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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79화 (379/412)

아실리에와 티에가 점심부터 나를 먹이기 위해 준비하고 저녁에 추가로 더 쌓은 음식은 상당히 많은 양이었지만 대식가들이 다섯이나 되다보니 정말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그래, 다섯. 나와 예카트리나, 셰릴과 아실리에에 이어 라그니스마저 대식가의 반열에 들어서고 만 것이다!

"후, 훈련이 힘들어서 그래."

내 마지막 기억의 라그니스는 스튜 한 그릇에 배부르다고 손을 놓던 소식가였는데 지금 그녀가 먹어 치운 스튜만 두 그릇이다. 거기에 찍어 먹은 바게트처럼 큼직한 빵도 두 개였는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지금은 우아하게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여 닭고기를 분해하는 중이었다.

우리의 경악스러운 시선에 괜히 얼굴을 붉히며 변명하는 라그니스를 바라보던 셰릴이 예법따위 신경 쓰지 않은 채 예카트리나처럼 닭다리를 뜯어먹으며 중얼거렸다.

"이대로 몇 년만 지나면 라드넬반데스 경처럼 거구의 배틀 메이지가 되는 거 아니야...?"

"스승님은 타고 난 거거든?"

정말 그럴까? 대체 무슨 훈련을 하는지 몰라도 라그니스의 육체는 겉으로 보기에도 극적인 변화를 맞이한 상태다. 체형이 막 거대해진 건 아니지만 기사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어깨가 떡 벌어지고 팔뚝도 과거와 비교하면 두 배 가까이 두꺼워졌다고 할 수 있다.

저 정도면 연예인들이 PT를 받아 단기간에 몸을 완성하는 수준조차 넘어섰다. 당장 제국 아카데미에서의 라그니스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지금의 저 모습을 보면 깜짝 놀랄 걸?

건강해져서 나쁠 건 없었기에 아무래도 좋았지만 나는 여러모로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너 마법에 재능 있는 거 아니었어? 어째 갈수록 전사가 되어가냐."

"...내 입으로 말하는 것도 좀 웃기지만, 마법만 배우면 시간이 남으니 창술도 배우는 거야."

시간이 남아? 그야말로 재능충이 할 법한 소리로군.

문제는 그게 자기만의 생각이 아니라 라드넬반데스 경의 판단이 함께한 결과라서 허언이 아니라는 점이지. 아니나 다를까 마법사인 세네란과 렐리에가 가장 큰 흥미를 보이며 그녀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별을 봤냐, 무슨 색으로 빛냈냐 하는 전형적인 마법사들의 이야기가 이어진 터라 지금의 나는 들어도 뭔 소린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었기에 내 주의는 자연스럽게 다른 쪽으로 흘러 갔다.

"그러고보니 왕실에서 네 공을 치하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다고 하더구나. 이젠 한 번 정도 공식적인 행사가 있어야 다른 말이 나오지 않을 것 같다면서 말이지."

마침 스승님이 자연스럽게 화두를 던지셨다. 사실 세네란을 제외하면 스승님과의 직접적인 접점을 지닌 이가 끽 해봤자 셰릴인데, 쟤랑 스승님이랑 할 이야기가 있을 리 없다보니 방금 전까지는 조용히 식사만 하고 있다가 처음으로 꺼낸 이야기였다.

대충 '저렇게나 도움을 줬는데 왕실이 공적으로 고맙다는 말을 안 하네? 사이가 안 좋나? 내가 먼저 접근해볼까?' 라는 마인드로 날 귀찮게 할 수 있는 움직임들이 증가하는 추세라고 하니, 이번엔 긍정적으로 검토하기로 했다. 어차피 대악마 목을 딴 걸 들킨 이후로 한 번은 호응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렇게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더니 옆에서 셰릴이 슬쩍 끼어들어왔다.

"제국에서도 슬슬 네 공적을 치하하고 싶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중이라고 하던데. 어쩌면 제국과 왕실의 우호 관계를 드러낼 겸 공동으로 이뤄질지도?"

"음. 제국에서 먼저 타진해 온 내용이라고 이야기가 들려오긴 하더군. 왕실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알고 있다."

보통... 그런 이야기가 이렇게 쉽게 들려올 내용인가...? 새삼 여기 모인 사람들이 평범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실감하며 나는 불현듯 떠오른 의문 하나를 입에 담았다.

"그게 공동으로 이루어지면 누가 상을 수여하는 거죠?"

"황제가 직접 올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제국에서는 네 도움을 받은 제 1 황녀가 수여할 것이고... 우리는 확실히 모르겠군. 왕께서 직접 하실 거 같은데."

"가장 유력한 차기 황제 후보인 제 1 황녀가 오는데 아직 계승권 확립도 불확실한 왕자나 왕녀가 나서는 건 여러모로 안 좋게 보일 수 있으니까."

서로의 의견에 고개를 주억거리는 두 사람 덕에 생각 정리가 참으로 편해졌다. 높은 확률로 에스뮈에가 올 수 있다는 이야기로군. 순간 이런 이야기에 가장 흥미가 동할 것 같은 지크멜을 바라봤더니 나와 눈을 마주친 녀석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덕분에 녀석에게 눈으로 '남들에게 정보 안 팝니다. 관심 없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된 내가 작게 웃고 있었더니 아까 전에 비해 확연히 줄어든 목소리로 예카트리나가 말을 걸어왔다.

"엘드미아, 혹시 이번에 뭐 따로 계획 같은 거 있어?'

"계획이요?"

"뭐, 의뢰를 받거나, 쉬거나 혹은 혼자 여행을 가거나?"

