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84화 (384/412)

발쿤 씨를 찾아간 뒤로는 무난하게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아쉽게도 그림자 발과 연락이 닿지는 못했다. 하루만 더 일찍 왔었어도 만날 수 있었을 텐데 하필 의뢰 때문에 수도를 떠난 다음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오게 되면 말은 전해주겠다고 했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으니 여러모로 아쉬운 마무리였다.

그 외엔 그냥 식사 때 약속했던 것처럼 따로 사람들을 만나 있었던 이야기를 말하는 게 전부였다.

솔직히 그중 가장 쫄렸던 것은 라그니스였지만 내 행동이 무모하다는 것을 두고 뭐라고 하기보다 그런 상황에 큰 힘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더 신경 쓰는 것 같아 졸지에 위로하는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육체 못지 않게 멘탈도 강화가 된 것인지 안 그래도 빡센 훈련을 더욱 열성적으로 받기 시작했다는 것이 레니사 경에게 전해 듣게 된 근황이었다. 이대로면 정말 리틀 예카트리나가 완성될지도 모를 노릇이다.

셰릴은 그냥 셰릴이었다.

애초에 대악마의 목을 치는 걸 직접 봤기 때문인지 가장 무덤덤하게 반응한 그녀는 내가 아카데미로 출근해 세네란이 남기고 간 학습지와 다를 바 없는 물건들을 읽고 푸는 동안 가끔 모습을 드러내 서부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물어봤다. 이번 방학에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가 궁금했지만... 비단 그녀만 그런 게 아니라 이번엔 기숙사에 남아 자율적으로 공부와 수행을 병행하는 이들이 유독 많다는 스승님의 설명을 들었기에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세네란은 온갖 도구들을 챙겨서 가엔달 파티와 함께 만델라 항으로 떠나는 그 순간까지 내 몸에 있었던 변화에 대해 조사하고, 듣고, 기록했다.

"그렇게 성직자랑 마법사 앞에서는 쓰지 말라고 했는데 하필 용사랑 성녀 앞에서...?"

그 과정에서 예전에 미처 하지 못했던 대악마와의 전투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듣고 경기를 일으킬 뻔 했지만, 어찌저찌 진정시킨 뒤 보낼 수 있었다. 장기 의뢰라서 한 2주는 못 돌아오니 열심히 공부나 하고 있으라는 엄포와 함께.

그렇게 일주일이 흘러 지금은 오롯이 아카데미만 오고 가며 세네란이 남기고 간 맞춤형 학습지를 푸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전생에서 이만큼 공부했으면 월급이 달라졌으려나."

공부를 하면 할수록 마법은 재능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되지만, 마나와 오러가 나뉜 인간들과 달리 마족들은 마력 하나로 퉁치다 보니 응용할 만한 부분이 차고 넘쳤기에 딱히 허탈하진 않았다. 이해하는 데에 큰 무리도 없었고 말이지. 애초에 극소수만이 향유할 수 있는 지식이었다면 세상에 이만큼 마법이 퍼져 있지도 못했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저 문과 감성식 수학이라는 기묘한 비유가 아주 적절해 보이는 학문이기에 재능과 감에 의존하는 게 많이 먹고 들어간다는 단점이 있을 뿐. 미리 정해 놓았던 오전 분량만큼의 공부를 끝낸 나는 길게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 커피를 내린 뒤 슬쩍 무릎 위에 올라오려는 라이카를 안아 들어 쓰다듬었다.

교수동은 조용했다. 자율적으로 남아 공부하는 건 학생들이지 교수들이 아니었으니까. 그나마 방금 전까지는 스승님께서 같이 남아 내 공부를 도와주셨지만, 왕실에 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우신지 벌써 한 시간이 넘었다. 다른 교수실에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한동안 주변에는 커피 끓는 소리와 마석 난로 돌아가는 소리 그리고 바람 소리 정도만 들려왔다.

거기에 새로운 소음이 섞여 들어온 것은 커피가 다 끓을 무렵이었다.

-똑똑.

솔직히 말하면 더럽게 깜짝 놀랐다. 나름 주변 소리에 신경을 쓰고 있었음에도 인기척은커녕 발소리조차 듣지 못했다는 걸 받아들이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릴 정도였다.

오만하고 싶진 않은데, 말이 안 된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바닥은 누가 일부러 작정하고 조심히 걷지 않는 이상 확실한 발소리를 자아냈으니까.

전생의 학교처럼 복도에 창이 나 있거나 문의 절반이 유리로 된 형식이 아니다 보니 밖에 누가 서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점도 영 내키지 않았다. 그런 내 긴장을 읽은 것인지 품에 안겨 있던 라이카가 재빠르게 바닥으로 내려가고 나는 옆에 풀어두었던 검을 좀 더 가깝게 끌어 당긴 뒤 목소리를 내었다.

"들어오세요."

누군지는 일부러 물어보지 않았다.

만에 하나 내가 직접 문을 열어 맞이해야 하는 인물의 이름이라도 언급되면 진위 여부를 떠나 일단 그렇게 해야 하는데, 당장 지금도 인기척이 희미한 문밖의 누군가가 작정하고 나를 기습한다면 괜히 귀찮아질 수 있었다. 차라리 직접 문 열고 들어오게 하는 게 낫지. 다행히 상대방은 간을 볼 생각이 없었는지 내 말을 듣자마자 교수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난 예상치 못한 방문객을 보고 적잖이 놀라야 했다.

