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구는 터트리려고 하고, 누구는 베어 버리려고했던 대환장 파티에 대해 아무런 필터링도 거치지 않은 이야기를 마친 뒤, 에스뮈에는 심각한 표정으로 미간을 찡그린 채 정말 오랫동안 고심했다.
"으음... 정말 뭐라 말하기 오묘한 기분이구나. 사실 행동 자체만 놓고 보면 그대랑 별반 차이가 없다는 의견이다만..."
그런 고심 끝에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나로하여금 도끼눈을 뜨게 만들었지만 에스뮈에는 절대 그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테네아시가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에 한번, 그리고 그녀의 그런 극단적인 행동의 원인이 마력이었다는 점에 또 한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왕실 아카데미 한복판에서 디럭스 봄버가 터졌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하지만 그녀의 경악은 나와 방향이 다른듯했다.
"평소에도 얼빠진 언행을 많이 보였지만... 그 정도로 극단적인 행동을 했다고?"
방금 전까지의 가벼운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한참을 고민하던 에스뮈에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음! 이건 나중에 고민할 일이지.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개인적으로는 꽤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뭐 다른 일이 있어?"
뜬금없이 제국 한복판에서 터질지도 모르는 폭탄보다 중요한 일이 있나 싶어 물어보니 별 이상한 녀석을 다 본다는 듯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에스뮈에가 대답했다.
"그대와 함께 있는 시간을 제대로 만끽하는 일인 게 당연하지 않느냐.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을 한정된 시간에 처리하려는 것은 낭비이니라."
그러더니 슬금슬금 지난번처럼 내 허벅지 위에 올라와 떡하니 자리를 잡았다.
"심지어 가벼운 문제도 아닐 것 같은 기분이 드니, 여러모로 정보가 필요한 상황이니라. 여가 아무리 천재라 칭송받는다 한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는 법. 그러니 지금은 그대와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
실로 합리적인 판단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고, 그렇게 그녀의 주장에 따라 나누기 시작한 대화는 내가 서부에서 겪은 일들과 관련된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미 대략적인 행보는 에스뮈에도 알고 있었기에, 실상 거기서 뭐가 힘들었네 뭐로 고생했네 이게 웃겼네 저게 신기했네 같은 평범한 여행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제국의 차기 황제라 할 수 있는 인물을 앉혀두고 하기엔 참으로 볼품없는 내용이었지만 에스뮈에가 굉장히 좋아했기에 아무래도 상관없어져 버렸다.
"모험과 여행이라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그대와 함께 한 번 정도는 가고 싶어지는구나."
그러면서도 한 켠으로는 살짝 아련한 반응을 보였기에, 나는 살짝 헛기침을 하며 그녀의 명령대로 허리에 두르고 있던 팔에 살짝 힘을 주며 말했다.
"...나중에 가면 되지."
"제국의 황녀가 아무런 호위도 없이 말이더냐?"
"내가 마왕군 지휘관 하나 죽일 정도의 실력이 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풋. 확실히 그렇구나. 엄선된 여의 친위대도 그런 위업을 달성하지는 못했으니."
내 가슴팍에 기대며 살짝 다리를 흔드는 것을 보아하니 꽤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나보다.
"그러고 보니 엊그제 보니까 성기사들처럼 엄청 두꺼운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들이 있던데, 그거 정말 갑옷이야?"
"아아, 마족과 싸우는 기사들 전용으로 제작된 갑옷이니라. 사실 단순한 갑옷이라기보다는 마도구에 가깝지."
전선에서는 그런 걸 입고 싸운다고? 전혀 듣지 못했던 이야기라 놀란 표정을 짓자 에스뮈에는 자신의 허리에 감겨 있는 내 팔을 피아노 치듯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아직 정식으로 도입된 물건은 아니니라. 비밀리에 백여 개정도만 시험적으로 전선에 도입되었고, 그 결과가 나쁘지 않아 양산에 들어갔지. 이번에 굳이 저걸 끌고 온 것은 그러한 사실을 대외적으로 알리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니라."
대 마족용 갑옷. 딱히 별도의 명칭은 없이 그렇게 부르고 있다고 한다.
내가 받은 건틀릿의 연장선상에 있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다가 나온 물건으로, 소형화와 경량화가 힘들면 아예 성능을 낼 수 있는 크기까지 키워서 만들어 보자는 쪽으로 방향성을 틀어 제작되었다고 한다.
그녀에게 전해 들은 갑옷의 특징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기계적인 느낌이 강했다. 동력원으로 마석을 요구하고, 전문가의 주기적인 정비가 필요하며, 전장에서 파손될 경우 착용자의 행동이 극심하게 제한된다. 대신 부여된 마법과 기계 장치들의 보조로 기본적인 신체 능력이 상향되며, 엄연히 두꺼운 갑옷이다 보니 방어력이 올라간다.
원래대로라면 입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질 정도로 큼직한 쇳덩이를 걸치고도 일반 전신갑옷처럼 움직일 수 있다는 건 엄청난 메리트가 맞다. 한마디로 진짜 파워드 슈트같은 물건이었다는 거지.
지크프리트가 봤다면 엄청 환장했을 것 같다. 당장 나부터도 조금 설레일 정도니까. 그런 반응이 겉으로 나온 것인지 에스뮈에가 묘한 웃음을 터트렸다.
"뭘 그렇게 흥미로워하는 게냐? 저건 실력 있는 마족과 싸울 능력이 부족한 기사들을 보조하기 위한 물건이니라."
"다 떠나서 그냥 멋있잖아."