"아... 아뇨. 오히려 아무 계획도 없는 게 계획인 상태입니다."

오는 길에 마족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있는 게 신경 쓰이긴 한데... 어차피 그런 뜬 소문은 경과를 지켜보고 확실해진 다음 움직여도 늦지 않다. 오히려 지금은 제대로 휴식을 취하고 뤼밍스에게 받은 투구와 카쿨라의 도끼에 좀 더 익숙해지고 내 마력 기관을 좀 더 다듬기 위해 스승님과 세네란의 가르침을 듣는 게 우선이었다.

원래는 좀 더 서둘러 움직일 생각도 있었지만, 이번에 받은 세계수의 씨앗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에 시간적으로 여유를 가져 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세계수의 씨앗과 에파가 님께서 성녀님을 통해 전달하셨던 말씀이 연관있는 것 같거든.

당시 에파가 님은 분명 '견고한 길을 통해 대면할 날이 올 것' 이라고 말씀을 전달하셨었다. 난 지금까지 그 말씀이 성녀의 재방문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는데, 지니고 있으면 꾸준히 신성력에 노출되어 차츰 익숙해질 수 있는 신물이라는 걸 손에 넣고나니 생각이 좀 많이 바뀌었다.

카쿨라와 함께 서부로 날아간 건 나에게 있어 우연에 불과했지만... 신들의 관점에서 거기까지는 예측이 가능한 무언가가 있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때 말씀하셨던 '견고한 길'이라는 건 내가 세계수의 씨앗에 익숙해져 에파가 님의 부름에 응답하고 대화가 가능해지는 순간을 의미한 게 아닐까, 라고.

그렇게 따지면 내가 우연이라 생각하고 재수가 없다고 생각했던 모든 행적이 결국 운명이라고 칭해지는 고정된 미래였을 뿐인 거 아닌가? 라는 회의적인 결론으로 치닫는 느낌도 있지만...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약 진짜로 운명이라는 게 존재했다면 굳이 가호 끝에 몰아칠 혼돈은 에파가 님 스스로도 헤아릴 수 없다고 언급하지 않았겠지.

그분께 무슨 의도가 있는지 아직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신의 눈으로 볼 때 그 정도는 충분히 예측이 가능한 미래였고, 이를 통해 내가 제멋대로 사지死地를 향해 기어가는 것을 막고자 했을 뿐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내게 2회차 인생을 준 신이 그걸 바란다면, 잠깐 정도 기다릴 이유로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다음 주에 길드 의뢰 하나 받지 않을래? 길드장이 부탁하던데."

내가 쉴 예정이라는 이야기에 화색을 띠며 예카트리나가 말한 내용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다. 오크들과 엮이기 전에 적급 좀 많이 갈아 놓은 게 미안해서 적당히 도와주겠다고 말했던 걸 길드장이 까먹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굳이 예카트리나를 통해서 내게 의뢰를?

"아, 정확히는 '가엔달 파티'에 부탁한 거지. 그거 때문에 다음 주엔 긴 씨도, 가엔달 씨도 다시 복귀할 거야."

다행히 예카트리나가 빠르게 덧붙인 부연 설명 덕분에 오해를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대신 다른 의문이 샘솟았다.

"어지간한 의뢰는 여러분만으로도 어려움 없이 끝낼 수 있지 않나요?"

굳이 나를? 도와달라면 못 도와줄 것도 없었지만 대체 무슨 의뢰이길래 그러는지 궁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옆에서 빵을 찢어 먹던 렐리에가 이어서 설명했다.

"전문가를 모시고 싶은 거죠. 만델라 항 인근에 갑자기 마족 목격담이 늘어났거든요. 진짜 마족일 가능성이 꽤 높은 거 같은데, 우리 중에서 마족이랑 싸워 본 경험이 가장 많은 게 에가 씨잖아요?"

방금 유예를 두고 봐도 늦지 않다고 했던 사안이 코앞에 다가올 줄은 몰랐는데. 순간 세네란의 눈이 왕방울만하게 커졌지만 나도 무지성으로 수락할 생각은 없었다.

"거긴 수도 관할 구역이 아니잖습니까? 설마 또 지원요청인 건가요?"

"거기까진 모르겠어.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해서 그냥 대충 넘어갔거든. 가서 물어보면 대답해주지 않을까?"

"안 돼!"

챙챙! 식탁을 두드리는 게 아니라 자신이 식사하는데 쓰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깔끔하게 핥은 뒤 머리 위로 부딪치는 정체불명의 방법으로 시선을 끌어모은 세네란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왜 그녀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하지는 않았다. 너무나도 뻔했으니까.

"무려 한 달이야! 한 달! 이거 계약 위반이야!"

실로 맞는 말이라 나는 반박할 수 없는 외침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머리 위로 물음표를 만들어냈다.

사실 나도 겨우 가능성 하나만 보고 또 동부 언저리까지 가는 건 굉장히 시간 낭비라고 여기고 있다. 그래도 부탁하는 사람이 예카트리나와 렐리에라서 살짝 고민하는 중이었는데, 세네란은 그런 내 고민을 다르게 받아들였는지 쌍심지를 키며 단호하게 외쳤다.

"정 돕고 싶으면 차라리 내가 가서 도와줄게! 엘드미아는 남아서 위드라 씨와 함께 연구를 도와!"

일방적인 강요가 튀어 나와도 할 말이 없을 거라 여겼는데,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건 의외로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아니, 오히려 좋은 제안이었다.

굳이 따지면 그녀는 '진짜' 마족 전문가에 가까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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