옌 티에는 고요함 속에서 깨어났다.
창밖의 도시는 아직 푸르스름한 어둠이 드리워진 상태였으나 그녀는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어둠 속에서 옷을 갈아입고 집안의 불들을 하나씩 켜기 시작했다. 아궁이와 1층 벽난로에 불을 지피고, 아직 어두운 거실을 밝히기 위해 등에 마석을 넣은 뒤 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 속에서 조용히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엘드미아의 허락을 받아 가정부로 일하게 된 그날 이후, 정작 의뢰주라 할 수 있는 엘드미아를 볼 수 없는 상황에 놓이고 말았지만 그녀는 단 하루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그렇게 매일 청소하고 음식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엘드미아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들을 모으며 지내는 것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엘드미아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돌아가거나, 그가 자리에 없기에 의무를 다 할 이유가 없다고 할 법도 했지만 티에는 그러지 않았다.
정황상 오크들이 사용한 게이트를 타고 서부로 날아간 건 분명했으니, 엘드미아는 살아서 돌아올 것이다. 그건 꿈을 섬기는 자 특유의 감이었다. 비록 아실리에에게 직접적으로 언급해 안심을 줄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재료 손질부터 시작해 부드러운 음식들 위주로 아침 상을 준비한 티에는 떠오르는 아침 해를 느끼며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라이카를 안고 잠들어 있는 아실리에를 깨우기 위해 목소리를 냈다.
"아실리에 님. 아침입니다."
그리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았음에도 아실리에의 귀가 반응하여 움찔거렸다. 엘드미아가 봤으면 대놓고 놀랐을 만한 광경이었지만 티에는 그게 그리 단순한 상황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실리에는 그저 잠을 깊게 못 자고 있을 뿐이었다. 엘드미아가 사라진 그날 이후로 말이다.
"...좋은 아침."
"예,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엘드미아 님이 도착하실지도 모르겠군요."
그저 아실리에의 기운을 차리게 해주기 위한 빈말 같은 게 아니라 실제로 엊그제 귀족원 소속의 사람이 와서 전해준 이야기였다. 이르미즈에서 게이트가 위치한 밀레안으로 향했다고 하니 정보 전달 속도를 비롯한 이것저것을 고려했을 때 오늘 내일이면 충분히 도착하고도 남았다.
그걸 알기에 아실리에도 평소보다 조금은 더 힘 있는 반응을 보이며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라이카는 살짝 눈을 떠서 주변을 둘러보는 반응만 보이고는 다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나마 처음 몇 주는 움직여서 창밖을 보기도 하던 라이카였지만 이젠 그마저도 힘에 부치는지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일이 많아졌다. 아실리에는 그런 라이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뒤 티에와 함께 식당으로 내려와 그녀가 차려놓은 음식들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아무리 무사할 것이라고 믿는다한들 불안함이라는 건 피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목숨만 붙어 있고 어디 한 두 군데 크게 다쳤을 수도 있으니까. 그럼에도 아실리에가 그나마 정상적인 활동과 심리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건 멀쩡히 돌아온 엘드미아가 자신의 피폐해진 모습을 보고 힘들어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그런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아실리에의 얼굴에는 나날이 피로가 쌓여만 갔다. 그리고 그런 아실리에의 불안감을 해소할 만한 정보를 모으는 것이 최근 티에가 집중적으로 해온 일이었다.
"켈바스트에서 왕실로 서신이 왔다는 소문이 흐르고 있더군요. 마법사들의 공간 도약 마법까지 써가며 급하게 도착했다고 하니 분명 오크와 관련된 사안을 다룬 내용이겠지요. 오롯이 오크와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는 걸 봐서는 엘드미아 님은 아무런 문제없이 켈바스트를 통과하신 것 같습니다."
"왕실 내부의 이야기까지 들을 수 있는 거야?"
"이건 왕실에서 일부러 흘린 소식일 겁니다. 왕실과 군사력의 무능이 아닌, 켈바스트 측에서조차 서둘러 연락을 할 정도로 심각한 사고였다라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목적이겠지요. 정보를 넘겨준 지크멜 씨의 말에 의하면 사실 서신은 훨씬 빠르게 도착했을 것이고 이야기도 꽤 진행되었을 거라 하더군요."
티에가 자체적으로 알아 본 내용들도 있지만, 귀족이나 왕실과 관련된 정보들은 대부분 정보상 지크멜에게서 나왔다. 딱히 이쪽에서 먼저 부탁하거나 비용을 제공한 것도 아닌데 지크멜은 엘드미아가 자취를 감추었다는 소식과 함께 아실리에가 돌아온 뒤로 닷새에 한 번씩은 새로운 이야기를 들고 와서 티에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그것이 나중에 엘드미아가 돌아왔을 때 호의를 사기 위한 계산적인 행동인지, 지인으로서의 배려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매우 유용한 건 사실이었기에 거절하지 않고 도움을 받았다.
어차피 판단은 엘드미아가 알아서 할 테니까.
