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라고 해서 모든 이름이 세상에 단 하나뿐이거나 그런 건 없다.
세상 어딘가에는 정말 엘드미아도 있고, 에가도 있고, 엘드미아 에가도 있을 수 있다는 소리다. 그래서 방금 나한테 턱주가리가 박살 난 놈이 당당하게 엘드미아 에가라고 외쳐도 제재할 수 없는 것이고, 설령 그게 정말 나를 지칭하는 거라 한들 장난이라고 한 마디 던지면 넘어갈 수밖에 없는 게 길드의 입장일 것이다.
당장 내가 벌인 짓을 아는 놈들만 해도 저렇게 구석으로 피신해 있는데 길드라고 이럴 줄 모르고 안 막겠어? 막아도 막아도 지랄인 거지. 관리하는 자의 서러움을 모르지 않기에 그 정도는 이해한다.
그래서 길드의 물건들이 박살 나지 않게 조심히 때렸다. 별로 어렵진 않았다. 한 방에 턱만 깨버리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세 놈을 패고 나니 게시판 앞에 몰려 있던 놈들이 알아서 짭드미아를 상납했기에 일은 굉장히 빠르게 해결됐다.
"미리 말해 두는데, 서부에서 내 흉내 낸 놈은 경비대가 보는 앞에서 대가리가 쪼개졌다. 너희가 오늘 살아 있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내 흉내를 내는 개짓거리를 직접 보지는 못했기 때문이라는 걸 잊지 마라."
시늉만해도 턱이 깨질 수 있다는 사실도 같이.
이미 제대로 대답도 할 수 없었던 놈들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길드를 벗어났고, 그 뒤를 라이카의 눈치만 보던 개들이 황급히 쫓아 도망치는 광경을 보며 난 익숙한 얼굴에게 고개를 돌렸다.
"또 보는군. 이번엔 나쁘지 않은 형태라는 게 다르지만 말이야."
거하게 얻어맞았는지 꼴이 말이 아닌 녀석은 내 말에 그저 웃어 보였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녀석인지 뭔지 몰라도 짭드미아 처분에 도움이 된 건 사실이었기에 주머니에서 금화 하나 꺼내 녀석의 손에 직접 쥐여주었다.
"제대로 치료 받아라."
의도가 어떻든 간에 짭드미아에게 싸움을 걸면 이득이 생길 수도 있다는 인식을 위한 것이기도 했기에 딱히 아깝진 않았다. 물론 서부에서 의도치 않게 돈벌이가 쏠쏠했던 것도 한몫했지만 말이다. 금화를 보고 깜짝 놀란 녀석에게 적당히 손을 흔들어 준 뒤 접수원들에게 다가가자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과 처음 보는 얼굴들이 섞여 있었다. 덕분에 그 시선이 조금 멋쩍었지만, 일단은 마무리를 위해 방문 목적을 전달했다.
"라비엘 개척 마을 경호 의뢰 지원에서 돌아온 엘드미아 에가입니다. 경과 보고를 하려고 합니다."
한 달 정도 늦었지만 보고는 보고니까.
◈
내 말을 듣고 묘한 표정을 짓는 뉴페이스들과 달리 기존에 있던 접수원들의 행동은 빨랐다. 마치 미리 준비라도 된 것처럼 즉각 안내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간 나는 길드장 엔그림과 모험가 가룬의 환대를 받으며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이전에 봤을 때보다 많이 비어 있는 초콜릿 통에서 초콜릿을 하나 꺼내 먹는 동안 이것저것 챙겨 탁자에 내려놓은 엔그림은 상투적이면서도 진심이 담긴 감사의 인사와 함께 이야기를 꺼냈다.
"이미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사건인 만큼, 대략적인 이야기는 왕실과 전부 나누고 상황을 파악한 상태입니다. 덕분에 엘드미아 님의 공이 아주 컸다는 것 역시 알고 있죠."
