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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85화 (385/412)

이래서 세네란이 경고했던 거로군.

성녀가 던진 질문의 의도가 어떤 건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나에게서 마력의 조짐을 발견했기에 나온 질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당장 신경 쓰이는 건 그런 것보다 방금 전까지의 우물쭈물하던 모습과 전혀 다른 침착함이 담긴 시선과 태도였다.

눈빛이 바뀌었다. 비유같은 게 아니라 물리적으로.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대로인데 연갈색에 가까웠던 성녀의 눈동자는 은은한 은빛을 띠고 있다. 마력시로는 차이를 구분할 수 없었으나 저렇게 바뀜과 동시에 아주 미세하게나마 세계수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 마치 바람처럼 전신에 와닿은 걸 보면 신성력과 연관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해서 적의가 있는 건 또 아니었기에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되물었다.

"그거 신성력입니까?"

"예. 거짓을 판별하는 성법을 썼습니다."

"그것만 쓴 겁니까?"

"...그, 조금 침착하게 진정시키는 성법도 같이 썼습니다."

어쩐지. 막상 직접 물어보기 조금 부끄러웠는지 이 상황에서도 살짝 시선을 내리는 꼴이 조금은 웃겼다.

마법사들의 거짓말 탐지기인 진실의 수정구는 정확도가 완벽하진 않다고 들었는데 저건 어떠려나? 딱히 고압적이지도 않고 그저 침착한 태도를 보일 뿐인 성녀를 잠깐 응시한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의 질문에 대답해줬다.

"모릅니다."

얼핏 황당하기 그지없는 대답일 수 있었음에도 성녀는 얼빠진 어투로 반문하거나 추궁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갸웃거릴 뿐. 저 성법이라는 게 효과가 확실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난 정말 모르니까. 마신교의 성녀님조차 확신을 못 했는데 뭘 알겠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는 묻지 않으시나요?"

"확실하게 대답부터 하는 게 나을 거 같아서 일단 대답한 겁니다. 그 질문은 이제 해야죠. 왜 그런 요상한 질문을 이렇게 몰래 와서 하는 겁니까?"

아직 '죽어라, 마신의 첨병!' 의혹이 사라진 게 아니었기에 긴장을 유지하며 자연스럽게 자세를 조정해 언제든지 검을 뽑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유사 성기사를 자칭하던 악마 숭배자들하고는 싸워 봤어도 진짜 성기사하고는 싸워 본 적이 없었기에 신성력이라는 건 나에게도 미지의 영역이었다. 하물며 상대는 한 교단에서 용사의 동료로 내세울만큼 확고한 신성력을 지닌 성녀 테네아시. 그게 선천적 재능인지 후천적 재능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겨우 어벙한 태도를 보인다고 하여 내가 방심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만에 하나 적의를 드러내고 삽질을 하려고 들면 어디 하나 잘라버려야 안전하다. 지크프리트와 제국과의 관계가 틀어지는 건 그 다음 문제였다.

"...엘드미아 님이 그때 보여주셨던 능력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알고 계신가요?"

다행히 테네아시는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가 아무런 적의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공격 의사가 없는 건 확실했다.

"마력입니다."

"...으으음, 조금 다른데."

"다르다구요?"

조금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하는 건 테네아시였지만 정작 당황스러운 건 나였다. 내 반응을 본 테네아시는 조심스럽게 스태프에서 손을 떼 자신의 눈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성직에 몸을 담게 되면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니고, 신성력이 높아질수록 보이는 게 많아진다는 의미예요."

침착하게 말할 수 있게 된 것 뿐이지, 묘하게 소심한 화법은 변화가 없었기에 나도 모르게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결론을 강요하고 말았다. 그러자 테네아시는 또 한 번 당황하며 서둘러 본론을 입에 담았다.

"그, 그러니까 오러나 마나를 느끼는 것과 별개로 다른 신성도 엿볼 수 있게 된다는 거죠. 그때도 그랬고, 지금은... 두 종류의 신성이 느껴지고 있구요."

"...허어."

이 정도라고? 조금 어이가 없을 정도라서 순순히 품에서 세계수의 씨앗을 꺼내보이자 테네아시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게 맞다는 듯이.

"어느 신의 신성인지도 느껴지는 겁니까?"

"아, 아뇨. 그냥... 다르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어요. 색이 다르다는 느낌? 악신의 신성이 아니면 그냥 조금 다르구나 하는 정도만 눈치내는 정도인지라..."

그럼 이게 세계수의 씨앗이라는 정보까지는 알지 못한다는 소리로군. 뜬금없는 등장에 이어 뜬금없이 고민거리를 안겨준 테네아시를 바라보며 씨앗을 다시 품에 넣은 나는, 입을 오물거리며 뭐라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 그녀를 향해 질문했다.

"제가 마신의 챔피언 내지는 사도라고 칩시다. 그럼 어쩔 생각이었습니까?"

"...지크에게 해를 끼칠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어요."

고작 질문을 위해 이렇게 왔다고? 하도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마력을 쓸 줄 아는 인간에게서 신성이 느껴지니 마신 에파가 님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마족의 신이니 저런 의혹이 드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

하지만 그걸 걱정했으면 이곳에 혼자 오지 말았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녀의 안일한 판단에 절로 궁금증이 생겼다.