"멋? 하하하, 그대가 그런 아이 같은 말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하나 준비해 줄 걸 그랬는데?' 라고 말하는 에스뮈에의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물론 그렇게나 제약이 많은 물건을 군대에 속한 것도 아닌 내가 유지할 방법은 없었기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도 그녀의 장난에 장난으로 응수해주기로 했다.
"괜찮아. 비록 부위가 한정되어 있긴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더 멋진 물건을 얻었거든."
"카쿨라의 도끼 말이더냐? 안 그래도 그로 인해 서부에 온갖 소문과 전설이 무성해졌느니라."
"아니. 투구를 얻었지."
"투구?"
굳이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보는 게 빨랐기에 나는 귀걸이에 의식을 집중해 투구를 생성했다. 어김없이 엄청난 속도로 형태를 갖춰버린 투구의 바이저 너머로 안 그래도 큼직한 눈망울을 더욱 크게 뜬 에스뮈에의 얼굴이 보였다.
"굉장하지?"
"이, 무슨, 말도 안, 세상에?!"
놀라움이 감탄으로, 감탄이 경악으로 바뀌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십수초도 되지 않았다. 너무 놀라 어휘력까지 상실한 에스뮈에는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며 투구를 살펴볼 뿐만 아니라 바짝붙어서 곳곳을 만져 보기까지 했다. 심지어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내 몸 곳곳을 확인하며 투구와 연동된 다른 마도구가 있는 게 아닌지 물어보기까지 했다. 역시 몸은 연약할지언정 마법 지식은 확실하게 지니고 있는 사람다운 반응이었다.
"어떻게? 대체 어떻게 이런 물건이?! 용족이라도 만나고 온 게냐?!"
결국 한 차례 놀라움을 토로한 끝에 정말 귀걸이만으로 발동된다는 걸 알게 된 에스뮈에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질문했다. 그 반응이 너무나도 진지해서 가벼운 장난으로 보여준 게 미안할 정도였다.
"미안. 이걸 준 사람하고 약속해서 자세한 건 말해 줄 수 없지만, 나도 그냥 아티팩트라는 것밖에 몰라"
"그런..."
확연하게 실망하는 기색을 내비쳤지만 어쩔 수 없었다. 뤼밍스가 내건 유일한 조건이었으니까. 단순히 그녀를 비롯해 천 년 넘게 살아온 엘프들의 신념 때문만이 아니라 이걸 만들기 위한 준비 과정 자체가 쉽지 않은 탓이었다.
그때 뤼밍스가 내 눈앞에서 주물거리며 만든 건 마무리 공정에 불과했다. 이 투구 정도의 금속을 만들기 위해 그녀가 쏟은 시간만 백 년이 훌쩍 넘었다고 한다. 그에 대해서도 뭔가 잔뜩 말하며 개량을 통해 시간이 단축될 거라는 희망적인 관측을 내놓기는 했었지만, 당장 가능한 일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 물건을 엘프가 만들었다는 게 알려지면 상황만 복잡해질 수 있었다. 그러니 이건 그냥 고대의 아티팩트 정도로 인식되는 편이 좋았다.
"아쉽지만 별수 없구나. 그런 물건은 뜯어서 술식을 분해해봤자 제대로 분석할 가능성이 3할도 되지 않으니까."
말뿐만 아니라 작은 손으로 계속 투구를 만지는 것이, 정말 매우 아쉬워 보이는 에스뮈에였다.
"그래도 기술이라는 게 그런 영역까지 닿을 수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으니 좋은 계기였느니라. 드워프들과의 투자와 협업에 좀 더 힘을 실어도 불만이 줄어들겠어."
그 와중에도 긍정적인 면을 찾아내다니, 대단하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따라 웃으며 투구를 해제해자 새삼 가까운 거리감에 에스뮈에가 행동을 멈췄다. 그렇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로 똑바로 나를 응시하던 그녀는 이내 뭔가 결심했다는 듯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혹시 알고 있느냐?"
"뭘?"
"가끔은 욕망에 조금 충실하여 쉬는 날도 있어야 업무로 날카로워진 몸과 마음이 휴식을 취하고 다음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라고 하더구나. 도구마저 하루도 빠짐없이 혹사시키면 망가지기 마련인데 사람의 몸은 말할 것도 없다며 말이다."
...뭐지? 이거 내가 에스뮈에를 케이크 먹는 햄스터로 만들기 위해 내뱉었던 말 아닌가? 가물가물한 기억이 확신으로 변하는 짧은 시간, 내 변화를 바라보던 에스뮈에가 눈웃음을 쳤다.
"여는 참으로 설득력 넘치고 타당한 이야기라 여기고 있느니라."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오늘이 바로 그날이기 때문이지."
그렇게 앙증맞은 미소를 지으며 에스뮈에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지난번처럼 길지는 않았다. 하지만 짧고 빠른 대신 확실하게 감촉이 남을 정도로 키스한 그녀는 첫 키스 때와 달리 한없이 당당한 태도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무사히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니라."
어찌 보면 참으로 쌩뚱맞은 애정 표현과 뒤늦은 안부 인사였지만, 난 뭐라 제대로 된 반박조차 할 수 없었다.
"덩치는 산만 하면서 정말 이런 면에서는 한없이 쑥맥이로구나. 이럴 땐 그대도 한 번 더 입을 맞춰야 하는 거 아니더냐?"
난 대답 대신 조신하게 그녀를 들어 옆자리에 앉혔고, 이미 새빨개졌을 게 확실한 내 얼굴을 보며 웃는 에스뮈에에게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