겸손을 떨면 오히려 기만이 되어 버릴 상황이었기에 이번만큼은 그냥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세간에서는 내가 게이트를 닫아버려서 도망갈 길을 잃어버린 오크들이 지금까지 난리를 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매우 배은망덕한 의견을 내놓는 부류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장담컨데, 그 게이트 너머 대초원을 넘어 켈바스트에 도착하기까지 내가 베어 죽이고 본 오크 촌락의 수는 여기 넘어 온 놈들보다 많으면 많았지 결코 적지 않았다. 비룡 기사까지 동원했는데도 전선을 쉬이 밀지 못했던 당시 상황이 며칠만 유지되었으면 이티스엘은 마치 2만 대의 전차가 터졌더니 2만 5천대를 더 찍어내버린 소련군처럼 증식하는 오크들을 맞이하게 됐을 지도 모른다.
설령 그 게이트를 여는 게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더라도 카쿨라가 주술사니 주술적인 방법으로 열었을 게 분명한데, 주술이라는 건 결국 관련된 이들이 많이 죽으면 죽을수록 사용할 수 있는 영혼도 늘어나는 능력이다. 오크들이 많이 죽으면 또 '일시적으로' 열 수 있었을 거라는 소리다. 그야말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오크 물량 공세로 피가 마르는 나날이 이어졌겠지.
그러한 내 의견과 유사한 주장을 피력하며 불만의 목소리를 모조리 묵살해 버린 게 레스롬 공작과 메시나 왕녀였다고 한다. 다른 의미로 영 내키지 않은 두 사람에게 도움을 받은 격이었다.
"그러다 보니 저희가 듣고자하는 건 사건보다는 이후 엘드미아 님이 귀환하는 과정에서 겪은 대초원에 관한 것입니다."
기가 막힌 우연의 일치였다 하더라도 따지고 보면 한낱 짐승과 비슷한 취급을 받고 있었던 몬스터인 오크가 무려 게이트를 이용해 대공습을 시도한 꼴이었다. 게이트가 있었던 토굴에서 마족들의 것으로 짐작되는 시체가 발견되었다고 하니 이번에도 마족이 개입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카쿨라가 그걸 재활용할 정도의 능력이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아예 가능성도 없다고 여겼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으니 이제는 같은 일이 재발할 가능성을 두고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엔그림이 내게 듣고 싶은 건 그와 관련된 개인적인 소견도 포함되어 있었다.
"카쿨라 같은 개체가 흔한 것인지 알고 싶은 거군요."
"맞습니다. 이티스엘에도 오크가 없는 건 아니지만... 대초원의 오크들과는 많이 다르죠."
어느 정도 지능이 있는 몬스터들은 저들만의 생태가 오랜 시간 동안 유지되면 나름의 문명을 갖춘다.
그 과정에서 인간들 사이에 천재가 태어나듯 몬스터 사이에서도 천재라 할 수 있는 변이종이 발생하면 놈들의 발전이 더 앞당겨지는 경우도 왕왕 있다. 실제로 역사서에는 직접 어설프게나마 무기와 방어구를 주조하는 고블린 부락이 생긴 기록도 있다.
그러면서도 인간들을 향한 적의는 한결같으니, 인간들 입장에서는 꾸준하게 몬스터들을 박멸하고 무너뜨려 그들이 문명을 쌓아 번거로운 적이 되는 것을 막아야만 한다. 동물들처럼 멸종이라도 시킬 수 있으면 좋겠지만 던전의 생성처럼 몬스터들도 그 뿌리가 어디서 시작되는지 알 수 없으면서 씨가 마를 날이 없으니 그저 꾸준히 방역을 이어 나가는 것만이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
그리고 이티스엘은 그런 방역을 열심히 한 국가다. 바로 앞에 마족이 있다 보니 갑자기 문제가 터졌는데 몬스터까지 같이 터져 버리면 답이 없어서 건국 초기부터 항상 열심히 모험가를 굴려왔거든.