"나름 잘 지내고 있다는 것도 일단 제쳐두고, 만약 그런 의도가 있었다면요?"

그러나 이어진 내 질문에 대한 테네아시의 대답을 들었을 땐 궁금증이고 나발이고 등골을 따라 소름이 돋고 말았다.

"같이 죽으려고 했어요."

한 치의 주저도 없이 튀어나온 즉답.

차라리 눈에 광기라도 서려 있으면 평범한 광기 피폐 성녀라 생각하며 진절머리를 치고 끝났을 텐데 테네아시는 더할 나위없이 침착했다. 덕분에 그녀의 대답이 단순 허세가 아니라 동귀어진이 가능하다고 여길만큼 강력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어서 나온 확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거 완전 미친년 아니야 진짜?!

"씨발 세상에, 대체 뭔 생각을 한 겁니까?!"

당연히 예의고 뭐고 필터링을 거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나마 반말을 안 하는 게 마지노선이었다.

안티오크의 신성한 수류탄이라도 품고 있는 건가? 나는 테네아시가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일단 벨트에 걸어뒀던 건틀릿부터 착용하고 봤다.

눈앞에 자살 폭탄테러의 가능성이 넘치는 광신도가 있는데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다. 건틀릿의 보호 능력이 얼마나 유용할지는 알 수 없으나 이상한 낌새가 보임과 동시에 목을 치고 방어막을 발동시킬 생각으로 가득한 나를 보면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던 테네아시가 스태프에서 완전히 손을 떼며 말했다.

"엘드미아 님은 굉장히 강하니까요. 지크조차 아직 엘드미아 님을 이기지 못 하는데, 만약 다음에 만났을 때 이 이야기가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지크를 죽이려고 하면 막을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무방비하게 있었지만 이미 믿을 수 없는 년이었기에 내 긴장감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저마저도 뭔가의 꿍꿍이로 보일 뿐이다.

"옘병. 보통은 그럴 경우 다른 사람들을 데려와 포위부터 하는 게 정상적인 판단 아닙니까?"

"그... 반역자 저택에 홀로 들어가기도 하셨고, 오크 군단하고 싸우다가 서부 한가운데에 떨어지시고도 무사히 돌아오셨으니까요. 어지간한 인원은 의미 없을 거고...기껏 사람들을 불렀는데 지금처럼 아무런 악의도 없으면 괜히 다른 사람들이 엘드미아 님을 오해하게 될 테니 죄송스럽기도 하고..."

씨발. 어이가 없을 만큼 구구절절 맞는 말이긴 한데.

태도도 평온하고 이젠 그럴 의사가 없다는 반응이었지만 결국 내 입장에서는 방문을 두드리는 그 순간부터 항시 디럭스 봄버를 외치며 터져 버릴 가능성마저 있었던 인간이 별 요상한 부분을 배려하고 신경 쓰려 한다는 감상 밖에 나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저딴 극단적인 선택을 한 주제에 판단은 냉철하게 했다는 게 짜증 나.

"그래서 지금 정체불명의 폭발 성법을 준비한 채 이곳에 왔다는 겁니까? 그런 주제에 그렇게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고? 성녀님, 혹시 감정적으로 결핍이 있거나 어린 시절 불우한 환경을 겪어 생명에 대한 존중이 사라지신 겁니까?"

지금 테네아시의 목이 제 몸뚱이에 멀쩡히 붙어 있을 수 있는 건 그녀가 성녀여서도 아니고 지크프리트의 애인이여서도 아니며 결사의 각오를 한 채 내 앞에 섰기 때문도 아니다.

몸통과 머리를 분리시키면 터지는 폭탄일지 몰라서 내버려 두는 것에 불과하지 씨발!

진짜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는 법이다. 내 씨발 살다 살다 이세계에서 자살 폭탄테러의 위험 속에 놓이게 될 줄이야. 존중과 예의를 반쯤 내다던진 내 반응에도 테네아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 상황에서 멋쩍게 웃는 정신나간 행동마저 보일 뿐.

"그런 건 아니지만 지크가 위험한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어디 가서 그런 건 아니라고 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봐도 제 추측이 맞는 거 같으니까."

나는 무슨 길 가다가 사람에게 부딪친 것에 대해 사과하는 것처럼 '죄송합니다.' 라고 고개 숙여 사과하는 테네아시의 뒤통수를 내리쳐서 일단 기절이라도 시키고 싶은 충동을 꾸역꾸역 참아가며 이를 악물어야 했다.

"잠깐, 그럼 제가 용사님을 해칠 가능성이 있는 것만 중요하지 그 외의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겁니까?"

"예? 아, 그렇죠. 상관없죠."

"...상관이 없다구요? 마신 에파가 님의 챔피언이면 마왕을 도울 수도 있는 거잖습니까."

"어... 아무리 그래도 거기까지는 극단적으로 생각 안 했는데, 무엇보다... 안 도우실 거잖아요?"

정말 정말 난감하다는 표정 위로 '도대체 왜 그런 편견을...?' 이라는 느낌을 물씬 풍기기 시작한 테네아시.

나는 당장 검을 뽑는 대신 이 빡대가리같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 짜내야 하는 상황에 절망과 분노를 느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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