽음인데 돈이 중요하겠어? 우리도 부탁할 테니 그냥 보내주쇼."

하지만 간절한 건 그의 이야기를 들은 모험가들도 비슷했다.

줄을 서고 있는 이들 대부분은 내 예상과 달리 표정에 여유가 없었다. 마침 둘의 대화가 한창 진행 중일 때 도착해 상황을 파악한 나는, 이들이 실력과 돈에 여유가 있는 모험가들이 아니라 없는 돈을 긁어 모아 다른 도시로 넘어가려는 모험가들이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되었다.

오묘한 분위기였다. 길드장이 앞을 막고 있다고는 하지만 강제성이 있는 게 아니었으니 그냥 지나쳐도 될 법한데, 원래 이 도시에서 활동하던 이들인 것인지 그렇게까지 매정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없다. 오히려 일부 모험가들의 표정에서는 두려움과 죄책감이 공존하고 있었다.

"길드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결코 여러분들에게 무리한 일을 강요하지 않는다니까요."

"어차피 실력에 자신 있는 분들이 남아 있잖습니까."

"물론 그런 분들도 있지만 어디 겨울에 마족만 나타나겠습니까? 여러분들도 무리 없이 해결해주실 수 있는 의뢰가 많이 발생하는 거 뻔히 아시잖습니까. 그런 와중에 마족의 위협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이렇게 움직이시면 일손이..."

흠, 여러모로 보기 드문 광경이다. 모험가와 길드장이 서로에게 애걸복걸하는 상황이라는 게 그리 흔한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게이트를 이용할 사람은 오라고 경비가 말하고 있음에도 줄이 줄어들지 않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안 갈 거면 먼저 지나갑니다."

나는 이렇게 붙잡혀 있을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

대놓고 줄 옆으로 빠져나와 앞으로 나아감에도 딱히 나를 막거나 제지하는 이들은 없었다. 이십여 명의 모험가들은 아무래도 이 도시에서 오랜 시간 동안 활동한 토박이라서 죄책감이 넘치는 모양이었다.

"지나가는 여행잡니다. 실례 좀 하겠습니다."

다행히 길드장이라는 남자도 나를 붙잡지는 않았다. 애초에 얼굴조차 모르니 모험가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듯했다. 덕분에 줄을 설 필요조차 없었으니 감사를 표하고 싶었지만 진짜 그랬다간 눈치 없는 쌍놈이 될 게 뻔했기에 닥치고 경비병 앞으로 가 몸 수색을 받는 동안 그에게 슬쩍 질문을 던져 보았다.

"이 주변에 마족이 나왔습니까?"

"굳이 따지면 주변도 아니고, 정말 나온 건지도 알 수 없습니다. 만델라 인근에서 마족들의 배를 발견했다는 소문이 퍼졌을 뿐이거든요. 저들은 지레 겁먹고 내륙 반대편으로 가고 싶어 하는 거죠."

"반대편이라고 하면...?"

"말로는... 뭐라더라? 서부 끝자락에... 오그웬? 우그웰? 이라는 도시에 새로운 던전들이 좀 나타났다고 하는 거 같던데, 저야 관심이 없다 보니 잘 모르겠군요."

허, 여기서 오그웬의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이야. 동부까지 소문이 퍼질 정도면 정말 많이 그리고 빠르게 변하고 있나 보다. 알려 줘서 고맙다는 의미로 동화 몇 개 찔러 주니 안 그래도 나쁘지 않던 경비병의 태도가 더더욱 좋아졌다.

"저 친구들 마음도 이해하지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그리 곱게 보이지 않는 게 사실이죠. 지금까지 길드장이 준 혜택이 얼마인데 조금 무섭다고 저러고 있으니 쯧쯧..."

"뭐,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모험가니까요."

"하하, 활동 영역이 다르잖습니까. 패를 보아하니 수도에서 활동하시는 것 같던데 이 먼 동부까진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오크... 놈들 때문에 원치 않은 고생을 좀 했죠."

신분 확인을 마친 그가 던진 질문에 솔직하게 말해봤자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적당히 웃으며 둘러대자 경비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허어, 갑자기 나타난 그 짐승들 때문에 여러 사람이 피를 보는군요. 아무튼, 이상없습니다. 요금도 문제없이 수령 했으니 안으로 이동하시면 됩니다."

여기까지 레스롬 공작이 손을 써서 괜히 시끄러워지는 게 아닐까 걱정했는데 기우에 불과했다. 난 친절한 경비에게 작별 인사를 건넨 뒤 마법사가 활성화 시켜준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여기까지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아무 문제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꺼림칙했다.

지금까지 게이트를 타서 좋은 꼴을 본 경우보다 개판 난 경우가 많아서 그런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가볍던 발걸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그러자 게이트 앞에 서 있던 남자 마법사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게이트를 처음 이용하시나보군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눈 질끈 감고 두 세 걸음만 걸어 나가면 다른 도시에 도착해 있을 테니까요."

껄껄껄.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어서 고맙다고 말한 뒤 그의 조언대로 눈을 감고 발을 내디뎠다. 잠깐 사이 게이트의 마력 때문에 솜털이 서는 것이 느껴졌지만 마족들의 게이트를 넘을 때와 같은 이질감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침내!"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앞에는 정겹기 그지없는 이티스엘의 수도가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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