뭐, 그렇다고 해서 서부 왕국이 게을렀다는 것은 아니다. 그냥 대초원 자체가 인간의 영토가 아니라서 손 놓고 있을 수밖에 없는 거니까. 오히려 켈바스트라는 방벽 도시까지 만들며 인류의 방어선 역할을 한다는 점만큼은 굉장히 성실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카쿨라가 튀어나왔다. 당연히 경계를 할 수밖에 없지. 하지만 그 모든 걸 이해한 뒤에도 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따지면 그 새끼는 놈들의 조상신이 오크들에게 내려 준 용사같은 거라고 여기는 게 맞다.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그간 죽어온 놈들의 조상이 정말 하늘의 대초원이라는 그치들의 발할라에 제대로 안착했다는 전제부터 성립해야 하는데, 주술사라는 영혼 파괴적인 사술을 부리는 놈들이 끼어 있는 오크들의 혼이 제대로 성불이나 할 수 있겠어? 그 새끼들이 믿고 있는 건 죄다 모순 가득한 헛소리인 게 분명하다.
그러니 카쿨라는 조상신의 안배도 아닌, 그저 철저한 우연이 낳은 이레귤러에 불과하다는 게 내 결론이었다. 그러한 의견을 적당히 선을 지키며 제시하자 엔그림과 가룬 둘 다 흥미롭다는 듯 경청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타당한 추측이군요. 이번엔 하필 거기에 마족들이 얽혀 운이 없었다고 보는 게 맞을지도."
"심지어 그 마족들조차 오크들에게 죽어 버렸으니 둘이 협력했다고 보기도 어렵겠지. 그게 아니면 협력했음에도 뒤통수를 맞았다는 거니 앞으로 같은 일은 더더욱 일어나지 않을 거고."
너무 낙관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쓰잘데기 없이 비관적일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디테일한 건 어차피 진짜 전문가들이 알아서 토론하고 결론내줄 테니까. 그 뒤로도 잠깐 동안 셋이서 대화를 나누며 여러 가설을 제시해봤지만 딱히 의견에 변화가 생길만한 변수는 나오지 않았다.
그사이 엔그림의 초콜릿도 줄어들고 그가 따로 내온 차도 세 번 정도 마셔 슬슬 화장실이 마려워질 때쯤 우리는 대화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이만하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이제 보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만, 이건 나중에 왕실에서 제공할 보상과 함께 드리게 될 것 같습니다."
큰 사건을 처리한 영웅에게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야하는 왕실의 입장이라는 게 있어서, 라고 말하며 엔그림은 돈주머니를 하나 건넸다.
"그러니 이건 보수가 아닌, 길드에서 따로 드리는 감사의 표시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번 사건에서 활약하신 걸 듣고 느낀 거지만... 엘드미아 님이 아니었다면 분명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테니까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감사의 표시라고 하기엔 좀 많지 않습니까?"
아닌 게 아니라 기존 의뢰금의 세 배는 더 들어 있었다. 하지만 엔그림은 멋쩍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그건 감사의 표시 뿐만 아니라 사과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자칭 엘드미아들로 인해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을 완전히 막지 못한 것에 대한 사과 말이죠."
흠. 길드에 책임을 물 생각은 전혀 없지만 주는 돈을 굳이 마다할 필요도 없으니 적당히 수긍하며 받자 엔그림이 살짝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저런 이들은 왕실에서 공식적인 보상을 하사함과 동시에 사라질 테니 조금만 참아주시길 바랍니다."
단순히 왕실에서 돈을 준다고 해서 사칭범이 사라지는 일은 없다. 엔그림의 말은 간접적으로 이번 보상에 명예 훈장이나 작위가 엮여 있을 거라고 미리 귀띔해주는 것에 가까웠다.
작위면 오히려 움직이기가 아주 좆같아지니 내 입장에서는 그나마 훈장이 나았는데... 뭐가 올지 모르는 채 기다렸다가 작위를 받으면 매우 매우 귀찮아질 게 뻔하니 뭐라도 알아내려면 결국 만나야 할 사람이 정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찰거머리 왕녀에게 먼저 연락해서 대면할 방법은 없으니, 귀족원에 가야 할 시간이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