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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87화 (387/412)

"후우...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이번 일은 우리 둘 다 입 닥치고 넘어가는 게 서로에게 이로우니 그냥 넘어 갑시다. 1 황녀님의 부탁은 뭐였습니까?"

이미 말을 곱게 할 의욕도 나지 않았기에 이를 드러내는 라이카를 진정시키며 털썩 주저앉자 테네아시는 품에서 내게 건네줬던 구슬을 하나 더 꺼내주며 말을 이었다.

스페어 목숨 세 개. 이 정도면 확실하게 정상참작이 될 수준이다.

"황실과 이티스엘 왕실이 공식적인 자리를 마련해 엘드미아 님의 공을 치하할 것이라고 하셨어요."

임상시험한 걸 리필해준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기에 곱게 받으며 이야기를 들으니, 1월 초에 맞춰 행사가 열릴 예정이라고 한다. 시간 상으로는 아직 두 달 가량 남았지만 제 1 황녀인 에스뮈에를 구한 공까지 같이 치하하는 자리이다보니 황실 쪽에서 굉장히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있다는 모양이다.

"그래도 이티스엘에서 주관하는 형태라서 양국의 합의 하에 행사 준비를 도울 제국의 사절단이 방문할 예정이랍니다. 대표는 1 황녀님이시구요."

아무래도 셰릴과 스승님이 식사 시간에 나눴던 추측대로 흘러갈 모양이다.

"혹시 어떤 형태의 보상을 받게 되는지 알려주셨습니까?"

불현듯 레스롬 공작의 싸늘한 시선과 함께 언급되었던 귀족 작위의 가능성이 떠올라 물어보니 테네아시는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그건 직접 만나서 말씀드리겠다고 하셨어요. 일주일 뒤에 도착할 거라고 하셨거든요."

"일주일이요? 아직 1월까지는 두 달 가까이 남았잖습니까?"

"어... 공동으로 준비하는 거면 보통 그 정도 걸릴 텐데요? 회의하고, 명목을 위해 귀족들과 파티도 열고, 각국에 보낼 서신을 준비하고 검토하며 행사에 필요한 물자도 준비한다고 치면..."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가며 당연하다는 듯 과정을 설명하는 걸 보아하니 과연 한 교단의 주축이 되는 성녀가 맞긴 했다.

하지만 여전히 딱밤이 마려운 어벙한 태도였기에, 나는 우리 모두를 위해 최대한 빠르게 대화를 마치고 그녀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테네아시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어벙한 반응과 어수룩한 행동을 선보여 나로 하여금 엉덩이를 걷어차고 싶어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그녀를 보낸 나는 교수실 한가운데 무릎 꿇고 앉아 데오니 성녀님께 배웠던 대로 진심을 담아 에파가 님께 기도를 올렸다.

제발 두 번 다시 이딴 일로 저 미친 자폭성녀랑 독대하지 않게 도와달라고 말이다.

애가 아직 어려서 극단적일 뿐이라고 이해해주고 싶어도 자폭은 선 넘었다.

제국 신성회는 다른 종교를 배척하지 않는다.

하지만 교리에 의거하여 빛의 에테를 최고신으로 섬기고 그 대리인이라 할 수 있는 용사를 신의 대리인에 준하는 자격으로 섬긴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맹목적인 신앙보다 현실적인 계산이 더 많이 섞여 있었다.

인족에게 가장 많은 자비를 베푸는 게 빛의 에테였기에 응당 이를 우대하여 섬길 뿐이다. 인족의 위험에 앞장서서 구원의 손길을 뻗어 주는 신이 빛의 에테였기에 최고신으로 모신다. 만약 다른 신이 그랬다면 제국의 국교 역시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시작이 그러했다 한들 제국과 역사를 함께 한 종교답게 지금은 순수한 신앙인이 절대다수였지만, 그런 역사가 있기에 악신이 아니고서는 중립과 우호를 유지한다. 그건 마신 에파가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죄는 신의 뜻을 왜곡하여 섬기는 이들에게 있는 법이라 여겼기에.

테네아시도 그리 믿는 순수 신앙인 중 하나였다. 그리고 성녀로 발탁되어 에테께서 안겨 주신 권능을 겪은 뒤로 그녀의 신앙은 더욱 굳건해졌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빛의 에테가 윤허한 권능은 신성력 뿐만이 아니다. 교단에서도 극소수밖에 모르는 사실이지만, 테네아시는 신성력과 더불어 통찰력 그리고 지식의 권능을 함께 얻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일들을 알게 된 건 아니었다. 철저하게 용사를 보조하기 위한 한정되고 편향된 능력일 뿐. 그래도 그 권능을 얻음과 동시에 테네아시는 자신의 사명을 이해할 수 있었고,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 지크프리트는 현신한 신앙이자 빛의 에테께서 인족을 사랑한다는 증거 그 자체였으니, 맹목적이라는 말로는 다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헌신하는 게 당연했다. 근래에 이르러서는 사적인 감정마저 피어났기에 신앙 뿐만 아니라 연인을 지키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된 그녀였다.

그녀가 섬기는 것은 에테요, 사랑하는 이는 지크프리트이니. 그게 설령 자신의 목숨을 바치고 교단에 위해를 가한다 할지라도 헌신할 수 있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비친 엘드미아는 아직 본 적도 없는 마왕보다 훨씬 위험한 존재였다.

정확히는 대악마를 상대하는 순간 권능이 발동하여 그가 위험한 존재라는 걸 눈치챘다. 그전까지는 정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조금 특출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악마들의 목과 몸통을 분리하는 정체불명의 힘을 사용하는 것을 직접 보지 못했다면 계속 몰랐을 것이다.