"아,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실질적으로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나눠본 적 없는 제국의 성녀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왔으니까. 이름이... 테네아시 라고 했던가?

"그, 이렇게 갑자기 찾아뵙게 되어 죄송하지만...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심지어 다른 용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나를 찾아온 게 맞았다. 혹시 지크프리트도 같이 왔나 싶어서 슬쩍 문 뒤를 보기 위해 고개를 기울였지만 오롯이 테네아시 성녀 혼자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다.

"일단 멈추시죠. 괜히 칼부림 내고 싶지 않으니까."

그것만으로도 문제가 많았기에 난 일단 그녀를 멈춰 세웠다. 내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순간 테네아시 성녀의 얼굴에 당혹감이 일렁였으나, 난 여전히 그녀의 갑작스럽고 조용한 방문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정말 당사자가 맞긴 하나? 당장 마력시로 보기에도 이상한 건 없었지만 세상에 아직 내가 모르는 게 더 많다 보니 확신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저는 용사님도 없이 성녀님 홀로 저를 만나러 온 이 상황 자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분명 제국으로 돌아가셨다고 알고 있고, 재방문하셨다는 이야기조차 없었는데 말이죠. 심지어 완전 무장이로군요. 명확하게 신원을 밝힐 수 있는 게 아니면 거기서 제가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빈말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일부러 소리 나게 검을 움켜쥐자 테네아시가 히익 소리를 내면서 황급히 품에서 무언가를 찾아 꺼내 들었다.

"그, 그, 그 설명을 위한 편지가 있는데, 받, 받아주시겠어요?"

"편지요...?"

테네아시가 꺼내 든 것은 익숙한 하얀 밀랍으로 봉인된 편지였다. 에스뮈에의 편지를 성녀가 들고 왔다고? 점점 알 수 없어지는 와중에 일단 확인할 필요는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옆에 있는 라이카를 불렀다.

"라이카, 저것 좀 받아올래?"

[응!]

쫄래쫄래 라이카가 다가가자 테네아시의 얼굴에 참으로 다양한 감정이 오고 갔다. 하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은 그녀는 조심스럽게 라이카에게 편지를 물려줬고, 나는 녀석이 물어다준 편지 봉투를 열어 내용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거기엔 분명 지난번에 봤던 에스뮈에의 필체로 짧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사룡 토벌에서 대체 무엇을 보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그 심약하기 그지없는 성녀가 직접 그대와 독대 하고 싶다고 하더구나. 감히 여를 두고 다른 아낙네와 무슨 밀회를 가졌는지 나중에 제대로 알려 줘야 할 것이니라.]

실로 짧고 다른 내용이 더 있지도 않았지만, 필체는 에스뮈에의 것이 맞았다. 그게 아니면 정말 정교하게 위조했거나.

"...무장은 왜 하고, 기척은 왜 죽이신 겁니까?"

"모, 몰래 와서. 보, 보이면 안 되거든요."

"......들어오시죠."

일단 안으로 부르긴 했지만 환장할 노릇인 건 변함없었다.

사룡 토벌에서 본 게 이유라고? 그럼 그때 내가 악마들의 목을 딴 것 때문에 온 게 분명하다. 문제는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이렇게 성녀하고만 독대 하는 형태로 하게 될 거라고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커피 드시겠습니까?"

"아, 예. 감사합니다."

'마력을 쓰니 마족이다. 죽어라!' 라는 의미로 왔다면 이렇게 혼자 오지 않았을 것이다. 에스뮈에에게도 말하지 않은 걸 보면 그때 내가 지나가듯했던 부탁을 성실하게 지키고 있는 것도 맞을 것이다. 근데 그런 상황에서 용사 몰래 내게 와서 확인해야 할 게 있다고? 심지어 자신의 존재감까지 지우는 정체불명의 신성력까지 써가면서?

저렇게 소심해 보이는 사람이 사랑에 눈이 뒤집혀 식칼을 들고 배때기를 쑤시는 기똥찬 전개에 당할 생각은 없었기에 여전히 검을 옆에 둔 채 성녀를 바라보자, 호로록 거리며 커피를 마시고 몸을 녹인 성녀가 예의 우물쭈물한 태도를 보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다름이 아니라, 지난번 지하수로에서 보여주셨던 것 때문에 왔는데요..."

"보여드린 게 한 두 가지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만."

"그, 그랬죠. 아, 악마들의 목을 그... 동시에...촤악! 하고..."

뭔가 어설프게 역동적인 동작을 취하려다가 자신이 아직 커피잔을 쥐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어버버 거리는 꼴이 심히 아둔해 보였지만 저것도 다 연기일 수 있었다.

"이해했습니다. 나중에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할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성녀님하고만 이야기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저,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일단, 미리 이야기를 해두는 편이 지크에게 좋을지도 몰라서 이, 이렇게 왔어요."

"...어떤 이야기를 해두고 싶으셨던 겁니까?"

사람 참 환장하게 만드는 말투였지만 버벅이기만 할 뿐 어눌한 게 아니라서 알아듣는 데에는 불편함이 없다. 내 질문에 잠깐 말을 멈춘 성녀는 조심스럽게 커피잔을 옆 탁자에 올려두고는 잠깐 품에 안고 있던 자신의 스태프를 움켜쥐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의 말투는 찾아볼 수 없는 깔끔한 형태로 질문했다.

"당신은 마신의 챔피언입니까?"

그 순간, 어쩐지 성녀의 두 눈이 은빛으로 빛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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