"추가적으로 교단의 도움으로 듣게 된 이야기입니다만, 엘드미아 님은 서부에서도 큼지막한 사건을 일으키신 것 같습니다. 백작의 영지 하나와 싸움을 걸었다는 기묘한 소문이 서부 왕국 지대에 돌고 있다고 하더군요."
"...또?"
"...네, 또. 영지가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일부는 마왕 엘드미아 라는 식으로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이야기였다. 대체 어느 개인이 백작을 상대로 싸움을 걸었다는 이야기에 '또' 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 두 사람 다 거기까지 생각은 미쳤지만 결국 그 대상이 엘드미아라는 점에 충분히 가능하다는 감상이 들어서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웃고 말았다.
"마왕이라니, 엘디가 들으면 어이없어 하겠네."
마왕군 사이에서 원수를 찾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이에게 마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줄이야. 아이러니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에 아실리에는 한 달 만에 진심으로 웃어 버렸고, 그 반응을 본 티에는 조금 무리를 해서 교단의 도움을 받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누가 뭐라해도 아실리에는 엘드미아의 가장 큰 역린 중 하나다. 그녀의 상태를 좋게 유지하기 위한 노력은 어떤 형태로든 그녀와 교단에 이롭게 작용할 게 분명했다. 오랜만에 웃음이 함께 하는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뒷정리를 마친 뒤 각자 할 일을 위해 움직였다.
그리 대단한 건 아니었다. 티에는 어김없이 정보를 얻기 위해 발품을 팔고자 밖으로 향했고, 아실리에는 오늘 들은 이야기를 라그니스와 공유하기 위해 외출을 준비에 들어갔다.
오랜만에 얼굴을 본 게 전장이고, 심지어 딱 한 번 보자마자 또다시 실종된 탓에 라그니스는 적잖이 실망했었다. 그래도 뭔가 묘하게 익숙해진 것인지 믿음이 생긴 것인지 걱정보다는 무모하게 움직였다며 화를 내는 게 주된 반응이었지만... 거기에 아쉬움이 가득했다는 걸 아실리에는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왕실의 사람들을 통해 이미 대략적인 이야기를 전달받았을 수 있지, 티에가 알려 준 정보를 핑계 삼아 오늘은 먼저 가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마음 고생시키는 건 별개인지라 잠깐이라도 같이 푸념할 친구가 필요하기도 했고.
그렇게 판단을 마친 아실리에는 겸사겸사 모험가 길드에도 얼굴을 비출 겸 한동안 놓고 있던 장비들도 함께 챙겼다.
그때였다. 갑자기 라이카가 벌떡 일어나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라이카?"
"멍!"
말이 통하지는 않아도 한 달간 정적 속에서 지내온 라이카가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깜짝 놀란 아실리에가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라이카는 그대로 방을 뛰어 나갔다.
그리고 어깨에 둘러메려던 활조차 내팽개치며 아실리에도 뒤늦게 뛰었다.
벅찬 가슴을 안고 방문을 뛰쳐나간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짧은 다리 때문에 계단을 뛰어 내려가지 못해 뒷걸음질로 한 칸씩 엉거주춤 내려가고 있는 라이카의 모습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기습적인 광경에 순간 웃음이 터져 버렸지만, 라이카를 안아 들고 뛰어내려갈 정도로 마음이 여유롭지 못했던 아실리에는 재빠르게 그 옆을 지나쳤다.
"미안해 라이카!"
"끼잉...!"
투다닥 계단을 내려가는 아실리에를 원망 섞인 눈동자로 바라보던 라이카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큰 결심을 했다.
그리고 몸을 옆으로 돌리더니 데굴데굴 굴러 내려갔다. 살짝 어지러웠지만, 별로 아프지도 않고 속도는 빨랐기에 라이카는 굉장히 만족했다.
누군가 봤으면 감탄을 금치 못했을 진풍경이었지만 유일한 목격자일 수 있었던 아실리에는 뒤에서 들려오는 우당탕 소리에도 개의치 않고 거의 뛰어 내려가듯이 1층으로 내려와 벌컥 문을 열었다. 그러자 한동안 집에서만 있느라 제대로 느껴보지 못한 찬 공기가 바람과 함께 확 와 닿았다. 착각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실리에는 그 바람 속에서 세계수의 향기를 맡았다.
그리운 느낌이 확 솟구쳤지만 그 역시 지금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마당에 이제 막 들어선 엘드미아의 놀란 모습이 착각이나 환상이 아니라는 게 중요했으니까.
엘드미아는 정말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것 외엔 상당히 신수가 훤했다. 한 달 가까이 밖을 돌아다닌 사람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깔끔할 뿐만 아니라 한 손에는 대체 어디서 구한 것인지 알 수 없는 큼직한 양손 도끼까지 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걸어 준 귀걸이 옆에 처음 보는 귀걸이까지 끼고 있었다. 엘드미아에게 장신구로 스스로를 꾸미는 취미가 있진 않았으니 어디선가 구한 마도구일 게 분명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작정하고 모험을 다녀왔다고 여길 모습이었다. 제대로 된 준비도 못하고 사라졌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고 있던 아실리에 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지만...
"...다녀왔습니다?"
멋쩍게 웃으며 엘드미아가 내뱉은 한 마디에, 아실리에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