그 짧은 순간 강력한 마력과 신성이 뒤섞여 악마의 신체에 개입해 무력화 시키는 경악스러운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다. 지크프리트는 그 뒤로도 연신 그 기술을 배울 방법이 없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며 기대했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 어수룩함을 연기하며 웃어 보이던 테네아시의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하게 뛰었었다.

그건 악마 뿐만 아니라 신성을 품은 이에게도 통용될 가능성이 있는 기술이었으니까. 테네아시 홀로 생각하고 결론 내려 얻은 비약같은 게 아니었다. 그와 비슷한 위업이 가능한 존재들은 과거에도 종종 나타났다.

악신을 토벌하고 대륙을 구원하며 이따금씩 승천을 하기도 했던 이들.

반대로 악신을 섬기며 수많은 영웅들을 제물 삼아 악명을 떨친 이들.

신에게 직접 힘을 하사받아 궤를 달리하게 된 그들을, 역사는 반신半神이라 기록했다.

지금 엘드미아가 그런 존재인 것은 아니었으나 대악마를 상대하며 보여 준 기술은 그에게 내재된 가능성의 편린이었다. 그가 오러나 마나와 신성을 섞어 썼으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하필이면 마력이라 문제였다.

그래서, 엘드미아가 오크들과의 전투에서 실종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오히려 안도했던 테네아시였다.

그랬기 때문에, 그가 이티스엘로 귀환하고 있다는 정보를 듣게 된 날부터 수많은 고민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그녀가 오판한 게 있다면 엘드미아가 스스로의 가능성에 완전히 무지했다는 점과, 자신에게 제재를 가하는데 있어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다는 점 정도였다.

'마력과 신성을 언급했는데도 반응이 없었어.'

그게 뭐가 문제인지, 뭐가 다른 건지 관심이 없거나 아예 모른다는 듯한 반응. 거기서 한 번 안도하고, 적의가 없다는 걸 확인해서 또 한 번 안도한 순간 목에 칼날이 날아들었다.

처음엔 성법마저 속인 줄 알았다. 치료보다 거짓 판별의 성법을 먼저 펼칠 정도로 놀란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결국 착각에 불과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착각에서 비롯된 당혹스러움이 자신의 목숨을 살렸다. 그 자리에서 적의를 드러내며 성법을 사용했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나왔을 게 분명했다.

권능 덕에 한정된 지식과 통찰은 얻었으나, 그걸 응용하기엔 경험이 일천하여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되려 조급함에 휘둘려 없던 화근마저 만들어 낼 뻔 했다는 사실을 되씹으며 테네아시는 미간을 찡그렸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오만했다.

용사니까, 성녀니까. 인류 중에서는 자신들과 대대적으로 척을 지려는 이들은 없을 거라 여겼다.

그랬기에 자신이 상황에 따라 대규모 공격을 시행하려 했다고 한들 불만을 토해내는 선에서 끝날 줄 알았다. 어차피 자신은 지금 이곳에 비공식으로 방문한 상태이니, 뒤에 문제가 생겨도 무마할 방법이 있을 거라 여겼다.

나름 사죄의 선물이랍시고 치유의 구슬을 건네준 것도 그런 판단의 연장에 불과했다. 무려 성녀인 자신이 직접 제조한 물건을 세 개나 쥐어줬으니 위협 정도는 눈 감고 넘어갈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오히려 그걸 받자마자 검을 뽑을 줄이야. 이쪽에서 호의를 베풀었다고 여겼는데 단 일격에 호의를 받은 꼴이 되어 버렸다. 뒤늦게 후회하며 지니고 있는 패를 전부 밝히고 어떻게든 회유를 시도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엘드미아가 예상보다 빠르게 이야기를 결론 지은 덕에 유야무야 두리뭉실하게 마무리 지어진 것이 오히려 천운이었다.

상처는 흔적도 남지 않았지만 그때 느꼈던 서늘한 감각과 통증이 아직 느껴지는 듯했다. 테네아시는 무의식중에 목을 쓰다듬으며 성법으로 모습을 가린 채 교수동을 벗어나다 말고 고개를 돌려 엘드미아가 있던 곳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녀를 알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봤다면 주춤거릴 정도로 무감정하고 차갑기 그지없는 시선 너머로, 그와 독대했을 때보다 조금 더 또렷해진 신성이 미미하게 아른 거렸다.

'마신은 인족인 엘드미아를 확실히 주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마신은 그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알려줄 생각이 없는 건가, 아니면 알려주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교단에 있는 기록에도, 권능으로 살펴볼 수 있는 한정된 역사 속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태였다. 덕분에 테네아시는 성녀로 발탁된 이후 처음으로 앞날이 막막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왜 이렇게 서둘렀을까, 차라리 가만히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오히려 이렇게 방문하여 어쭙잖은 위협을 시도한 걸 계기로 엘드미아와 척을 지게 된다면 제 손으로 지크프리트를 향한 위협을 키운 꼴이었다.

"...하아, 바보처럼 굴다 보니 정말 바보가 된 건가."

우울해진 기분 속에서 털레 털레 걷기 시작한 테네아시는 좀 더 장기적으로 엘드미아의 화를 풀 방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첫단추를 잘못 꿴 것은 자신이었으니, 해결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이어지는 후회 속에서 그나마 엘드미아가 치유의 구슬을 받고 꽤 흡족한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그건 자신이 노력해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거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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